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인 번역가는 ‘저자가 한국 사람이라면 바로 이렇게 썼을 거야’ 싶은 번역을 지향한다. ⓒ시사IN 신선영

20년 넘게 번역을 했지만 언론 인터뷰는 처음이다. “보이지 않는 존재”로 숨어 일하는 게 번역가라는 직업의 좋은 점이었다. 정지인 번역가는 ‘올해의 번역가’란 타이틀을 무척 부담스러워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곰출판)를 다른 사람이 번역했다면, 분명 그가 올해의 번역가로 선정됐을 것이라고 했다. 원문 문장이 워낙 맛깔나서 번역문도 잘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베스트셀러라는 성취의 공을 원저자와 작품을 미리 알아본 출판사에 돌렸지만, 정지인이라는 이름은 최근 몇 년간 〈시사IN〉 ‘행복한 책꽂이’에 줄곧 보였다. 그가 번역한 〈우울할 땐 뇌과학〉(심심), 〈내 아들은 조현병입니다〉(심심) 등이 2018년과 2019년 ‘출판인이 추천한 올해의 번역서’에 올랐다. 그를 올해의 번역가로 꼽은 출판인들은 “정지인의 번역은 기술이 아니라 문학이다” “아주 매끄럽고 자연스러운 문장과 번역이 돋보였다”라고 평했다. 12월7일 경기도 파주에서 정지인 번역가를 만났다.

많은 출판인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올해의 번역서’로 꼽은 이유가 뭘까?

좋은 책이라고 해서 많이 읽히는 건 아닌데, 저자와 책, 독자 사이에 ‘딸깍’ 잘 맞아 들어간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다. 유튜버 김겨울씨, 이다혜 기자 등 책을 추천해준 전문가들의 힘이 컸고, 이후 추천받아 읽은 분들이 또다시 적극적 추천자가 되는 선순환 고리가 계속 이어지는 모습을 신기하게 지켜봤다. 과학을 소재로 한 논픽션이 이렇게 짧은 시간에 폭넓은 사랑을 받는 일이 흔치 않은데, 뛰어난 스토리텔링의 힘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과학 논픽션이라는 장르도, 저자(룰루 밀러)도 국내 독자에겐 낯설다.

처음 아마존의 짤막한 책 소개만으로도 관심이 동했다. 생물학과 관련된 내용이라는 점, 여성 저널리스트의 회고록이란 점도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미국 〈워싱턴포스트〉, NPR 등 여러 곳에서 ‘2020년 최고의 책’으로 선정된 것을 보고 뭔가 특별한 점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특별한 무엇이 있었나?

글쓰기 형식 측면에서 보면 ‘크리에이티브 논픽션’이 뭔지 제대로 보여준 모범적 예 같다. 논픽션이지만 단순히 사실을 보고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걸 소재로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해냈다. 알고 보니 룰루 밀러가 이 책을 쓰는 데 10년 정도 걸렸다고 하더라. 한 가지 주제를 파고들어 단기간에 써 내려간 게 아니라, 오랜 시간 우여곡절을 겪으며 생각지도 못했던 샛길을 만나 길을 잃고, 그 길의 새 지도를 만들 만큼 오래, 진지하게 헤매고, 다시 길을 만들며 나오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 10년 동안 작가 본인의 인생과 책 속 이야기가 함께 얽히면서 서로를 성장시켜온 과정의 결과물이 이 책이라고 느껴졌다.

그래서 “중간까지는 참고 읽어야 숨은 반전의 묘미를 알 수 있다”라는 기묘한 후기가 쏟아진 것 같다.

사실 앞부분부터 너무 재밌어서 그런 예상은 하지 못했다. 이렇게 폭넓은 독자층에게 읽힐 것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많은 분이 이 책이 데뷔작이라는 게 놀랍다고 하던데, 오랜 기간 발효되고 매만져진 글의 높은 완성도 때문이 아닌가 싶다. 책을 읽는 게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다는 후기도 봤다. 오랜 기간 저자가 밟아간 구불구불한 여정이 짧은 책 한 권에 담겨서 독자가 보기에 ‘빨리 감기’ 같은 효과가 만들어진 게 아닌가 생각했다(책은 1900년대 초 생물분류학자로 활약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생애와, 그를 치열하게 좇아온 한 과학 저널리스트의 이야기가 동시에 펼쳐진다).

하나 안타까웠던 점은 많은 독자분이 앞부분에서 그었던 밑줄을 나중에 도로 지우고 싶었다고 한 후기다. 세상 누구도 평면적으로 좋기만 하거나 나쁘기만 한 사람은 없고, 늘 한결같은 사람도 없을 거다. 책에 등장하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도 말년에 평화운동을 했고,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의 룰루 밀러를 봐도 수차례 변화를 겪었다. 나중에 나쁜 평가를 받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평생 한 모든 말과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니고 좋은 평가를 받는 사람의 말이라고 해서 다 옳은 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시사IN〉 ‘행복한 책꽂이’에서도 올해의 번역가를 인터뷰하는 건 오랜만이다.

감사하다. 가끔 받는 이런 칭찬이 혼자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큰 응원이 된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힘들이지 않고 아주 즐겁게 번역한 책이다. 마음에 드는 문장이 술술 풀려나올 때면 혼자서 막 웃고 ‘오 예!’ 탄성도 질렀다(웃음). 이 책을 맡게 된 게 큰 행운이었다.

역자 소개에 있는, 어려서부터 언어에 대한 관심이 많아 번역을 하겠다는 장래 희망을 품었다는 말이 흥미로웠다.

평생 한 일이 번역뿐이라 역자 약력에 책 제목 말고는 쓸 말이 통 없다. 그래서 언젠가 그런 말을 써 넣어봤는데 볼 때마다 몹시 민망하다. 대단한 계기는 아니고, 그저 영어도 책 읽는 것도 재밌어서였다. 열네 살 때 즐겨 읽던 책 표지에 적힌 옮긴이 이름을 보면서 ‘번역가’라는 직업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됐다. 그즈음 드라마에서도 번역가라는 직업을 보게 되면서 ‘바로 저것이다’ 하고 생각했다(웃음). 그렇게 마음먹고 한 번도 다른 직업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적성 파악 하나는 잘한 것 같다.

번역가로서 지향하는 ‘좋은 번역’이 있나.

정확하면서도 잘 읽히는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거기다 우리말의 읽는 맛까지 살릴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고. ‘저자가 한국 사람이라면 바로 이렇게 썼을 거야’ 싶은 번역이 내가 지향하는 바인데, 쉽지는 않지만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한다. 머리를 한참 또로록 굴려야 하고, 다듬고 또 다듬어야 한다. 이렇게 다듬어가는 과정에는 교정과 교열부터 어색한 부분을 지적해주는 편집자분들의 도움이 정말 크다. 지금 내가 하는 번역은 그동안 편집자들과 주고받은 교정지를 통한 훈련의 결과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그간 정신질환이나 뇌과학 관련 서적을 많이 번역했는데.

시초를 찾자면 내가 공황장애를 앓았던 경험이다. 그땐 그게 공황장애인지도 몰랐고 이유도 알 수 없이 보이지 않는 힘에 고문당하는 느낌이었다. 뭐든 해결책은 책에서 찾는 사람이다 보니 답이 될 만한 책들을 찾아보다가 뇌과학과 정신의학 쪽으로 관심이 옮겨왔다. 내가 겪는 게 공황장애란 것도 책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예전에 함께 일했던 편집자가 ‘심심’이라는 심리서 브랜드를 론칭한다며 함께 일하자고 제안해왔다. 마침 내 관심도 그쪽에 쏠려 있던 터라 출판사(심심)의 성격과 잘 맞아떨어졌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 쏟아진 뜨거운 반응처럼, 과학 서적이 이 시대에 주는 어떤 위로가 있는 것 같다.

세상 만물에 대한 객관적이고 단단한 앎에는, 삶의 현실에서 느끼는 불안한 감정을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게 해주는 힘이 있는 것 같다. 내 관심도 뇌과학, 정신의학에서 후성유전학, 유전학, 그러다 생명과학 전반으로 확장되고 있다. 특히 정신의학 분야는 넓은 독자층에 고루 읽혔으면 좋겠다. 우리의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뿐 아니라, 모른다는 사실도 모른 채 빠져 있는 오해와 편견을 조금씩이라도 걷어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기자명 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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