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와 녹두는 평소 사이가 안 좋지만 잘 때는 붙어 잔다. ⓒ김영글 제공

둘 이상의 고양이가 한집에 산다는 건 생각보다 꽤 어려운 일이다. 사람이 그렇듯 고양이도 성격이 천차만별이다. 도도한 고양이도 애교 많은 ‘개냥이’도 하고많은 개체들 중 일부의 특성일 따름이다. 게다가 고양이는 타 존재와의 애착 관계보다 안정적인 터전을 중요시하는 것으로 알려진 영역 동물 아닌가.

우리 집 세 고양이 중 둘째 모래와 셋째 녹두는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다. 엄밀히 말하자면 모래가 녹두를 시기하고 얄미워한다. 모래 입장에서는 그럴 만도 하다. 거리 생활 탈출 후 처음 와본 아늑한 집에서 먼저 살고 있던 조용한 오빠 고양이는 꽤 마음에 들었고,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존재인 줄 알며 몇 해를 보내왔는데, 갑자기 더 어리고 정신 사나운 놈에게 막내 자리를 빼앗겼으니 말이다.

많은 반려인이 낮 동안 고양이가 빈집에 혼자 있으면 외로워할 것 같다거나 친구 또는 동생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이유로 두 번째, 세 번째 고양이를 들인다. 나도 그랬다. 이러한 생각의 발로가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이입일 뿐이며, 어떤 고양이에게는 또 다른 고양이의 갑작스러운 영역 내 출현이 커다란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서열을 중요시하는 동물도 영역 동물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에서 강형욱 훈련사는 여러 개가 사는 집에서 특정 대상에게만 공격적 성향을 보이는 개를 볼 때마다, 그에게도 나름의 고통이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고 짚어준다. 캐나다 오타와에서는 한 가정에서 개를 세 마리까지만 키울 수 있도록 법으로 규제하고 있기도 하다. 모르긴 몰라도 ‘합사’의 고충이 더 깊은 것은 반려인보다 동물 쪽일 것이다.

모래와 녹두도 큰 긴장감 없이 지내게 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둘의 관계가 조금이나마 개선된 것은 몇 해 전 제주로 이사 가던 당시 비행기 화물칸에서 함께 오들오들 떠는 경험을 하고서다. 역시 공동의 위기만큼 내부의 결속을 다지게 하는 요인은 없나 보다 생각하면 우습다가도, 둘이서 힘겹게 조율해가는 과정이 다 내 욕심 때문에 생긴 일 같아 미안해졌다.

나는 이들을 ‘내가 선택한 가족’이라 일컬으며 혼인과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과 구분 지어 의미를 부여하곤 한다. 그러나 고양이들 처지에서는 이 가족 역시 ‘주어진’ 가족이다. 사이좋은 오누이처럼 잘 지내는 광경은 내가 그리는 그림일 뿐, 애초에 이들의 바람이었던 적이 없다. 반려인의 손길을 늘 나눠 가져야만 하는 녀석들로서는 서로의 존재를 용인하는 것만도 큰 양보인 셈이다.

모래는 여전히 녹두를 이해할 수 없다. 딱딱한 북어 과자가 뭐가 그리 좋은지, 침대에서 펄쩍펄쩍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이유는 대체 뭔지. 녹두도 모래를 이해할 수 없다. 빨랫감만 보이면 잘근잘근 씹던데, 맛도 없는 천 쪼가리에 왜 집착하는지, 소리도 안 나는 빛 그림자는 왜 따라다니는지.

그래도 둘의 마음이 합의를 이루는 때가 있다. 잠을 잘 때다. 늘 독립적이고 구석에서 혼자 자는 걸 편안해하는 첫째 요다와 달리, 모래와 녹두는 엉겨 붙어 자는 것을 선호하는 까닭이다. 보드라운 털을 주거니 받거니 핥아주다 서로의 목덜미나 배에 기대어 잠든 둘을 보고 있으면, 원한 적 없는 공동생활 속에서도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며 살아가는 녀석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늘 결론은 하나, 나만 잘하면 된다.

기자명 김영글(미술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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