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0일 윤석열 대통령이 집중호우로 수해를 입은 서울 동작구 주민들을 만났다. ⓒ시사IN 이명익

올여름 수도권을 휩쓸고 간 수해는 한국 사회에 당도한 여러 문제를 가시화했다. 기후위기 시대에 이미 살고 있다는 것, 그러나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조차 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 그로 인한 피해는 사회경제적 취약계층에게 쏠린다는 것. 그리고 새 대통령이, 진보 보수를 떠나 역대 대통령들과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서울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져 시내 곳곳이 물에 잠겼던 8월8일 밤, 윤석열 대통령은 상황실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당초 윤 대통령이 머물고 있는 서울 서초동 아크로비스타 주변 도로가 막혀 발이 묶였다고 알려졌다가, ‘대통령이 상황실로 가면 의전에 신경을 쓰느라 대처 능력이 떨어질 수 있어 전화로 상황을 지휘했다’고 말이 바뀌었다.

이튿날, 일가족 3명이 목숨을 잃은 서울 신림동 반지하 주택을 찾은 윤 대통령은 “어떻게 여기 계신 분들 미리 대피가 안 됐나 모르겠네” “아, 주무시다 그랬구나” 등 실제 상황과 동떨어진 엉뚱한 소리를 했다. 당시 이 가족은 갑자기 불어난 물에 문이 열리지 않아 119에 수차례 연락을 했지만 신고가 몰려 구조되지 못한 채 참변을 당했다. 대통령실은 이 현장을 배경으로 찍은 윤 대통령의 사진을 국정홍보용 카드뉴스로 만들었다가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급히 게시물을 내렸다. 컨트롤타워의 잇따른 헛발질에 ‘#무정부상태’라는 해시태그가 확산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7월 국민의힘에 입당하며 정치인의 길에 본격 들어섰다. 임기 초반에 벌어지는 ‘아마추어리즘’은 예정되었던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 폭우 대처에서 목격한 것은 단순히 경험 부족이나 서툰 역량만이 아니다.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이번 재난을 관통하고 있다. 일컫자면 ‘대통령 윤석열의 세계관’이다.

8월8일 대통령이 컨트롤타워로서 제 역할을 했는지 논란이 커지고 서초동 사저로 향한 처사가 적절했는지로 쟁점이 모이자 강승규 시민사회수석은 KBS 라디오에 출연해 이렇게 항변했다. “비가 온다고 대통령이 퇴근을 안 하나.” 대통령실은 침수 대처에 문제가 없었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그 시각) 한덕수 총리가 상황실에서 진두지휘하고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물론 대규모 재난 시 가동되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의 본부장은 국무총리나 행정안전부 장관이 맡는다. 재난 관리 총괄 부처는 행안부, 홍수 대응 주무 부처는 환경부다. 더해서 유관 부처별로 맡아야 할 기능이 세분화되어 있다. 하수관로를 정비하고 침수 피해를 복구하는 등의 실무는 서울시와 구청 같은 지자체가 도맡는다. 그러니 정해져 있는 업무 분장을 따르면 되지 대통령이 퇴근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퇴근하면서 보니까 벌써 아래쪽에 있는 다른 아파트들은 침수가 시작됐더라”라는, 마치 구경꾼이 남 말 하는 듯한 윤 대통령의 태도는 이런 사고에서 기인한다. 정부의 역할을 대단히 ‘기능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박원호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윤석열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이라기보다는 회사원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는다”라고 말했다. “(그동안 커리어를 따져보면) 검찰총장까지 올라가면서 회사 생활을 한 것이다. 그 회사가 공무원, 그중에서도 검찰이었던 거다. 대통령 역시 직장 생활의 연장으로 생각하는 건가 싶은 모습이 계속 나타난다.” 여기서 말하는 직장 생활이란 ‘매뉴얼’에 따라 기능하는 삶이다. 회사는 직무별로 부서가 분화돼 있고, 자신의 직급에 따라 주어진 업무를 다 하면 회사원의 일과는 마무리된다. 퇴근길에 ‘아파트들이 물에 잠겼네’ 하면서 그대로 집으로 향한 건 수해 대처가 ‘자신의 업무’ 안에 있다고 자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1년 5월1일 백악관 상황실에서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왼쪽 두 번째)이 오사마 빈라덴 제거 작전을 실시간 영상으로 지켜보고 있다. ⓒAP Photo

‘매뉴얼’만 따르면 끝이라고 여기나

선출된 권력인 대통령이 회사원의 인식체계 내에서 사고하고 행동한다면 당연히 불협화음이 생긴다. 박원호 교수는 ‘책임성의 문제’에 대해 말했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방한해서 윤 대통령에게 ‘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여기서 멈춘다)’라고 쓰인 탁상용 팻말을 선물하지 않았나. 대통령이 모든 책임을 진다는 것은 결재 서류에 최종적으로 서명하면 끝난다는 뜻이 아니다. 장관을 비롯한 공무원들에게 ‘알아서 하시오’ 하며 던지고 위임하는 게 아니라 거기서 나오는 모든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진다는 의미이다. 윤 대통령이 그 팻말을 받고 싶어 했다지만 의미까지 제대로 이해하는지 모르겠다.”

박 교수는 2011년 빈라덴 사살 작전 당시 백악관 상황실에서 찍힌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사진을 예로 들었다. “가운데 상석에 작전을 담당한 장군이 자리하고 오바마 대통령은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는 점이 주목을 받았지만 이 사진에서 가장한 중요한 포인트는 구석이든 어디든 오바마가 그 방에 있었다는 것이다.” 전문성을 바탕으로 선택지를 제시하고 회의를 주재하는 건 전장을 잘 아는 장군일지라도,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최후의 결정, ‘라스트 고(Last Go)’는 대통령이 내려야 한다.

지난 정부 청와대 출신 인사들의 지적도 이와 맞닿아 있다. 탁현민 전 청와대 의전비서관은 8월10일 YTN 라디오에서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자택에서 전화로 모든 걸 해결했다고 하는데 참 난망한 얘기다. 위기 상황이 벌어졌을 때 모든 부처를 모아서 빨리 대책회의를 해야 하는 이유는, 주도권이 어디에 있고, 어떤 순서로 처리해야 하는지 대통령 주재하에 빨리 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매뉴얼은 있지만 그대로 되는 게 아니다.” 소방, 경찰, 서울시, 행안부, 환경부 등 각 부처의 입장이 모두 다르니 이를 한자리에 모아서 정리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청와대 국정기획상황실장 출신인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8월11일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재난관리의 원칙 세 가지로 ‘신속, 정확, 상상력’을 꼽았다. 수해가 반복될지라도 똑같은 유형의 재난은 없기 때문에 위기 대응에는 유연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재난 대응 업무의 특성상 적재적시에 요구되는 대처는 기존 매뉴얼에 적혀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대통령은 치수 전문가가 아니고 일선 공무원만큼 수해 복구 경험이 두텁지도 않다. 그러나 공무원들이 긴급 상황에 맞게 정해진 규정 밖의 일을 할 수 있으려면 그 모든 결과를 책임지겠다는 대통령의 ‘라스트 고’가 뒤를 받쳐줘야 한다.

윤 대통령의 ‘기능적인 정부론’은 평소 언행과 이어져 있다. 윤 대통령이 가장 즐겨 쓰는 말은 “법과 원칙에 따라서”이다. ‘법과 원칙에 따른’ 세계에서 정부란 성문화된 규정과 매뉴얼에 따라 작동하면 되는 기구이다. 행정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스템화된 기계에 가깝다. ‘법과 원칙’이 따로 규율하고 있지 않은 정무적 판단의 필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정무적 판단이 때로 ‘위법행위’가 되어 수사 대상에 오를 위험까지 내포한다고 볼 수 있다. 박원호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세계관에 의하면, 정치라는 영역은 들어올 틈이 전혀 없다.”

7월27일 백경란 질병관리청장(가운데)이 충북 오송 질병관리청 브리핑실에서 코로나19 재유행에 따른 부처별 대응 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과학 방역론’도 기계적 세계관의 일환

또 하나의 재난인 코로나19 유행은 ‘정치가 실종된’ 대통령의 통치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윤석열 정권은 집권 전부터 문재인 정부의 코로나19 대응을 ‘정치 방역’으로 규정하고, 새 정부의 방역은 그와 대비되는 ‘과학 방역’이라고 일컬었다. 청와대 등 정치권의 입김이 작용했던 전 정부와 달리, 객관적 데이터를 근거로 전문가들이 주도하는 방역을 하겠다는 뜻이다. 이 또한 방역은 감염병 전문가 혹은 질병관리청이나 보건복지부 제2차관실처럼 그 업무를 할당받은 전문성 있는 기구가 하면 된다는 ‘기능적인 정부론’과 맞닿아 있다. 감염병에 대처하는 최일선 수장인 보건복지부 장관은 정작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내내 공석이다.

예방의학자로서 코로나19 대응을 종합적으로 관찰하고 연구해온 김명희 박사는 ‘과학 방역’의 허구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과학기술과 전문가를 통해 위험을 통제할 수 있다는 접근법은 낡은 패러다임이다. 코로나19 유행 동안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백신이 개발되었고, 최신의 전문 지식이 총동원되었지만 바이러스는 매번 한발 앞서갔다. 과학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과학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코로나19 대응은 전문가가 전권을 쥔다고 해서 저절로 풀리지 않는다. 감염병 위기에 맞서기 위해 공동체의 자원을 공정하게 분배하고, 시민들을 설득하고, 신뢰를 구축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정치가 해야 할 일 아닌가.”

수도권 침수와 코로나19. 두 개의 재난이 드러내는 윤석열 통치의 실체는 경험 부족이나 어설픔에 그치지 않는다. 일각의 옹호처럼 전문가 의견에 힘을 싣는 합리주의도 아니다. 정치철학의 부재다. 박원호 교수는 윤석열 대통령이 검찰 시절 ‘직권남용’이라는 죄목의 칼날을 여러 번 휘두르는 검사였다는 사실을 특히 위태롭게 보고 있다. “직권남용의 관점에서 보면 정무적 판단이라는 건 있을 수 없다. 법률이라는 완성된 체계가 있고 매뉴얼에 저촉되지 않는 한도에서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굉장히 기계적인 세계관이다.” 이어지는 귀결점은, 매뉴얼을 굳게 따르며 자기 역할을 될 수 있는 한 최소화시키는 대통령이다. 올여름 우리가 목격한 것은 앞으로 5년간 이어질 대통령발 ‘정치 실종 사건’의 전초전일지도 모른다.

기자명 김연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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