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찬 화백이 카툰집 〈도리도리〉를 들고 포즈를 취했다. ⓒ시사IN 조남진

무너진 잔해 속에서 가까스로 구출된 윤석열 대통령 캐릭터가 힘없이 읊조린다. “젠장, 학폭이 터질 줄이야….” 붉은 머플러에 뿔테 안경을 쓴 한동훈 법무부 장관 캐릭터는 걱정스러운 얼굴이다. “죄송합니다. 아들이 멸공일보 애독자에 건실한 반공 애국 소년이라고 들었는데….” 국가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됐다가 자녀 학교폭력 논란으로 하루 만에 자진 사퇴한 정순신 전 변호사에 관한 내용이다. 당황한 대통령은 “이거 언론부터 달래야 돼”라며 고심하는데, 이어지는 마지막 컷. “김영란법 밥값 5만원으로 인상 진행시켜!”

박순찬 화백을 만난 2월27일 ‘진격의 수색대’ 첫 화가 마침 공개됐다. 윤석열 정부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새 시리즈다. 현 정부를 향한 비판 수위가 전보다 세졌다는 평가가 많다. 전날 뉴스를 보고 두 시간 걸려 마감했다는 박 화백은 “만화라서 가능한 상상이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모순적인 상황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들춰내면 거기에서 유머가 생긴다. 우리가 부조리한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풍자의 역할이다.” 인터뷰하는 동안 ‘부조리’ 혹은 ‘비합리’라는 단어가 자주 나왔다.

본명보다 ‘장도리’로 더 유명하다. 1995년 〈경향신문〉에 입사해 2021년까지 네 컷 만평 ‘장도리’를 연재했다. 평범한 봉급생활자 장도리의 눈으로 청년 실업부터 재벌과 정치권력의 비리 등 한국 사회 문제를 날카롭게 풍자했다. 네 컷 안에 기승전결을 갖춘 서사와 마지막 펀치라인 한 방이 특유의 인기 요소였다. 언젠가부턴 주인공보다 당대 대통령이 더 많이 등장했다. 정치적 격변기마다 촌철살인 풍자가 이어졌고, 대통령이 희화화될수록 ‘속시원하다’는 반응도 뒤따랐다. 그날그날 네 컷에 담아온 이야기는 26년간 한국 사회를 증언하는 사료가 되었다.

2021년 5월24일을 끝으로 장도리 연재에 마침표가 찍혔다. 오랜 기간 몸담았던 〈경향신문〉도 퇴사했다. 어떤 플랫폼에 소속되지 않고 만화가로서 독자 콘텐츠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심이 컸다. “종이신문의 한계를 넘어서는 다양한 실험이 온라인에서 가능하다고 봤다.” 개인 블로그 ‘장도리 사이트’를 개설한 것은 지난해 6월쯤. 박순찬 화백은 월급 대신 후원 계좌를 열었다. 새 보수정부의 등장과 함께 ‘윤도리’ ‘간도리’ ‘진격의 수색대’ 등 ‘장도리 시즌 2’가 그렇게 시작됐다. 최근 ‘장도리 사이트’에 발행된 만평 150여 편을 담아 카툰집 〈도리도리〉를 냈다.

‘장도리 시즌 2’의 주인공은 보수 정치인들이다. 장도리를 패러디해 윤석열 대통령이 주인공인 만화 ‘윤도리’를 처음 만들어봤는데 예상외로 반응이 뜨거웠다. 윤도리 제7화가 특히 그랬다. 지난해 9월 당시 윤 대통령의 ‘바이든’ 발언과 대통령실의 ‘날리면’ 해명 사건을 다뤘다. 한바탕 혼란을 거듭한 대통령실이 말실수 대응을 위해 훈련을 한다는 설정이다. 윤 대통령 캐릭터가 “기시다, 시진핑 쪽팔려서 어떡하나”라고 말하자 김은혜 대통령실 홍보수석 캐릭터가 마치 로봇처럼 외친다. “다시다, 옥장판 안 팔려서 어떡하나.”

2022년 9월25일 장도리 사이트에 게재된 윤도리 제7화.

이 밖에 “나 도지사 김문순데” 발언으로 유명한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장은 ‘순대’로, 대통령실 사적 채용 논란이 일었던 권성동 의원은 물고기 ‘권성돔’으로 그려진다. 이름이 비슷한 감성돔에 착안했다. 만화에서는 ‘청탁 들어준다는 전설 속 물고기’ 캐릭터다. ‘체리따봉’ 이모티콘은 정치인들이 목매는 명예훈장으로 등장한다. 남루한 행색을 한 이준석 전 대표는 당권 경쟁에서 밀려나 복수를 다짐하는 캐릭터다. 코미디 쇼 〈SNL〉보다 신랄한 ‘박순찬 유니버스’다.

그중에서도 ‘장도리 시즌 2’의 진수는 ‘간도리’로 평가받는다. 정치적 국면마다 애매모호한 태도로 일관하는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 캐릭터를 중심으로 여당의 권력을 둘러싼 이전투구를 코믹하게 풀어냈다. “아이돌이나 연예인도 아니고 대통령을 주인공으로 만화를 연재하는 게 별로 즐겁지가 않더라. 그즈음 안철수 의원을 주인공으로 삼아보면 어떨까 했다. 그 정치인의 캐릭터가 굉장히 복잡하고 변화무쌍하더라. 만화 소재로, 또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다고 생각했다.” 2023년 1월 시작된 국민의힘 당권 경쟁을 주 무대로 ‘간잽이(안철수)’와 ‘마삼중(이준석)’ 캐릭터가 윤석열 대통령 캐릭터를 시종일관 난처하게 만드는 게 핵심이다. 여당 내에서 “간잽이 하나를 못 잡아서 쩔쩔매는 꼴”이라고 자조하거나, 윤 대통령 캐릭터가 권한 ‘충정주’를 안철수 캐릭터가 또다시 간만 보고 도망치는 식이다. 본편 윤도리보다 열렬한 반응을 얻으면서 5회 추가 연재까지 하게 됐다.

윤 대통령 얼굴이 컷마다 다른 이유

올해로 28년 차 시사만화가가 관심을 두는 곳은 정치인의 얼굴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정치인도 알고 보니 낡은 신념을 유지하고 있었다거나 사리사욕을 채워온 사람이었다면 이전과는 다른 얼굴로 묘사되었다. 그러면서 정치인의 말과 행동이 정치인의 인상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우리가 보는 정치인의 모습은 주로 언론 보도를 통해서다. 예전 같으면 대통령이 한 막말이나 말실수는 다 걸러지고 좋은 내용만 보도되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은 대통령이 보낸 텔레그램 문자부터 회담장에서 한 욕설까지 카메라에 실시간 포착되는 시대가 아닌가. 그만큼 대통령이 지닌 이미지도 과거와는 다르게 재현될 수밖에 없더라. ‘바이든 쪽팔려서 어떡하나’ 같은 말을 접한 후에 대통령의 얼굴을 봤을 때 그의 인상이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않겠나.”

그의 만평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종종 멧돼지 모습으로 그려진다. 취임 후 대통령의 행보가 굉장히 추진력이 있으면서도, 한편으론 저돌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단순히 인물의 생김새를 가지고 비아냥거리는 게 풍자가 아니다. 정치인을 그린다는 것은 그의 생물학적 얼굴이 아닌 공적 활동을 바탕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컷마다 대통령 얼굴이 묘하게 다른 것도 그 때문이다. 지난해 12월23일 만평 ‘JOA’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거버먼트 인게이지먼트가 바로 레귤레이숀이다”라며 영어를 섞어 쓴 장면을 비꼬았다. “영어를 많이 쓰면 멋있어 보일 거라 착각하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 컷에서는 좀 더 ‘빠다 냄새’가 나도록 칠했다.”

윤 대통령 캐릭터가 그려진 〈도리도리〉 표지도 그중 하나다. 대통령 어록을 모아 얼굴을 그렸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손발노동은 아프리카나 하는 것’ ‘종북 주사파와는 협치 불가’ ‘저출산은 페미니즘 때문’ ‘민주화운동은 외국에서 수입해온 이념’ 따위 말들이 빼곡하게 보인다. 취임사에 35회 등장한 ‘자유’라는 단어는 대통령의 얼굴을 구성하는 주재료로 쓰였다. 정치인으로서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되는 한 컷이다.

시사만화 작가로서의 책임감

단순히 우스꽝스럽거나 공격적으로 묘사하는 게 풍자의 전부가 아니라고 박 화백은 말한다. “정치인을 풍자하는 이유는 그 정치인에게서 우리의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정치인끼리 이전투구하는 모습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부조리함과 모순이 그대로 압축돼 있다. 그걸 보면서 독자들도 공감하는 거다. 정치인의 비상식적인 행동에 분노하는 것은 그 정치인 개인에 대한 분노를 넘어 한국 사회에 만연한 비상식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시사만평에 정치인이 단골 소재가 되는 이유다.

가장 기억에 남는 회차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박 화백은 지난해 12월13일 발행한 한 컷 만평을 꼽았다. 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로 ‘과이불개(過而不改)’가 선정됐다는 소식을 들은 한 교수 옆으로 김건희 여사의 논문 재검증이 무산됐다는 뉴스가 떠 있다. ‘좋은 말이로다’라는 제목이다. “어쩌면 교수들의 ‘셀프 디스’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정치는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만큼 조금씩 바뀌기도 한다. 하지만 관심이 저조한 곳에는 이처럼 부조리가 숨어 있는 법이다.” SPC 그룹 계열사 노동자 산재 사망사고부터 김만배 전 〈머니투데이〉 부국장과 수억 원대 돈거래를 한 언론인까지 재벌과 언론 권력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장도리 시즌 2’에도 계속된다.

2022년 12월13일 장도리 사이트에 게재된 박순찬 화백의 만평 ‘좋은 말이로다’.

댓글부터 후원까지 독자의 반응을 직접 만나다 보니 어깨가 무거워졌다. 신문사 시절보다 더 바쁘게 주 6일 마감을 하고 있다며 박 화백은 웃었다. “사실상 마감 시간이라는 건 없다. 거의 24시간이 마감 모드라고 봐야 한다.” 사회적 분위기가 양극화되면서 편향성 논란도 전보다 격해졌다. 뭐가 진짜고 뭐가 가짜인지, 쏟아지는 정보 가운데 무엇을 강조할 건지 시사만화가로서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예전에는 확실히 통했던 방식이 이제는 통하지 않는다. “영구적으로 유효한 원칙이라는 게 갈수록 쉽지 않다”라고 그는 말했다. “다만 변하지 않는 기준이 있다면 작가로서의 책임감이 아닐까. 작가의 활동이 어떤 점에선 대중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친구들끼리 돌려보는 게 아니고,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있어야 한다.”

시사만화의 위기라고는 하지만 박 화백은 만화의 가능성을 이야기했다. 2021년 카카오페이지에 연재한 웹툰 〈환쟁〉이 대표적이다. 구한말 1900년대 초를 배경으로 한국에서 최초로 만화를 연재한 화가 이도영에 대해 다뤘다. “정치사회적 격동기에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문화를 창조하려 했던 이도영 화백에게 매료되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독립운동의 모습은 아니지만, 그때 시작한 작품 활동이 훗날 독립운동의 일환이 되더라.” 활자 매체가 쇠락하고 미디어 환경이 급변하는 현시점이 어쩌면 근대 초입의 사회상과 견줄 수 있다고 느껴졌다. 활자 매체 만평가로서 쌓아온 고민도 스토리에 투영됐다. “변화하는 미디어 분야에서 만화가로서 실험적인 시도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만들려면 최소 몇 년 걸리는데 만화는 금방금방 작업물이 나오지 않나. 후원을 받으면서 작업하는 것도 일종의 실험이다. 만화니까 가능한 거다.” 그날 일어난 사건을 만화만큼 빠르고 효과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창작물은 없다는 자부심으로, 28년 차 시사만화가는 오늘도 펜을 든다.

기자명 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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