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낮 시장은 을씨년스러웠다.

두부 가게, 정육점, 건어물상, 포목상, 철물점…. 거개가 문을 닫았다. 점포 앞 노점도 마찬가지였다. 시장이 문 닫는 줄 모르고 장을 보러 나온 손님들만 푸른 비닐로 덮인 판매대 사이를 서성이고 있었다. 간혹 점포 곁을 지키고 있는 주인들이 눈에 띄기는 했다. 채소를 다듬는 60대 노점상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다들 어디 갔나요?” “홈플러스에 데모하러 갔어.” “아주머닌 왜 안 가셨나요?” “기력이 딸려 못 갔어.” “그럼 장사하시지 왜 그러고 계세요?” “다들 함께 살아보자고 나갔는데 어떻게 나만 장사를 해. 사람이 의리가 있어야지.”

한 달 전 이곳 육거리시장(충북 청주시 석교동)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시장은 활기에 넘쳤다. 청주권 최대 규모 재래시장답게 현지 사람은 물론 외지에서 소문을 듣고 온 사람들로 온 시장이 북적였다. 그러나 상인들 사이에는 알게 모르게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6월18일 충북 지역 상인단체와 시민단체가 중심이 돼 대형마트 홈플러스를 상대로 불매운동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요구는 두 가지. 홈플러스 청주점이 5월1일부터 시작한 24시간 영업을 철회하라는 것과 기업형 슈퍼마켓(SSM)의 추가 입점을 중단하라는 것이었다. 불매운동을 선포하던 날 박영배 충북상인연합회장은 홈플러스를 운영중인 삼성테스코가 자신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시장 문을 닫는 ‘철시 투쟁’까지도 불사할 것이라고 말했다(〈시사IN〉 제93호 관련 기사 참조).

ⓒ전문수7월16일 청주 12개 재래시장 상인들이 일제히 가게 문을 닫아걸었다. 위는 점포 대부분이 철시해 한산한 청주시 석교동 육거리시장.
그로부터 한 달. 그 누구도 지키고 싶지 않았던 약속은 현실이 됐다. 7월15일, 청주 시내 12개 재래시장 4500여 점포는 결국 반나절 철시를 감행했다. 철시에 동참한 상인 700여 명은 홈플러스 청주점(청주시 가경동) 앞으로 몰려가 세 시간 남짓 시위를 벌였다. 이곳에서 만난 상인들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난생처음 머리띠 두르고 이런 데를 나와봤다는 이금엽씨(77·사직시장 상인)는 “올 들어 우리 시장에서만 점포 3곳이 문을 닫았다. 우리도 곧 그 꼴 나겠다 싶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일부 지역은 물리적 충돌 발생하기도

이들은 홈플러스가 지난 한 달간 무대응으로 일관한 것에 더 분노했다. 7월9일 상인·시민단체 대표가 서울 역삼동 홈플러스 본사를 찾아갔지만 사측과의 면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이들을 맞은 것은 전경버스 2대와 검은 양복의 안전요원들이었다. 장대비 오던 날 당한 이 ‘문전박대’ 사건이 민심에 끼친 여파는 큰 듯했다. 집회에 참여한 김양호씨(65·사직시장 상인)는 “그간 청주가 너무 물렁했다. 앞으로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겠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철시 투쟁 이틀 뒤인 17일에는 박영배 회장을 비롯한 시장 상인 10여 명이 사업자등록증을 세무서에 반납했다. 박 회장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봤다. 구청·시청에 민원도 제기해보고, 정치권에 호소도 해보고, 홈플러스 본사도 찾아갔다. 그런데 상대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결국 우리보고 장사를 접으란 얘기 아니냐”라며 극한투쟁을 선택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벼랑끝 싸움은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요즘 경기도 안양 중앙시장 상인들은 오후 2시가 되면 잠시 가게문을 닫은 채 잰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한다. 시장으로부터 150m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입점 예정지(안양동점)가 그곳이다. 7월 초 시장 인근에 기업형 슈퍼마켓이 들어선다는 정보를 입수하면서부터 시장 상인들은 비가 오건 뙤약볕이 내리쬐건 매일 오후 2시면 한데 모여 실력 행사를 벌인다. ‘SSM 입점반대추진위원회’ 이두천 공동대표는 시장 인근에 이미 대형마트 3곳이 들어선 상황이라며, “대형마트의 공습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상인들이 이제 좀 정신차리고 뭔가 해보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기업형 슈퍼마켓이 들어와 골목 상권까지 싹쓸이하면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란 말이냐”라고 하소연했다. 이들은 홈플러스 익스프레스가 입점을 강행할 경우 청주 상인들처럼 상가를 철시하고 사업자등록증을 반납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전문수가게 문을 닫고 홈플러스 청주점 앞에 몰려든 상인들의 표정이 어둡다.
그런가 하면 기업형 슈퍼마켓 입점을 반대하며 무기한 골목 농성에 돌입한 상인들도 있다. 7월16일 현재, 인천 연수구 옥련동 상인들은 7월20일 개점 예정인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매장 앞에서 나흘째 입점 저지 농성을 벌이고 있다. 개점 준비에 한창이던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직원들은 난감한 지경에 처했다. 물품 반입을 못하게끔 동네 상인들이 매장 입구를 막아서면서 이들과 직원 사이에 간헐적인 몸 싸움도 벌어졌다. 홈플러스 한 직원은 “입점일을 지키기 어려울 것 같다”라고 푸념했다.

상인들은 그들대로 격앙돼 있었다. 입점 예정지에서 100여m 떨어진 아파트 상가에서 소규모 슈퍼마켓을 운영한다는 임병화씨(52)는 “구속도 각오했다”라며 기업형 슈퍼마켓 입점을 몸으로 막겠다고 말했다. 임씨는 새로 입점할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때문에 반경 1km 이내에 있는 슈퍼마켓 30여 곳이 모두 고사할 지경에 처했다고 주장했다.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입점 소식을 들은 뒤 남편이 다른 일을 구하러 다니는 중이라는 또 다른 슈퍼마켓 주인 최미선씨(48)는 “저런 게 생기면 우리만 죽는 게 아니다. 우리 같은 슈퍼에 물건 대주던 사람들까지 다 죽는다”라고 주장했다. “가게 얻을 때 1억을 대출받았다. 빚을 다 갚지도 못했는데 여기서 우리가 무너지면 내 딸한테 빚이 돌아가겠구나 싶어 눈물이 난다.” 최씨는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친서민 행보’를 내세우며 서울 이문동 재래시장을 방문한 것이 지난 6월25일이다. 그 뒤 윤진식 청와대 경제수석이 관련 부처·업계·소상공인들을 청와대로 불러들여 대형마트와 기업형 슈퍼마켓 규제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한나라당 또한 기업형 슈퍼마켓 입점을 신고제에서 등록제로 전환하는 등 대응책을 조속히 마련하겠다고 했다.

MB ‘친서민 행보’에도  변한 것은 없어

그러나 이 모든 부산한 움직임에도 변한 것은 없다. 홈플러스 청주점 관계자는 “24시간 영업은 소비자와의 약속이다”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이승한 삼성테스코 회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기업형 슈퍼마켓을 규제하는 법안이 통과될 경우 “헌법 소원을 포함한 법적 대응에 나서겠다”라고 밝혔다. 설상가상 대통령까지 “(대형마트나 기업형 슈퍼마켓을 규제하는 것은) 법률적으로 안 된다”라며 상인들 가슴에 못을 박았다.

상인들의 절망이 더 깊어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인천 상인 임병화씨는 “대통령이 떡볶이가 먹고 싶어 시장에 갔다고밖에 볼 수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다 죽어가는 상인들 앞에서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나”라고 개탄했다. 신근식 전국상인연합회 대형마트규제위원회 위원장은 정치권을 맹비난했다. 대형마트·기업형 슈퍼마켓 규제 내용을 담은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을 조속히 개정해야 하는데, 여야가 서민의 삶과 직결된 이런 법안은 내팽개친 채 미디어법만 갖고 쌈박질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경배 한국슈퍼마켓협동조합연합회장은 대기업들의 안하무인격 태도를 비판했다. “사회적으로 이 문제가 이렇게까지 시끄러우면 대기업이 알아서 자제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오히려 기업들이 기세등등하게 신규 진출을 밀어붙이니 상인들도 더는 못 참겠다고 들고일어난 것이다.” 이들의 책임 방기 속에 상인들은 오늘도 거리로 내몰리는 중이다.

취재 도움:반기웅 인턴 기자

기자명 청주·인천 김은남 기자 다른기사 보기 ke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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