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를 짓는 건 중력을 이기는 일이다. 눈물은 중력에 굴복해 아래로 흐르지만 미소는 중력을 거슬러 입꼬리를 잡아 올린다. 빌리 엘리어트를 새처럼 떠오르게 만든 발레처럼, 별을 향해 우주비행사를 쏘아 올리는 로켓처럼, 누군가를 미소짓게 하는 사람은 그 누군가를 땅에서 하늘로 밀어 올리는 존재다. 열한 살 여름에 처음 만난 전학생 미소(김수형)가 하은이(류지안)에겐 그런 사람이었다. 미소 덕분에 미소 짓는 날이 매일이었다.
미소는 꿈이 많았고 하은이는 겁이 많았다. 미소는 높은 데 오르는 게 좋았고 하은이는 높은 데 서 있는 미소를 보는 게 좋았다. 마음껏 추상화를 그리는 미소였고, 정성껏 세밀화를 그리는 하은이였다. 여러모로 달랐지만 그러므로 친구였다. 둘만 존재하는 우주였다. 서로가 서로의 중력이었다. 그 중력을 거슬러 하은이를 미소 짓게 하는 다른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영화 〈소울메이트〉는 미소(김다미)와 하은(전소니) 사이에 진우(변우석)가 끼어든 열일곱 살의 여름에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흔한 통속극으로 넘겨짚겠지만, 사실 진우가 만든 건 삼각관계가 아니라 삼각형. 둘을 잇는 선으로만 존재하던 미소와 하은의 관계를 커다란 도형으로 만들어가는 꼭짓점. 그렇게 생겨난 세모난 여백에 영화의 남은 이야기가 차곡차곡 담긴다. 스물일곱 살을 지나 서른세 살이 될 때까지, 미소와 하은이의 마음속 풍경을 그린다. 때로는 추상화로, 때로는 세밀화로.
미소 대신 ‘안생’, 하은이 대신 ‘칠월’이 주인공인 원작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가 개봉한 2017년 겨울, “따지고 보면 특별할 게 없는 이야기”인데도 “나는 대책없이 이 영화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라고 이 지면을 통해 고백한 바 있다. 영화 소개라기보다 차라리 팬레터라 해도 좋을 글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영화의 각본을) ‘두 여자의 우정’이 아닌 ‘한 여자의 성장기’로 해석해 연출했다는 감독. “어떤 나이에는 안생에 더 가까웠다가 자라면서 칠월에 가까워지는” 여성의 이야기로, 그렇게 “여성이 자신과 싸우며 스스로를 이해하는 과정”으로 보이길 원했다. 다행히 내 눈엔 그렇게 보였고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더 좋아졌다.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는 ‘세련된 통속극’이자 ‘섬세한 성장영화’이며 무엇보다 생기와 활력이 넘치는 ‘멋진 여성영화’다.”(〈시사IN〉 제535호)
그 마음 그대로 이번에도 나는 〈소울메이트〉와 사랑에 빠졌다. 보는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이는 렌티큘러 책받침처럼, ‘두 사람의 관계’이면서 동시에 ‘한 사람의 변화’로도 보이는 미소와 하은의 이야기에 또 매혹되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 〈혜화, 동〉(2010)을 연출한 민용근 감독이 이번에도 캐릭터를, 이야기를, 배우와 관객을, 최선을 다해 아끼고 사랑하는 게 느껴져서 특히 좋았다.
영화에서 하은이는 자주 미소를 짓는다. 집을 지어 올리듯이 미소를 지어 올린다. 그렇게 지은 미소 안에 하은이가 산다. 지금은 이게 다 무슨 말인지 모를 테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차차 알게 될 것이다. 미소는, 하은이가 지었다는 걸. 미소가, 하은이를 지었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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