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배낭이라는 개념을 비교적 일찍 알았다. 9년 전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기후변화방재산업전’ 전시회장을 둘러보다가 지금의 저자를 만났다. 당시 ‘생존21’이라는 인터넷 카페의 카페지기였던 저자는 사비를 털어 마련한 부스에 생존배낭과 비상식량, 미니 방독면, 응급 정수기 등을 전시해놓고 관람객들에게 사용법을 설명하고 있었다. 신기한 마음에 인터뷰를 하고 간단히 기사를 썼다. 취재 후 은박담요 5장도 선물로 받았다.

당시만 해도 신기하고 특이한 취미 활동처럼만 생각되던 ‘생존배낭 싸기’가 이제는 전 국민 필수 위기 대비책으로 등극해버렸다. 기후위기와 전쟁위기가 여러 차례 현실로 다가오면서다. 5월31일 새벽 서울시의 경계경보 오발령 재난문자를 확인하고 맨 처음 한 생각도 이거였다. ‘아, 생존배낭 싸놓을걸.’ ‘은박담요 그거 어디 뒀더라?’

싸야지 싸야지 하면서도 아직 어딘가 처박혀 있을 은박담요조차 찾아놓지 않았다. 지극한 낙관주의자인가, 그냥 게으른 사람인가. 사실 생존배낭 꾸리기를 미루는 이 마음에는 다른 이유도 하나 있다. 생존배낭을 싸는 행위가 왠지 각자도생을 인정하고 나도 거기에 합류하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나 혼자 살면 뭐해’ 싶어서 1인분의 생수며 참치캔이며 정수 알약 등을 챙기는 일이 부질없이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9년 사이 도시재난 전문가로 유명해진 저자의 최근작 〈생존배낭〉을 읽고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공기 베개는 물에 빠진 사람의 구조용 투척 튜브 혹은 물을 넣는 물주머니로 쓸 수 있다’ ‘라면보다 국수가, 고추참치보다 담백한 일반참치가 유통기한이 길어 비상식량으로 좋다’ ‘무겁고 잘 휘는 양초보다 인테리어용 납작한 티라이트가 유용하다’ 같은 쏠쏠한 정보 외에, 나 하나만이 아닌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으로도 생존배낭을 싸게끔 만드는 팁이 책 곳곳에 숨어 있다. 여러 사람이 함께 나누기 좋은 비상 물품, 어린이·노인·반려동물의 생존배낭 싸는 법 등을 세세하고 따뜻하게 알려준다. 재난대피소를 답사하면서 그 공간이 장애인이나 환자에게 얼마나 불친절한지를, 재난안전포털에서 정보를 찾으며 이주민이나 다문화 가정에 얼마나 배려가 부족한지를 절감할 수 있다. 결국 각자도생만이 생존배낭의 철학이 아님을 알게 된다.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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