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수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면 허름한 술집에 가는 거라며 대폿집에서 두부 두루치기를 시켰다. ⓒ박찬일 제공

1970년대에 이미 서울은 만원이었다. 이촌향도라고 했다. 나중에 언론은 그것을 박정희 정권의 정책이라고 했다. 곡물 가격을 낮춰서 농민들이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향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그들이 수출 역군이었다. 처녀 머리카락을 끊어서 가발 만들어 수출을 하며 뭐든 수출해야 먹고살 수 있다고 외쳤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학생들은 ‘백억불 수출 천불 소득’이라는 리본을 달고 다녔다. 서울엔 구로공단이 있었다. 최근에 그 동네를 걷는데, 상전벽해였다. 이른바 벤처타운으로 변한 구로동이라니. 변하지 않은 건 ‘수출의 다리’였다. 오래된 다리를 자세히 보니, 시멘트가 낡아서 언제라도 철거해야 할 꼴이었다. 저 다리로 무엇이든 달러와 바꿀, 가발 같은 수출품을 실은 트럭들이 다녔을 것이다.

도시 변두리로 몰려온 농촌 출신 사람들은 공단이나 공사장에서, 마치코바(동네에 있는 작은 공장)에서 열심히 일했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다. 학교가 미어터졌다. 2부제는 물론이고 오후 한두 시에 등교하는 3부제도 있었다. 한 학급에 90명을 넘기기도 했다. 교실 크기는 그대로인데 애들만 자꾸 집어넣었다. 요즘 교실과 같은 크기에 90여 명까지 들어가 수업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책상을 칠판 앞까지 바싹 당겨놓아서 맨 앞에 앉은 애들은 남산 바라보듯 고개를 쳐들어야 했다. 그러고도 수용이 안 되어 한 학년에 스무 반이 넘는 학교도 있었다. 전교생 조회를 할 수 없어서 절반씩 나눠서 했다. 가을운동회도 1·3·5학년 따로, 2·4·6학년 따로 했다.

학교 앞에는 햇복숭아와 해삼∙멍게 장수가 좌판을 벌였다. 병아리 장수도 있었고 뽑기 장수와 야바위꾼이 진을 쳤다. 초등학생을 상대로 온갖 야바위꾼들이 몰려왔다. 물방개나 지네 경주에 애들이 돈을 걸었다. 지금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기억나는 야바위 중에는 ‘긴 거 짧은 거’가 있었다. 비슷한 크기의 고무줄을 보이게 해놓고, 길이가 짧은 거나 긴 것을 정해서 돈을 거는 야바위였다. 딜러(?) 아저씨가 교묘하게 손 안에서 고무줄 크기를 속이는 수법이었는데 모르고들 당했다. 이런 일들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생각해보라. 수업이 끝나서 학생들이 나오면 대략 수천 명이 교문 앞에 바글거린다. 거기서 몰려든 장사치들과 야바위꾼들이 구석구석에 판을 연다. 선생님들이 통제를 하고 말고 할 게 없었다. 매일 하교 시간이면 카오스가 벌어지는 것이었다.

한번은 내가 내 이 딜러 아저씨에게 50원을 잃었다. 벼 이삭이 그려져 있는 은빛 동전. 일주일 용돈이었다. 버스 요금 10원이 아까워서 걸어 다닐 때였다. 그때 내 친구가 나섰다.

“아저씨, 그거 속이는 거잖아요!”

“뭐 이 자식아. 뭘 속여. 넌 돈도 안 걸고 왜 끼어들어!”

딜러 아저씨는 판돈을 대충 거둬들이면서 인상을 썼다.

“××, 속이는 거 누가 모를 줄 아냐고!”

철수였다. 우리 반 철수. 그가 역성을 들었다. 딜러 아저씨에게 대들다니. 한 대 칠 기세였지만 철수도 만만치 않았다. 딜러 아저씨가 50원을 휙 던지고 침을 뱉었다.

“재수 옴 붙게 어린 새끼가. 꺼져 새끼야. 먹고 떨어져!”

나는 무서워서 얼어붙어 있었다. 철수가 태연하게 50원을 집어 들어 툭툭 털어서 내게 주었다.

철수가 날 챙긴 건 이유가 있었다. 글짓기 숙제를 내가 대신 해주곤 했던 것이다. 나도 그가 좋았다. 주먹이 세고 놀이를 꿰고 있는 데다가 어린 나이답지 않게 덕이 있었다. 당시 소년들이 할 수 있는 ‘알바’ 중엔 리어카 뒤밀이가 있었다. 산동네 입구에 있다 보면 아저씨들이 짐을 산더미처럼 싣고 올라갈 때가 있다. 겨울에 연탄 리어카 같은 게 특히 그랬다. 그때 뒤를 밀어주면 10원을 줬다. 우리는 같이 뒤밀이를 했다. 그것도 아무나 못했다. 짭짤한 벌이였던 것이다. 나는 철수 덕에 간혹 그 일감(?)을 땄다. 리어카 아저씨가 딱 한 명만 고를 땐 덩치가 더 큰 철수가 낙점받았다. 그는 몸이 아프다며 내가 대신 일을 할 수 있게 해줬다. 그렇게 받은 10원으로 우린 ‘10원에 마음대로’ 만화 가게에 갔다. 10원을 내면 권수 무제한으로 만화를 볼 수 있는 방식이었다.

나는 초등학교를 두 번 옮겼는데, 이사를 가서 그런 게 아니었다. 밀려드는 인구로 금세 과밀 학교가 되어버려서 새로 학교를 지어댔기 때문이다. 그러면 근처의 학교 서너 개에서 학생들을 뚝뚝 떼어 전학을 보내버린다. 아이들이 몰려드는 변두리 서울이 더했다. 야산을 밀고 학교를 계속 새로 지었다. 봄이 되어 등교하면 담임이 전학 갈 애들 이름을 부르고 그러면 바로 가방을 쌌다. 그날 새 학교로 전학 가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새 학교 이름을 그때 처음 들었다. 학교가 새로 생기면 이름을 지어야 하는데 교육청도 얼마나 골치가 아팠을까. 가좌동과 연희동 사이에 새로 생겼으니 ‘연가’라고 짓는 식이었다.

날씨 사나운 봄날 아침, 변두리 신작로와 야산 길을 인솔 교사 따라 1000명도 넘는 학생들이 줄지어 걸어가던 풍경은 지금도 기억의 구석에서 찬바람을 불러온다. 새 학교는 아직 운동장 공사가 완성되지 않아 진창이었다. 운동장에 낡은 나무 패널을 쭉 깔아 교사(校舍)로 들어가는 길을 만들어놓았다. 나는 추위에 코를 훔치며 패널 위를 걸었다. 아이들의 입성은 형편없었다. 가난한 애들은 낡은 봄 스웨터의 손목 부근이 때에 절어 반들반들했다. 정전기를 일으키던 싸구려 화섬 스웨터는 낡고 닳아서 올이 풀리면 연탄불에 지져서 그대로 입었다. 그런 애들이 도시 변두리를 가득 채웠다. 전학 가는 길을 걷는데, 누가 등을 툭 쳤다. 철수였다. 너도 나랑 같은 학교로 전학 가는구나. 반가웠다. 50원 사건 이후로, 리어카 뒤밀이 팀(?)으로 우린 친해져 있었다.

마도로스를 기다리던 소년

철수는 소년의집 출신이라고 했다. 소년의집은 아동보호시설이었던 것 같다. 거기 출신 애들이 초등학교에서, 길에서 짱 먹곤 했다. 우선 깡이 셌고, 나이도 또래보다 한두 살 많았다. 철수와 추석 무렵 수색에 갔다. 그쪽에 묘지가 있어서 먹을 게 많다는 것이었다. 성묘 마친 어른들이, 산소 근처를 얼쩡거리는 애들에게 과자며 ‘옥춘이사탕(옥춘당)’ 같은 걸 나눠주었기 때문이었다. 옥춘이사탕에 웨하스, 센베를 먹으러 가자!

대형 묘역이 이미 있어서 물(?)이 더 좋은 멀리 벽제와 용미리까지 진출하는 애들도 있었지만 거기는 좀 멀었다. 시외버스를 타야 할 거리여서 포기했다. 수색이 만만했다. 하지만 옥춘이사탕은커녕 괜히 그쪽 애들에게 얻어터질 수도 있었다. 영역 침범이었으니까. 수색은 센 동네였다. 난지도가 있었다. 그 동네 애들은 아무도 못 건드렸다. 누군들 냄새 나는 쓰레기 하치장에서 벌이를 하고 싶었을까. 상암동 난지도는 그때 이미 쓰레기차가 몰려들었다. 쓰레기가 산을 이루는 정도는 아니었고, 너른 들판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때 우리 동네 애들이 쓰는 말이 있었다.

“상암동엔 똥파리, 가좌동엔 날파리, 신촌엔 왕파리.” 그냥 의미 없는 소리였는데, 상암동은 쓰레기 하치장 덕에 정말로 파리가 들끓는 동네였다.

그날, 수색 야산에서 우리가 옥춘이사탕을 노리고 있을 때 어디선가 상암동 패들이 짠, 하고 나타났다. 그들도 우리처럼 옥춘이사탕과 과일을 얻어먹으러 온 것이었다. 우리는 옥춘이사탕이고 뭐고 포기하고 싶었다. 그만 돌아가려는데 철수는 상암동 패들과 붙었다. 직사하게 맞았다. 거의 머리 하나는 더 큰 형들이었다.

추석 쇠고 복도에서 철수를 만났다. 그가 옥춘이사탕이랑 알록달록한 젤리를 내밀었다.

“야, 너 줄려고 숨겨놨던 거야.” 아마도, 지금 생각해보니 소년의집에서 형들에게 얻은 것이었을 테다.

철수는 부모가 있었는데 보호시설에서 살았다. 자세한 건 모른다. 자기 아버지가 마도로스라고 했다. 배 다 타면 데리러 온다고 우리에게 말했다. 그는 아버지가 마도로스 모자를 쓴 흑백사진을 우리에게 보여주곤 했다. 마도로스는 전 세계를 다닌다고 했다. ‘딸라’를 많이 벌어서 큰 궤짝에 싣고 부산에 입항하면 자기를 데려갈 거라고 했다. 새 학교에서 철수를 만났고, 같이 졸업했다. 중학교가 갈리면서 연락이 끊어졌다. 그러다 고등학생이 되어 다시 만났다. 당시 출입금지이던 신촌의 경양식집에 갔을 때 “라이스로 하시겠습니까, 빵으로 하시겠습니까” 하고 묻던 경양식집 웨이터로 해후했다. 철수는 중학교만 마쳤다고 했다. 일찍 유흥가로 돌았다. 그를 만났을 때 이미 웨이터 일을 시작한 지 꽤 되어 일종의 견습 부하인 ‘뽀이’도 몇 거느리고 있었다. 녀석이 돈가스와 비후까스(비프커틀릿)를 시킨 내 자리에 슬쩍 맥주를 준 기억이 난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그 맥주는 칼스버그였다.

그러고는 그와 소식이 끊어졌다. 내가 가지고 있는 연락처라고는 그의 가게 전화번호가 전부였다. 웨이터는 오래 일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신촌에 가서 그를 수소문했다. 경양식집은 이미 없어졌고, 철판볶음밥집으로 변해 있었다. 그의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내가 회사에 취직하던 무렵, 자정이 넘은 신촌 골목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벽돌처럼 큰 모토로라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다. 그 골목의 건달이 된 것이었다. 대폿집에서 술을 한잔했다. 그는 아주 큰 어른처럼 말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면 허름한 술집에 가는 거야.

“찬일아. 나 두부도 먹었다 야. 험하게 살았어.” 교도소도 들락거렸다고 나는 알아들었다. 그날 안주로 두부 두루치기를 먹었다. 빵(감방)에 갔다 오면 죄를 잊으라고, 표백하듯 두부를 먹인다. 그러나 두부처럼 하얗게 씻어낼 수 없는, 그의 이야기가 오래 계속됐다(다음 번 글에 이어집니다).

기자명 박찬일 (셰프)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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