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10월28일 미국 하원 청문회 ‘반미 활동 조사 위원회’에 참석한 돌턴 트럼보(왼쪽)와 부인 클레오 베스 핀처. ⓒAP Photo

카를 마르크스는 언젠가 미국 언론의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마르크스는 19세기 사람이지만 21세기에도 그 천재성과 영향력을 인정받고 있으며, 인류 역사를 통틀어도 몇 손가락 안에는 능히 들어갈 학자이자 사상가이지. 이때 그의 대답은 매우 명료했다. “스파르타쿠스.” 인류 역사 최고의 ‘머리’로부터 최대의 경의를 받은 스파르타쿠스는 알다시피 로마 공화정 시대에 일어난 노예 반란의 지도자야.

트라키아 출신 검투사 스파르타쿠스는 검투사들에 대한 잔혹한 처우에 반발해 기원전 73년 여름, 동료 74명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다. 처음에는 무리를 이끌고 베수비오 화산 근처의 산록에 숨어 산적질이나 하는 수준이었지만 점차 로마의 진압군을 연파하면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지.

스파르타쿠스는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반도를 벗어나 자유를 찾고자 했다. 하지만 휘하의 노예 반란군들은 풍요로운 로마를 약탈하고 로마인들에게 복수하길 갈망했어. 스파르타쿠스는 거의 12만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되는 반란군들을 이끌고 로마를 위협한다. 하지만 로마는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지. 결국 스파르타쿠스는 로마 공격을 포기하고 다시 남쪽으로 향한다. 배를 타고 시칠리아섬으로 빠져나갈 의도였어.

이때 1차 삼두정치의 일원이자 로마 최대의 대부호 크라수스가 나선다. 그는 재산을 털어 로마 군단을 무장시키고 스파르타쿠스 토벌 작전에 들어간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 격노한 크라수스는 전선에서 가장 먼저 이탈한 부대에게 ‘10분의 1형’, 즉 제비를 뽑아 부대 10분의 1 인원을 희생양으로 정하고 나머지가 그들을 때려죽이게 하는 극단적인 형벌을 내렸어. 그만큼 크라수스가, 그리고 로마가 절박했다는 뜻이겠지.

스파르타쿠스는 탁월한 지휘 능력을 보여줬지만 부하들은 훈련받지 않은 노예와 떠돌이들이었다. 반면 몇 번 패했다고는 해도 로마 군단은 지중해 세계를 제패한 관록의 군대였지. 노예군은 점차 궁지에 몰렸어. 마침내 최후의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스파르타쿠스는 자신의 말을 끌고 와서 말의 목을 쳐버리며 부르짖는다. “내가 이기면 이놈보다 나은 말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진다면 그때는 이 말은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후 노예군은 치열하게 싸웠으나 패하고 말지.

로마 역사가 플로루스는 “스파르타쿠스는 임페라토르(황제)처럼 싸우다가 죽었다”라고 표현했고, 플루타르코스는 그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어. “최후의 순간, 그는 혼자였다. 수십 명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는 용감히 저항했고, 그리고 전사했다(〈어쨌거나… 그때는〉 엄창현 지음).” 동시대 사람들 보기에도 스파르타쿠스의 저항은 영웅적으로 비쳤던 모양이야. 스파르타쿠스도 ‘고결한’ 사람은 아니었어. 로마군에 죽어간 동지들의 복수를 하겠다고 로마군 포로들을 학살하기도 했고, “(자기 진영 앞에서) 죄수를 십자가형에 처함으로써 자신의 결단을 더 강하게 다지곤 했던”(위의 책) 사람이기도 했지. 마르크스의 존경을 받을 정도로 ‘노예해방’ 같은 고매한 사상을 설파한 이도 아니었어. 단 검투사들, 노예들에게 가해지는 폭압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자신의 부하들과 전리품을 똑같이 나눠 가졌으며, 인간적인 방법으로 과도한 약탈을 막으려고 애썼던(〈스파르타쿠스-신화가 된 노예〉 M. J. 트로우 지음)” 사람이었을 뿐이야. 최후까지 비굴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싸움을 멈추지 않았던 용사였고 말이다.

혼전 중에 전사한 것으로 보이는 스파르타쿠스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어. 뿔뿔이 흩어진 노예군들은 각개격파됐고 무려 6000여 명의 포로가 카푸아에서 로마에 이르는 가도 양편에 세워진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게 돼. 스파르타쿠스가 숨진 약 2000년 뒤, 미국 할리우드 영화 〈스파르타쿠스〉(1960)에서 스파르타쿠스의 최후는 감동적인 장면으로 재창조된다.

로마 장군이 노예군 포로들에게 외친다. “누가 스파르타쿠스냐? 그만 죽이고 다 살려주겠다”라고 호언하지. 누구 하나를 턱으로 가리키기만 하면 살 수 있는 유혹 앞에서, 또 말하지 않으면 다 죽여버리겠다는 협박 앞에서 누군가 일어나 외친다. “내가 스파르타쿠스다.” 하지만 그는 스파르타쿠스가 아니었어. 또 다른 이가 일어서 자신이 스파르타쿠스라 선언하고, 급기야 전 노예군 포로들이 “내가 스파르타쿠스다” 외치며 일어서게 돼. 그리고 그들 모두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지.

〈스파르타쿠스〉의 각본을 담당한 이는 돌턴 트럼보라는 시나리오 작가였다. 그는 매카시즘 선풍이 할리우드를 몰아치던 당시 공산주의자 색출을 목적으로 한 청문회인 ‘반미(Un-American) 활동 조사위원회’에서 증언하기를 거부한 10명, 즉 ‘할리우드 텐’의 일원이었어. 이후 그는 할리우드에서 모든 활동을 차단당했지. 아무도 그와 작업하려 하지 않았고 그의 시나리오를 사려고도 하지 않았어. 욕조에 앉아서 글을 쓰는 기이한 습관이 있었던 트럼보는 그래도 욕조에 들어앉아 글을 쓰고 한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매우 산뜻한 로맨틱 코미디였어. 그는 친구에게 연락한다. “이 시나리오를 자네 이름으로 해서 팔아주게. 나는 안 되는 거 알잖나.” 이 영화가 오드리 헵번을 일약 여신급으로 끌어올린 〈로마의 휴일〉(1953)이었지. 이런 식으로 쓴 대본으로 덜컥 아카데미 각본상(영화 〈브레이브 원〉)까지 받았지만 끝내 트럼보는 시상식에 참석할 수 없었어.

“공산당원을 알고 있거나 알았는가?”

이런 트럼보 앞에 영화 〈스파르타쿠스〉의 주연 겸 제작자였던 커크 더글러스가 나타난다. 의뢰한 대본 내용 역시 참으로 위험스러운(?) 것이었지. 로마 검투사들이 로마의 잔학한 착취에 반발하여 봉기를 일으키고 영웅적으로 싸우다가 전멸하는 이야기 아니겠니. 마르크스가 가장 존경했다는 노예 반란의 주동자 스파르타쿠스의 이야기를 ‘빨갱이’ 혐의로 할리우드의 ‘투명 인간’이 된 트럼보가 쓰게 된 거야.

커크 더글러스가 제작자로서 감독을 너무 무시하는 바람에 또 하나의 천재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분통을 터뜨리기는 했지만 그는 트럼보에게만은 최선을 다했다. 돌턴 트럼보가 이 영화의 각본자임이 드러나자 어느 나라에나 있는 완고한 ‘꼴통’들이 들고일어났지. “트럼보랑 노는 커크 더글러스 너도 빨갱이!” 유의 협박도 난무했다. 그러나 커크 더글러스는 이 협박을 쿨하게 물리쳐버리고 아예 크레디트에 돌턴 트럼보의 이름을 올려버렸다. “각본:돌턴 트럼보.” ‘빨갱이 혐오증’에 걸린 이들의 턱에 시원한 어퍼컷 한 방을 날린 셈이야. 이런 배경 속에서 트럼보는 〈스파르타쿠스〉의 명장면을 창조하게 된 거란다. 반미 활동 조사위원회에 불려나가 “당신은 공산당원을 현재 알고 있거나 과거에 알고 지냈는가?” 따위 개인의 양심을 무너뜨리는 질문에 저항했던 트럼보는, “너 공산주의자이지? 아니라면 누가 공산주의인지 밝혀”라고 강요했던 매카시스트들에게 자유로운 영혼을 걸고 맞섰던 작가 트럼보는 노예 수천 명의 외침, “나는 스파르타쿠스다!(I am Spartacus!)”를 대본에 쓰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참는 데까지는 참지만 참을 수 없는 것을 결국은 참아내지 않는 인간의 존엄함, 적잖은 것을 포기하고 살지만 끝내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을 위해서는 자신의 삶과 죽음을 걸고 싸울 수 있는 인간의 용기를 스파르타쿠스를 통해 그리고 싶지 않았을까? 파멸의 위기 앞에서도 “이기면 더 좋은 말을 얻을 수 있다”라는 희망을 잃지 않았던 스파르타쿠스를 통해 남의 이름을 빌리고 가명 뒤에 숨어서도 줄기차게 글을 써온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을까?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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