“그냥 넘어가라”는 말에도 굴하지 않는 〈인선지인〉의 두 여주인공 웡팡(왼쪽)과 장야징. ⓒNetflix 화면 갈무리

대선을 앞둔 선거캠프에서 성추행 사건이 발생한다. 남자 직원이 홍보국 신입 여직원의 허리를 은근슬쩍 만지다가 걸린 것. 가해자의 상사는 피해자에게 사과하라고 할 테니 적당히 묻고 가자고 회유한다. 즉답을 피한 피해자의 상사는 그날 노래방까지 이어진 회식 자리에서 술을 잔뜩 먹고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그냥 이렇게 넘어가지 말아요. 세상에는 이렇게 그냥 넘어가면 안 될 일들이 많아요. 그냥 넘어가게 된다면 사람이 천천히 죽을 거예요. 죽을 거라고요.” 수화기 너머 상대는 조용히 눈물을 흘린다. “그렇게 할게요. 우리 넘어가지 마요.” “그냥 넘어가지 맙시다.” “그냥 넘어가지 말아요.” 서로의 말은 반복할수록 용기가 된다. 지난 4월28일 넷플릭스에 공개된 8부작 타이완 드라마 〈인선지인: 웨이브 메이커스〉의 두 여주인공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인선지인(人選之人)’은 ‘사람이 선택한 사람’이라는 의미다. 정권교체를 목표로 삼고 있는 가상의 야당 ‘공정당’의 분투를 담은 이 드라마는 성폭력 사건만을 다루지 않는다. 그린워싱(친환경인 척 가장하는 것), 이주민 차별, 사형제 찬반, 동성혼 등 굵직한 이슈들이 매 화 새로운 주제로 등장한다. 공정당 홍보국 사람들은 원칙을 지키면서도 선거에서 이길 방법을 찾으려 애쓴다. 선거에서 이기지 못하면 모든 약속이 무의미해진다는 결과론과, 신뢰를 깨면서까지 선거에서 이겨봤자 무슨 소용이냐는 과정론 사이의 줄타기도 이 드라마의 중요한 포인트다.

성폭력 사건은 두 주장이 가장 첨예하게 맞부딪치는 문제다. “저희가 집권하고 싶다면 모두 여기서 일하고 싶게 해야 한다”라는 주인공 웡팡 홍보국 부주임에게 가오 부비서관은 이렇게 대꾸한다. “이런 식으로 가면 선거에서 질 거고 그러면 여러분이 주범이 되겠죠.” 없던 일도 만들어지고, 있던 일도 묻히는 선거판에서 ‘대국이 우선’이라는 말은 당해낼 수 없는 명분이다. 하지만 피해자 장야징과 그를 돕는 웡팡은 추악한 범죄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다.

드라마가 공개된 지 일주일 만에 〈인선지인〉은 타이완 넷플릭스에서 가장 많이 시청한 드라마 1위에 올랐다. 드라마 속 인물들은 실제 현실에서 미투 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지난 5월31일, 타이완 집권 여당인 민주진보당(민진당)의 전 직원 앰버 첸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웡팡의 대사인 “그냥 이렇게 넘어가지 말아요”로 시작하는 긴 글을 올렸다. 지난해 9월 당시 미디어 담당 직원이던 그녀는 자신이 차 안에서 같은 부서 동료 감독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했고, 당내 여성국 주임에게 신고했지만 돌아오는 건 2차 가해뿐이었다고 주장했다.

대선판 흔드는 미투 운동

그 뒤 정치권에서 미투 폭로가 줄을 이었다. 2019년 선거 당시 차이잉원 총통의 승리를 이끌었던 핵심 조력자이자 현재 차이 총통의 고문인 옌즈파마저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됐다. 6월2일 차이 총통이 페이스북에 “총통이자 전 민진당 대표로서 사과한다”라는 글을 올렸지만 계속해서 폭로가 터져 나오자 이틀 만인 6월4일 다시 한번 사과문을 올려야 했다. 민진당의 차기 총통 후보인 라이칭더 부총통 역시 성폭력 사건에 대해 무관용 원칙으로 강경 대응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럼에도 여론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6월15일 여론조사기관 ‘타이완 여론재단’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민진당 지지율은 지난 5월 31.1%에서 한 달 만에 24.6%로 떨어졌다. 같은 기관에서 6월20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는 ‘차이 총통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비율 역시 같은 기간 37%에서 48.2%로 11.2%포인트 급증했다. 6월26일 타이베이시 노동국은 민진당 내에서 일어난 성폭력 사건 두 건을 조사한 뒤 남녀고용평등법 등을 위반한 혐의로 민진당에 90만 타이완달러(약 3800만원)에 달하는 벌금을 내도록 했다. 야당인 중국국민당(국민당)에서도 미투 고발이 나오고 있지만, 진보 정당인 민진당의 경우 젠더 의식과 성평등을 특별히 강조해왔던 만큼 당분간 지지율 회복은 쉽지 않으리라 보인다. 내년 1월에 열릴 총통 선거를 앞두고 터진 미투 운동이 대선판을 흔들고 있는 셈이다.

“마치 예언 같다. 드라마가 현실이 됐다.” 양첸하오 타이완 프리랜서 기자는 〈시사IN〉과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인선지인〉이 타이완 공영방송사 PTS가 넷플릭스와 합작해 만든 드라마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작품으로 꼽힌다며 그 여파가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라고 말했다. “학계, 언론계, 스포츠계, 연예계 모든 분야에서 폭로가 쏟아지고 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벌써 7명이 가해자이고 3명은 피해자다.” 그는 타이완 기자들로부터 미투 운동을 먼저 겪었던 한국의 경험에 대해 기사를 써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고 있다고 말했다.

6월16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민진당 관계자들이 성폭력 사건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 ⓒCNA Photo

미투 폭로는 2주 만에 90여 건이 넘었다. 정치권뿐만 아니라 사회 각 분야에서도 폭로가 이어졌다. 타이완의 ‘국민 MC’로 통하는 미키 황은 10여 년 전 미성년자를 성추행했다는 혐의를 받자 자해를 시도해 병원으로 옮겨졌다. 인플루언서인 야오러는 아이돌 그룹 멤버 중 한 명인 옌야룬(염아륜)이 2018년 미성년자였던 자신과의 성관계 영상을 찍고 유출했다고 주장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가해자로 지목된 옌야륜이 이날 기자회견에 일방적으로 참석해 사과하기도 했으나 피해자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드라마의 대본을 쓴 치엔리잉 작가 역시 페이스북을 통해 같은 업계 선배로부터 성추행당했던 일을 공유했다. “내가 그의 집에 가지 말아야 했을까? 하지만 내 친구는 스스로를 자책하지 말라고 격려했다. 그는 내게 그런 일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렇다, 그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됐다.” 작가 자신의 경험에서부터 만들어진 드라마 〈인선지인〉은 타이완에서 최초로 미투 물결을 이끌어냈다. 드라마의 부제 ‘웨이브 메이커스(Wave Makers)’에 눈길이 한 번 더 가는 이유다. 한국에서도 넷플릭스로 시청할 수 있다.

기자명 나경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did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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