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올해의 출판사’에 선정된 봄날의책 박지홍 대표가 12월12일 서울 종로구 창덕궁 인근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봄날의책 박지홍 대표는 “왜 지금인가?”라고 되물었다. 2022년 출판인들이 뽑은 ‘올해의 출판사’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전하며 소감을 묻자 돌아온 답이다. 30년 차 베테랑 출판인 박 대표의 수줍은 반문은 이어졌다. “올해 출간한 앤 카슨의 〈녹스〉는 분명 매력적인 책이다. 치하의 뜻이라면 출판사가 아니라 책을 주목하는 게 맞다. 10년간 책을 펴낸 봄날의책을 왜 지금 호명했을까? 반갑고 당혹스럽다.”

출판인들은 이렇게 답했다. 봄날의책은 “여전히 책의 가능성이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작품성과 책의 물성을 충실히 구현하며” “계산기 안 두드리고 내고 싶은, 내야 하는 책을 거침없이 밀어붙인 뚝심을 가진 출판사”라고. 올해 봄날의책은 〈녹스〉 같은 독보적인 책을 만들 수 있는 ‘유일무이한’ 출판사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했다. 황정은 작가는 자신이 진행하는 책 팟캐스트 ‘책읽아웃’에서 〈녹스〉를 만든 출판사의 ‘뚝심’을 ‘광기’로 해석했다. 박지홍 대표는 이 말을 다시 정정했다. 출판사의 광기가 아니라 이 책이 독자 손에 가닿는 모든 과정에 동참한 ‘출판인들의 광기’가 책을 완성시켰다고 말이다.

봄날의책은 20여 년간 출판계에 몸담았던 박지홍 대표가 40대 중반에 세운 1인 출판사다. 2013년 4월, 첫 책 〈발전은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질베르 리스트 지음, 신해경 옮김)을 펴냈다. 이후 사회과학서 몇 권을 더 출간했지만 오래 읽히는 책, 새로운 책을 만들고 싶은 마음에 문학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후 변방에 주목했다. 영미권뿐만 아니라 노르웨이, 포르투갈 등 한국에서 비교적 소외된 언어권의 산문과 시, 소설 등을 채집했다. 질병, 죽음, 인권을 다룬 책도 냈다.

박 대표는 책의 물성을 세심하게 구현하는 기술자이기도 하다. “한 권의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양장이나 사철 제본(종이를 실로 엮는 제본방식) 여부부터 서체와 종이의 두께·질감을 결정하고 후가공 방식을 판단하는 것 등 모든 과정에 공을 들인다. 어떻게 만들어야 좋은 책이 되는지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책의 그릇’을 세공하는 일이 책의 ‘책다움’을 완성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새로운 시도가 비용의 부담으로 이어질 때도 있다. 2019년 표제작이 없는 시집 〈세상의 아내〉(캐롤 앤 더피 지음, 김준환 옮김)를 출간할 당시 표지 앞뒤에 백박(얇은 박에 열과 압을 가하여 도장처럼 찍어내는 가공)으로 수록 시 전문을 새겨 넣었다. 이 작업에만 이틀이 소요되고 보통 책 표지 ‘박 비용’의 5배 이상 들었다. 비용의 부담은 작은 출판사에겐 판매의 부담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는 동료들의 안목과 철학, 독자들의 밝은 눈에 의지했다. “대량으로 책을 만드는 큰 출판사라면 제본 비용을 균일하게 낮출 수 있겠지만 봄날의책은 그럴 수 있는 대형 출판사가 아니다. 책의 완성도를 위한 디테일한 변주들로 시간과 비용이 더 들 수 있다. 하지만 독자들이 이것을 납득하고 이런 책이 나오도록 선택해준다면, 책을 통해 새로운 경험을 할 기회를 모두가 더 많이 가질 수 있다.” 최근 봄날의책에서 출간하는 시집은 아름답고 과감한 표지 디자인으로 주목받고 있다. 하나의 이미지가 시집 전체를 통으로 감싸는 방식이다. 시의 느낌을 담은 표지 그림을 고르고 다듬는 과정에 저자인 시인이 동참한다. 글의 온도와 색채를 정확하게 구현하기 위한 ‘번거로운’ 작업에 다들 기꺼이 손을 보탠다.

박지홍 대표는 봄날의책이 만들고 싶은 책을 말하며 ‘폼 나는 책’ ‘대체 불가능한 책’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리고 올해 마치 10주년을 자축하듯 그의 수식이 딱 들어맞는 책 〈녹스〉가 출간됐다. 〈녹스〉는 캐나다의 시인이자 고전학자인 앤 카슨이 22년 동안 헤어져 지냈던 오빠의 죽음을 애도하며 펴낸 책이다. 책의 왼쪽 면에는 고대 로마 시인 카툴루스의 비가를 번역하는 과정을 담은 글이, 오른쪽 면에는 찢고 오리고 덧댄 오빠의 편지 조각, 우표와 낙서들이 번갈아 나온다. 페이지 번호도, 목차도, 제목도 없다. 출판사에서는 192페이지라고 소개하지만 사실은 기다란 한 장의 종이에 가깝다. 종이 낱장을 한 장씩 풀칠해 이어 붙였기 때문이다. 한 권의 책 전체가 아코디언처럼 연결돼 펼쳐진다.

국내 번역 출간된 앤 카슨의 〈녹스〉를 펼친 모습. ⓒ봄날의책 제공

89세 제본가와 함께 만든 192쪽 ‘작품’

제작하기 쉽지 않았다. 책이 나오는 데 2년이 걸렸다. ‘뚝심’이 ‘광기’로 불리게 된 대목이다. 손으로 책을 접고 붙이는 제본 노하우를 갖춘 인쇄소가 필요했지만 국내 업체를 찾을 수 없었다. 한참 동안 인쇄물을 묵혀두고 사방을 뒤졌다. 옛날 방식으로 활판 공방을 하는 곳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찾아간 곳엔 제본사 두 명이 있었다. 한 사람은 89세였다. 두 제본사가 아침 7시부터 하루 8시간씩, 주 5일을 일해 한 달 반 만에 제본이 완성됐다.

그는 〈녹스〉의 성취가 일회성에 그치지 않기를 바랐다. “후배 편집자들이 ‘이런 책도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됐다’ ‘나도 새로운 책을 만들어보고 싶다’ 같은 말들을 해주더라. 큰 힘이 됐다. 경험치가 공유되고 공들인 시도가 이어지면 다양성이 늘어날 거라고 믿는다. 운명에 맡기듯 〈녹스〉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따라갔다. 책을 사랑하는 이들이 이 책을 완성시켰다. 더 좋은 책을 만날 기회를 기다리는 이들이다.” ‘굿즈’처럼 아기자기한 디자인의, 가벼운 읽을거리가 책의 자리를 채워나가는 시대에 봄날의책은 정성 들여 ‘책다운 책’을 만드는 일에 몰두한다.

봄날의책은 당분간 ‘단단해지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박 대표는 “〈녹스〉 이후 어떤 책을 제작할지 부담도 있다. 하지만 매번 새로운 행보를 할 수 없다는 걸 안다. 경력이 쌓인다고 더 대단한 책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될 거라고도 기대하지 않는다. 당분간은 봄날의책을 다져나가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공들여 책을 만들고 새로운 작가들을 소개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출판사’라고 독자들이 우리 출판사를 떠올릴 수 있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작업실을 둘러보다 ‘예스러운’ 파일 폴더들이 눈에 들어왔다. 책장 한 칸을 가득 채운 폴더들을 자세히 보니 여러 작가들의 이름과 연도가 적혀 있었다. 함께 작업한, 함께 작업하고 싶은 작가들의 글이나 인터뷰 등을 스크랩한 박지홍 대표의 ‘모음집’이었다. 그의 ‘다정한 광기’에 앞으로도 독자들은 ‘책 빚’을 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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