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24일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한 텍사스주 롭 초등학교 앞에 추모 공간이 마련됐다.ⓒREUTERS

“미흡하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첫걸음이다(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법안에 총기 규제 내용을 담으려는 어떤 노력도 계속 반대하겠다(전미총기협회).”

미국 연방 상원의 민주·공화 양당 의원 20명이 6월12일 총기 규제 법안에 극적으로 합의했다고 발표한 직후 나온 상반된 반응이다. 이들 의원은 5월24일 텍사스주의 한 초등학교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으로 어린이 19명과 교사 2명이 살해된 뒤 총기 규제를 외치는 여론이 빗발치자 총기 규제안을 내놓았다. 21세 이하 총기 구매자의 신원조회를 강화하고, 법원이 잠재적 위험인물에 대해 총기 소유를 금하도록 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앞서 6월8일 민주당이 장악한 하원은 대량 총기 사고의 주원인으로 지적돼온 반자동 소총을 구입할 수 있는 연령을 높이고, 대용량 탄창 판매를 금지하는 것을 골자로 한 총기 규제안을 통과시킨 바 있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총을 구입한 미국인은 약 2000만명에 달했다. 총기 사고로 사망한 사람도 어린이 1500명을 포함해 4만5000명에 달했다. 그만큼 총기 규제는 절박한 이슈다. 최근 총기 난사 사건 뒤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략 60%에 달하는 미국 국민이 강력한 총기 규제를 원한다. 이대로라면 의원들이 민의에 따라 총기 규제 법안을 통과시키는 게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대다수 공화당 의원들이 총기 규제에 반대하는 전미총기협회(NRA)의 영향권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총기 규제안이 의회 통과 문턱까지 갔다가 NRA 입김 때문에 무산된 경우가 많았다. 일례로 2012년 12월 동부 코네티컷주 샌디훅 초등학교에서 어린이 20명과 성인 6명 등 26명의 목숨을 앗아간 총기 난사 사건이 터진 뒤 총기 규제를 대폭 강화한 초당적 법안이 발의됐지만 결국 상원에서 부결된 바 있다. 이번에 공화·민주 양당 20명이 합의한 총기 규제안이 상원을 통과해도 훨씬 강력한 내용이 담긴 하원 규제안과 절충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법안이 무산될 수 있다.

NRA는 연간 약 4억 달러의 수입을 거두고, 500만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NRA는 1871년 창립 당시만 해도 총기 소유자의 사냥 등 취미활동을 위한 레크리에이션 클럽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1970년대 들어 본격적인 정치 로비 단체로 변신한다. 특히 1977년 ‘정치행동위원회(PAC)’를 출범시켜 의원들에게 정치자금을 후원하면서 NRA는 입법 활동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당시 조직 책임자였던 할런 카터는 정기 회비를 내는 회원을 300만명까지 늘리며 NRA를 막강한 정치 압력단체로 키웠다.

의원들 A~F 등급 매기는 전미총기협회

NRA는 활동 초기에는 고루 정치자금을 후원했는데, 근래에는 공화당 의원들 위주로 로비 활동을 하고 있다. 정치자금 내역을 추적하는 비영리단체 오픈시크릿(OpenSecrets)에 따르면, 1989년 이래 NRA가 정치자금을 후원해온 상위 100명 의원 가운데 98명이 공화당 출신이다. 고액 수혜자 중에 공화당 대통령 후보를 지낸 상원 중진인 밋 롬니 의원도 있다. 롬니는 정계 입문 후 지금까지 NRA로부터 약 1360만 달러를 후원받았다. 최근 그는 총기 구입자의 신원조회 확대가 골자인 총기 규제 법안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오픈시크릿에 따르면, NRA는 2020년 대선·의회 중간선거 때에도 총기 규제 반대론자인 도널드 트럼프 대선후보와 공화당의 의회·주지사 후보들을 지원하기 위해 2900만 달러 이상을 지출했다. 2016년 대선 당시에도 트럼프 후보를 위해 3100만 달러를 후원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최근 텍사스주 총기 참사가 벌어진 지 사흘 만에 열린 NRA 연례총회에 참석해 “민주당 좌익 세력들이 추진 중인 총기 규제 정책은 텍사스에서 벌어진 총기 참사를 막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라며 의회의 총기 규제 움직임을 비난했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 5월27일 전미총기협회(NRA) 행사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AP Photo

NRA는 총기 규제 문제와 관련해 의원들을 마치 학점을 매기듯 A에서 F 등급까지 분류해 ‘관리’하고 있다. 총기 문제에 관한 NRA 입장을 지지하면 A 등급이고, 명백히 반대하면 F 등급을 받는다. 총기 사고 뉴스를 추적하는 비영리기관 더트레이스(The Trace)는 2010년부터 2020년까지 선거 때마다 NRA가 공개한 의원 등급을 분석했다. 2020년 선거 당시 A 등급을 받은 민주당 하원의원은 단 한 명에 불과했다. 반면 공화당 의원들은 상·하원을 불문하고 94%가 A 등급을 받았다. 나머지 6%도 찬성에 해당하는 B 등급을 받았다.

NRA는 대형 총기 사건이 터질 때마다 범인을 비난하고, 학교 안전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공언해왔지만 거기까지다. NRA는 텍사스 참사의 원인에 대해서도 총기 규제 문제가 아닌 “고독하고 정신 나간 범죄자의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NRA는 미국 국민의 총기 소유권을 명시한 수정헌법 제2조를 금과옥조로 여긴다. 이를 근거로 NRA는 “총기 소유와 자유는 불가분의 관계”라고 주장한다.

NRA를 보는 미국 국민의 시선은 과거에 비해 훨씬 부정적이다. 텍사스 총기 참사 일주일 뒤 보수 방송 폭스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NRA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47%에 달했다. 특히 친공화 유권자들이 주류인 총기 소유자들은 1년 전만 해도 NRA에 호감도 67%를 보였지만 이번엔 56%로 떨어졌다.

NRA에 대한 호감도가 떨어진 데는 현재 이 단체가 처한 상황과도 무관치 않다. NRA는 최근 몇 년 동안 지도부 내분, 재정 비리, 일부 지도급 인사의 자금 유용과 관련한 법적 소송에 휘말려 있다. 위세가 예전만 못하다는 소리도 듣는다. 총기 문제 전문가인 뉴욕 주립대학 로버트 스피처 교수는 〈파이낸셜타임스〉에서 “NRA가 현재 재정적으로나 법적으로나 뒤죽박죽 상태인 것은 맞지만 여전히 총기 규제에 관한 입장을 내고 있다. 정치인들에게 자금을 지원하면서 영향력을 계속 발휘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공화당에 대한 NRA의 유착과 영향력을 끊지 않으면 의회 차원의 총기 규제안은 ‘그림의 떡’이 될 수밖에 없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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