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를 통치한 칭기즈칸. ⓒWikipedia

1996년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서기 1000년을 기점으로 세계사 1000년 속에서 가장 걸출한 업적을 남긴 인물로 칭기즈칸을 꼽았다. “인터넷이 발명되기 약 7세기 전 이미 지구상에 커다란 통신망을 연결했고, 또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못지않은 자유무역 세계를 건설했다.”

칭기즈칸은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제국을 이룬 인물이지. ‘팍스 몽골리카’, 즉 몽골 지배 시기의 평화라는 표현이 나올 만큼 유라시아 대륙을 아울러 통치하는 데에 성공했다. 반면 칭기즈칸과 몽골 기마 전단의 말발굽 아래 수백 개의 나라와 도시가 잿더미가 됐고 수백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니 가히 “세계 종말을 향한 신의 채찍(당시 무슬림의 표현)”이라는 살벌한 평가도 그리 틀리지는 않는다.

선명한 명암을 지닌 거인 칭기즈칸. 그가 처음부터 거인으로서 순탄하게 산 건 아니었어. 이웃 부족의 음모에 아버지를 잃고 일가붙이들도 다 떠나버린 뒤 테무친(칭기즈칸이 되기 전의 이름)은 외로운 늑대 새끼에 불과했다. 그에게 들이닥친 ‘골리앗’은 하나둘이 아니었지. 그는 어떤 면에서 다윗보다 훨씬 멸시받고 위태로웠던 어린 용사였어. 온 가족이 굶주림에 시달리며 근근이 생을 이어갔고, 적의 포로가 돼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으며, 갓 결혼한 아내를 적에게 빼앗기기까지 했으니 오죽하겠니.

하지만 테무친은 시련을 이겨내고 상당한 세력을 지닌 지도자로 성장했다. 1186년 주변의 추대를 받아 ‘칭기즈칸’의 호칭으로 칸 자리에 오르지. 이걸 칭기즈칸의 1차 즉위라고 하는데 영광의 시작이라기보다는 더욱 험난한 시련의 출발점이었어. 당장 테무친의 오랜 친구였던 자무카부터 칭기즈칸에게 등을 돌린다. 자무카와 칭기즈칸은 1190년 각각 자신을 지지하는 13개 부대를 편성해 격돌하는데 이걸 ‘13익(翼) 전투’라고 불러. 이 전투에서 칭기즈칸은 형편없이 패배했고 4년간 수수께끼 같은 공백기를 보낸다. 금나라로 가서 노예 생활을 했다는 말도 있고, 심지어 고려에서 지냈다는 기록도 있어. 그렇게 잊힐 정도로, 또는 지워 버렸을 정도로 비루한 시간이었다고 보는 게 맞겠지.

4년 뒤 칭기즈칸은 금나라 승상의 요구에 응해 자신의 후견인 노릇을 하던 케레이트 부족의 옹칸과 함께 타타르 부족을 공격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당시 북중국을 지배하던 금나라는 몽골의 갈등과 내분을 조장하며 몽골고원을 통제하던 나라였어. 칭기즈칸은 조상의 원수인 금나라에서 용병 노릇을 하며 역사에 재등장한 셈이야.

칭기즈칸은 다시금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다. 무엇보다 신분과 혈연에 구애받지 않고 사람들을 끌어모았지. 자신을 쏘아 맞힌 적장이라도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서슴없이 받아들이는 칭기즈칸의 모습은 초원의 주민들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지. 전통대로 대학살을 자행하기도 했지만, 살아남은 적대 부족을 노예로 만드는 대신 자기 세력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데 스스럼이 없었고, 개별적 약탈을 금지하고 전리품을 일괄 재분배했으며, 전사한 병사의 과부와 고아들에게도 그 몫을 나눠주는 칭기즈칸. 친구 자무카에 비해 오히려 군사적 재능은 뒤떨어졌다고 평가받지만 노예의 말이든 하급 전사의 말이든 귀 기울일 줄 아는 칭기즈칸은 “재능의 천재가 아니라 태도의 천재였다(홍대선 지음 〈테무친 to the 칸〉)”.

칭기즈칸의 친구이자 숙적 자무카는 케레이트의 옹칸에게 들러붙어 칭기즈칸을 밟아버리자고 충동질했어. 칭기즈칸은 옹칸의 변덕에 괴로워하면서도 그와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 혼인동맹을 제안한다. 하지만 옹칸과 자무카는 이에 응하는 척하면서 칭기즈칸을 끌어들일 음모를 짰지. 결혼 축하 파티를 기대하면서 무리를 이끌고 오던 칭기즈칸은 카라칼디즈 사막 전투에서 다시 한번 괴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한다. 하지만 그는 위대한 ‘태도’를 잃지 않는다. 부하들을 후위에 배치해 희생시키는 식으로 추격대를 막아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부하들을 사방으로 흩어지게 한 뒤 자신은 소수의 본대만 이끌고 필사적으로 도망을 친 거야.

종교와 신분, 인종과 혈연 초월한 결사체

EBS 다큐멘터리 〈강대국의 비밀〉 3부 ‘세계 제국 몽골’ 중 ‘발주나의 맹약’ 연출 화면. ⓒEBS 화면 갈무리

칭기즈칸은 몽골의 동북쪽 끝이라 할 발주나 호수까지 달아났다. 주변에 남은 건 굶주리고 지친 전사 19명. 기독교·이슬람교·불교 신자에 칭기즈칸처럼 샤머니즘 숭배자까지 뒤섞인 이질적인 집단에 출신 부족도 각각 다른 사람들. 신분의 귀천 따위는 애초에 사라진 그들을 앞에 두고 칭기즈칸은 건배를 제안한다. 19명의 사내 역시 잔을 들며 충성을 다짐하지. 굶어죽을 지경이던 그들에게 술이 있을 리 없었고 그들이 마신 건 발주나 호수의 흙탕물이었어. 이것이 몽골 역사의 전환점이 되는 ‘발주나의 맹약’이야. 인류학자 잭 웨더포드는 그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친족관계, 인종, 종교를 떠나 결집한 몽골 민족의 다양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 개인적 선택과 헌신에 기초한 근대적 시민 결사체.”

‘발주나의 맹약’ 이후 칭기즈칸의 군대는 불가사의하게 부활한다. “칭기즈칸과 함께하고픈 자들은 모여라.” 초원 곳곳으로 전령들이 내달리면서 유장하게 칭기즈칸의 포고를 전하자 그의 휘하에 있던 이들은 물론이고 칭기즈칸과 싸웠으나 그 통치 방식을 선망했던 부족들도 활을 차고 말에 올랐어. 거대한 기존 질서에 저항하는 ‘소수’의 연합군이 형성된 거야.

칭기즈칸의 군대는 이후로 완전히 달라진다. 부족 중심의 부대에서 탈피해, 단일 대오로 군사를 천 명, 만 명씩 10진법으로 편성한 뒤 통제부의 지휘를 받는 효율적인 몽골 군단이 탄생한 거야. 마침내 테무친은 초원 최대의 세력을 자랑하던 케레이트 부족의 옹칸과 자무카를 격파하고 또다시 칭기즈칸으로 추대된다. 이걸 칭기즈칸의 2차 즉위라고 해. 이후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단련되고 “칭기즈칸이 원한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병사들이 뿜어내는 몽골의 에너지는 유라시아 대륙 사방으로 폭발하게 되었지.

강자나 지배 세력은 현재의 자신을 일군 과정이 성공적이었기에 자신이 지켜온 관성에 충실하고 지금 이대로의 모습을 선호할 수밖에 없어. 그것이 상당 부분 들어맞을 때도 많지. 그 질서에 저항하는 약자들은 탄압받고 대부분 괴멸의 길을 걷지만, 종종 강자들의 질서를 뒤엎는 새로운 시스템의 주인공이 되어 또 다른 문명의 시대를 열기도 한단다. 외롭고 약했던 아이 테무친을 칭기즈칸으로 탈바꿈시킨 것은 무쇠 같은 팔이 아니라 열린 귀였고, 천재적인 군사 재능이 아니라 겸허함이었으며, 검은 뼈니 흰 뼈니 하며 귀한 핏줄 따지던 몽골의 전통을 뒤엎고 귀족이든 말단 병사든 전리품에 공동의 권리를 주고 전사자의 아내와 아이까지 챙긴 리더십이었어.

주의 깊게 주변과 세상을 들여다보기 바란다. 현재 우리를 다스리는 지배적 질서는 무엇이고, 누가 바위 같은 관성에 계란을 던지고 있는지. 그리고 어디에서 새로운 질서의 씨앗이 싹트고 있는지. 아마도 그 조짐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을 거야. 앞에서 말했듯 칭기즈칸은 1000년에 한 번 나온 사람이니까. 하지만 칭기즈칸이 당시 몽골 사회가 빚어낸 ‘태도의 천재’였듯,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런 천재를 장구한 세월에 걸쳐 길러내고 있을지 모른다.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