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칭 ‘뜨고 싶은’ 사람에게는 모두 롤 모델(role model)이 있다. 루이 나폴레옹에게 삼촌 나폴레옹이 있었던 것처럼, MB에게는 박정희가 있고, 김 회장 댁 둘째 아들에게는 괴벨스가 있다. 마르크스가 〈루이 보나파르트 브뤼메르 18일〉에서 헤겔을 빌려 꼬집었듯이, 역사는 자주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소극으로.

삼촌의 후광에 힘입어 당당히 국민 ‘투표’로 대통령에 당선했던 루이 나폴레옹은 근대식 개발주의자의 아버지였다. 도시 전체를 뒤집어서 대로를 뚫고, 만국박람회를 개최해서 관광 수입을 올리고, 오지랖도 넓게 남의 나라 통일전쟁까지 간섭하고 다녔다. 부르주아를 위한 소비산업이 화려한 도심의 스크린을 만들어가는 동안 가난한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고 변두리로 밀려났다. 서민은 타락했고 부패한 정치, 가진 자만을 위한 화려한 경제정책에 불만을 터뜨렸지만, 별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또다시 ‘투표’로 루이 나폴레옹을 황제에 등극시켰다. 이 우스꽝스러운 제2제정기를 끝장낸 것은 파리코뮌이었다.

두 번째로 반복되는 역사가 얼마나 한심한 것인지 우리는 지금 싫증나도록 확인 중이다. 정치를 질 낮은 시트콤으로 만들어 사람들이 냉소하기에도 지쳐서 외면하도록 만드는 게 저들의 작전인지 모르겠지만, 급기야 죽었던 ‘대한 늬우스’까지 땅속에서 벌떡 일어났다. 국민과의 ‘소통’을 위해,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 개그 버전으로 ‘4대강 사업’을 선전하겠단다. 인정한다. 우리가 뉴스나 교양 프로그램보다, 심지어는 드라마보다 오락 개그 프로그램을 더 즐겨 본다는 것. 하지만 우리에게도 나름의 ‘안목’이라는 게 있어서, ‘재미없으면’ 가차 없이 채널을 돌려버릴 만큼은 자존심이 있다. 그걸 아는 제작자와 연기자들은 그야말로 목숨 걸고 작품 하나 만들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런데 채널권도 없는 극장, 뚜렷한 명분도 없이 슬그머니 1000원이나 인상된 비싼 관람료를 내고 들어간 극장에서 철 지난 ‘대한 늬우스’ 따위를 봐야 한다고? 혹시 인상된 1000원이 ‘대한 늬우스’ 관람료인가? 

행동은 논리적 이해로부터 나오는 것보다 정서적 감응에 의해 전염되고 촉발되는 것이 더 크다는 점을 우리는 안다. 논리로부터 시작된 행동은 이성적 판단에 의해 멈출 수 있지만, 정서적 감응으로 시작된 행동은 때로는 브레이크가 고장난 폭주 기관차와 같다. 파시즘의 역사가 우리에게 준 교훈이다. 적어도 괴벨스는 예술 혹은 문화를 어떻게 활용해야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끔찍했지만.

파시즘적 통치자는 ‘소통’보다 ‘선전·선동’ 기술 선호

파시즘적 통치를 원하는 권력자들은 언제나 선전과 선동의 기술에 의지해 생명을 보존한다. 이 시대 보통의 나라라면, 정당한 방식으로 대표자가 된 사람, 소수의 이익이 아니라 좀 더 많은 사람의 삶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기술은 불필요하다. ‘상식’에 입각한 말과 행동에는 ‘소통’의 어려움이 있을 수 없다.

상식에 기대서 생각해본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자국민이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자유롭게 문화적인 삶을 향유할 수 있도록 일하는 곳 아니었던가. 그게 그렇게 어려워서 정권 출범 1년6개월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정책이나 사업 하나 만들지 못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미래의 예술가들을 학교 바깥 거리로 내몰거나, 현장 작가의 일자리를 빼앗고 생계를 위협하거나, 도무지 비상식적인 광고나 찍으면서 국민 세금을 전용하느라 너무 바쁜 건가. 이제는 나쁜 신문에 광고를 주는 상품에 대해 불매운동을 하듯이 극장도 가려서 가야 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한심한 역사의 소극을 직접 경험하느라 우리도 무척 바쁘다.

기자명 권용선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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