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4일 서울 대흥역에서 유세를 하고 있는 이숲 녹색당 서울시 마포구 구의원 후보(가운데). ⓒ시사IN 이명익

투표용지가 사라졌다. 6월1일 치러지는 지방선거에서 유권자들은 색이 다른 투표용지 7장을 받는다(세종 4장, 제주 5장, 국회의원 보궐선거 지역 8장). 전남 보성군 제2선거구 유권자가 받는 투표용지 개수는 다르다. 군수·도의원·군의원 비례대표는 뽑지 못한다. 대구 중구 제1선거구 주민도 마찬가지다. 투표용지 3장(구청장·시의원·구의원 비례대표)은 받지 못한다.

투표용지 3장이 사라진 건 해당 선거구가 ‘무투표 선거구’가 되어서다. 출마한 선거구에 경쟁자가 없는 후보자들은 투표를 거치지 않고 선거일에 당선이 확정된다. 공직선거법에 따라 무투표가 확정된 때부터 선거운동도 할 수 없다. 유권자의 선택을 받지 않고도 6월1일이 지나면 자동으로 당선이 확정되는 후보자는 전남 보성 제2선거구에선 전원 더불어민주당(민주당), 대구 중구 제1선거구에선 모두 국민의힘 소속이다.

6·1 지방선거에서 무투표 선거구가 쏟아졌다. 5월23일 기준 지방선거의 무투표 선거구 후보자는 519명이다(사퇴·등록 무효 등의 이유로 무투표 당선자는 계속 늘어날 수 있다). 4년 전 치른 지방선거 무투표 당선자(89명)의 6배에 달한다. 6·1 지방선거에서 선출되는 인원(4125명) 13명 중 1명은 ‘무투표 당선자’가 되는 셈이다. 정당투표가 처음 시작된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래 가장 많다(〈그림 1〉 참조).

기초의원(지역구) 무투표 당선 예정자는 대부분 2인 선거구에서 나왔다. 약 60%가 수도권에서 출마한 후보자다(〈그림 2〉 참조). 수도권 기초의원(지역구) 정수(887명)가 전체 기초의원(지역구) 정수(2602명)의 3분의 1 수준인 것을 고려하면 많은 수다. 송치용 정의당 전 지방선거준비위원장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수도권에선 거대 양당이 각각 지지율을 30~40%씩 가지고 있다. 양당이 한 명씩 후보를 내면 당선이 확정된다. 군소정당이 용기를 가지고 도전하지 않으면 그걸로 끝난다. 2인 선거구에선 (군소정당이 활로를 찾을) 방법이 없다.”

무투표 당선 예정자 명단에서 국민의힘과 민주당을 제외한 정당은 찾을 수 없다. 당적을 가질 수 없는 교육의원을 제외하면 모두 국민의힘·민주당 소속 후보자다. 광역의원(지역구) 무투표 당선 예정자 약 95%는 영호남에서 나왔다(〈그림 3〉 참조). 소선거구제를 채택한 광역의원 선거에선 1등만 의석을 갖는다. 특정 정당 후보가 당선할 가능성이 큰 지역에선 다른 정당이나 무소속 후보자가 도전하기 어렵다. 그 결과 호남 지역 광역의원(지역구) 무투표 당선 예정자 59명 모두 민주당, 영남에선 44명 모두 국민의힘 소속 후보자다.

1등만 의석을 갖는 소선거구제 선거에서 유권자도 정치인도 거대 양당으로 몰린다. 중대선거구제에선 1등을 하지 않아도 당선할 수 있다. 유권자는 자신의 표가 사표가 될 확률이 낮아지면, 더 자유롭게 마음이 가는 정당에 투표할 수 있다. 군소정당이 표를 얻고 의회에 진입할 가능성도 커진다. 민주당은 대선을 열흘 남겨둔 2월27일 의원총회에서 ‘다당제 정치개혁안’을 당론으로 채택했다. 정치개혁안에는 대선 직후 치러지는 6·1 지방선거에서 ‘기초의회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검찰개혁만큼 정치개혁 신경 썼는지”

민주당은 “대선 결과에 상관없이 정치개혁을 하겠다(김태년 정개특위 위원장)”라고 했지만 기초의회 중대선거구제는 사실상 무산됐다. 전국 국회의원 선거구 11곳에 시범 도입되는 데 그쳤다. 기초의원 선거구를 기준으로 하면 30곳으로 전체 기초의원(지역구) 선거구(1030곳)의 2.9% 수준이다. 시범지역에선 선거구마다 3~5명의 기초의원을 선출하게 되지만, 양당은 복수 공천으로 그마저도 무력화하고 있다. 4개 의석이 달린 광주 광산구 가선거구에 민주당이 4명의 후보를 내는 식이다. 기초의원 5명을 뽑는 충남 논산시 가선거구엔 민주당이 5명, 국민의힘이 4명의 후보자를 공천했다. 양당이 아닌 후보자는 정의당 후보자 1명뿐이다.

제10대 경기도의회 의원을 했던 송치용 전 위원장은 민생과 밀착한 지방의회에는 더 다양한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민주당 의원들이 입만 열면 지방자치·지방분권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하는데 지방자치를 다 무너뜨려놓고 언제 일으킬지 모르겠다.”

경기도의회는 4년 전 84곳이던 2인 선거구를 87곳으로 늘리고 3인 선거구를 74곳에서 69곳으로 줄였다. 경기도의회의 민주당 의원은 111명으로 전체 의원의 90%를 차지한다. 경기 지역의 한 민주당 국회의원은 민주당이 검찰개혁에 힘쓴 만큼 정치개혁에도 신경 썼는지 물어야 한다고 했다. “연동형 비례제 등 정치개혁 법안을 2년 안에 추진하면 ‘민주당은 악’ 같은 논리를 넘어설 수 있다고 본다.”

6·1 지방선거에서 서울 마포구의회 8개 선거구 중 3개 선거구가 무투표 선거구로 확정됐다. 무투표 당선 예정자는 선거구마다 민주당 후보 1명, 국민의힘 후보 1명씩이다. 2002년 제3회 지방선거를 포함해 5번 선거를 치르는 동안 무투표 선거구가 세 곳 나온 걸 감안하면 이례적인 일이다. 마포구 라선거구도 이숲 녹색당 구의원 후보가 출마하지 않았다면 무투표 선거구가 될 뻔했다.

5월18일 지역 정당 설립을 제한하는 정당법에 헌법소원을 제기한 지역정당네트워크 활동가들이 서울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은평민들레당 페이스북 갈무리

지역 정당이라는 새로운 대안

무투표 선거구가 왜 늘었을까. 김혜미 마포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이숲 캠프 선거대책본부장)은 ‘양당 구도’가 격화됐던 대선 직후 지방선거가 치러지는 점을 하나의 이유로 꼽았다. “대선 내내 ‘정권교체 대 정권 지키기’ 구도였다. 지방선거에서도 그렇게 구도가 흘러가면서 소수 정당이나 원외 정당이 지방선거에 뛰어드는 게 위축될 수밖에 없다.”

김 위원장이 보기에, 기초의원 중대선거구제가 2020년 ‘위성정당 출현 사태’ 때처럼 망가졌다. 그러자 양당 구도에 갇혀버린 선거판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을지 망설이던 이들이 있었다. 김 위원장은 중대선거구제에서 복수 공천을 금지해야 의회가 더 다양해질 길이 열린다고 했다. 정당의 공천권을 제한하기 어렵다면 기호제(국회 의석수에 따라 기호를 배분하는 방식)를 폐지하거나 전면 비례대표제를 채택하는 게 훨씬 다채로운 의회를 만드는 지름길이라고 주장했다.

이숲 녹색당 후보의 마포구의원 선거 출마는 느슨해진 서울 마포구 라선거구 분위기를 바꾸고 있다. “우리가 출마하지 않았다면 민주당·국민의힘 후보가 가만히 있다가 사이좋게 무투표 당선했을 거다. 우리가 열심히 선거운동하고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다니니까, 다른 후보들이 우리를 견제하고 선거운동을 시작했다. 소수 정당이 송곳처럼 올라오면 정체돼 있는 정치권력을 깨울 수 있지 않겠나.”

‘지역 정당’이라는 새로운 대안을 들고 나타난 이들도 있다. 나영씨는 올해 1월 ‘은평민들레당’을 창당했다. 은평민들레당은 서울시 은평구에 기반을 둔 지역 정당이다. 지역 정당은 전국 정당과 달리 특정 지역 한 곳에서 정책을 제안하고 실현하려고 한다. 나영 은평민들레당 대표는 공천이 곧 당선을 의미하는 상황에서 지역 정치인이 주민보다 공천권자를 바라보고 있다고 비판했다. 지방선거 후보자의 현수막과 공보물에는 정책보다 당의 주요 인사와 함께 찍은 사진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후보자는 어떻게 일할지보다 당의 유명 인사와 얼마나 가까운지를 내세운다. “우리를 대표하지 않는 정치인들에게 기대지 말고 우리가 직접 우리를 대표하는 정치를 해보자는 생각으로 창당했다.” 현재 은평민들레당에는 당원이 30명 정도 모였다.

은평민들레당은 직접행동영등포당, 과천시민정치당 등과 함께 ‘지역정당네트워크’를 꾸렸다. 그런데 현행 정당법에 따르면 지역 정당은 만들 수 없다. 정당법은 정당의 구성 요건을 수도에 소재하는 중앙당과 특별시·광역시·도에 각각 소재하는 시·도당으로 규정한다. 시·도당 5곳 이상, 당원 1000명 이상이라는 조건도 채워야 한다. 직접행동영등포당은 지난해 11월 정당법에서 ‘지역 정당을 허용해달라’는 취지의 헌법소원을 냈다. 헌법재판소 재판부에 회부되어 심리 중이다.

4년이 지나면 지방선거가 다시 돌아온다. 선거제도 개혁이 없다면 ‘무투표 당선 사태’가 반복된다. 무투표 당선이 쏟아지는 선거에서는 시민들의 의사를 반영할 수 없다. 양당이 독점하는 의회에는 다양한 목소리가 진입하기 어렵다. 김혜미 마포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은 “선거운동을 하며 녹색당에 관심이 없을 줄 알았던 유권자들이 캠프의 이야기에 설득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됐다”라고 말한다. “책임은 정치인의 몫이다. 시민들은 준비가 되어 있다. 여전히 제일 게으른 건 정치인들이다.”

기자명 이은기 기자 다른기사 보기 yieu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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