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미트로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무장관. ⓒAP Photo

3월13일 독일 공영방송 ARD의 시사 프로그램 〈안네 빌〉에 드미트로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이 화상으로 출연했다. 그는 독일과 러시아의 협력적 관계가 러시아의 ‘전쟁 권력’ 형성에 일조했다고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요청했다.

첫 번째는, 독일이 우크라이나에 방어용 무기를 공급해달라는 것이다. 두 번째로, 독일이 대(對)러시아 경제제재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라고 요구했다. 마지막 요청은, 우크라이나의 유럽연합(EU) 가입에 대한 독일의 지지다.

하지만 쿨레바 장관의 요구는 독일 정부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위기에 대한 입장을 상당 부분 바꾼 뒤에 나온 것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국경에 군대를 집결시키며 전운이 감돌던 당시까지 독일 정부는 러시아에 온건한 입장이었다. 하지만 지난 2월22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독일 정부는 ‘노르트스트림 2’(러시아와 독일을 직접 잇는 천연가스 수송라인)에 대한 운영 허가 절차를 즉각 중단시켰다. 노르트스트림 2는 러시아 국영 가스기업인 가즈프롬이 약 80억 유로를 투자해 진행한 대형 경제 프로젝트다. 러시아 천연가스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독일로서는 완공 이후 허가 절차만 남긴 노르트스트림 2에 대한 제재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러시아가 이에 대한 보복 조치로 이미 운영 중인 노르트스트림 1의 가동을 중단시켜 독일에 에너지 대란을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까지 독일 정부의 원칙은 ‘분쟁지역엔 무기를 수출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실상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을 거부했던 셈이다. 그러나 침공 이후인 지난 2월27일,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연방의회에서 ‘대전차 무기 1000기와 군용기 격추를 위한 지대공 스팅어 미사일 500기를 우크라이나에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숄츠 총리는 이와 함께 독일의 군비 증강 계획도 발표했다. 우선, 연방군 강화를 위해 2022년에 1000억 유로 규모의 추가 특별예산을 편성한다. 또한 ‘국내총생산(GDP)의 2% 이상을 국방비로 편성하라’는 나토의 요구에 맞춰 독일의 국방비를 증가시킬 것이라고 발표했다. 숄츠 총리는 푸틴이 러시아 제국을 완성하기를 원한다며, 독일도 러시아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독일 정부의 이런 기조 변화는 입장 발표 전날(2월26일) 숄츠 총리에 의해 급작스럽게 결정되었다. 〈차이트〉가 인용한 정부 관료의 말에 따르면,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가장 정신없는 하루”였다.

‘정신없는 하루’는, 다른 나라 정부들이 독일에 우크라이나 지원을 요청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날(2월26일) 아침, 네덜란드 정부는 자국이 보유한 독일산 대전차 무기 400기를 우크라이나에 지원하는 것을 승인해달라고 독일 정부에 요청했다. 독일산 무기를 매입한 국가들은 독일 정부의 승인 없이 해당 무기를 다른 나라에 보낼 수 없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간, 폴란드 총리와 리투아니아 대통령도 갑작스럽게 ‘독일의 적극적 대응’을 요청하며 숄츠 총리를 방문했다. 이날 열린 G7 고위 외교관 화상회의에서는 미국과 영국 측 대표가 ‘우크라이나에 스팅어 미사일을 공급할 계획이며 이후 48시간이 우크라이나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며 독일을 압박했다.

이에 따라 무기 지원을 반대했던 아날레나 베르보크 독일 외무장관과 크리스티네 람브레히트 국방장관이 각각 ‘우크라이나에 스팅어 미사일 공급’을 요청하거나 지원 가능한 무기 목록을 제시하는 등 입장을 180° 바꿨다.

독일, 상당한 에너지를 러시아에 의존

이날 독일 정부는 러시아 은행들을 ‘스위프트(SWIFT:국제 금융거래 결제망)’에서 배제하는 데 대한 찬성 여부도 결정해야 했다. 당시까지 독일 정부는 러시아로부터 공급받는 가스 대금을 결제하지 못할 경우 벌어질 수 있는 에너지 대란이 두려워 이 결정을 망설여왔다. 그러나 결국 2월26일 저녁, 숄츠 총리는 내각회의 대신 총리실 측근들과 논의를 통해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 ‘국방비 특별편성’ ‘러시아 은행들을 스위프트에서 배제’ 등의 결단을 내린다.

이런 방향 전환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 정부와 독일 내 일부 여론은 더 강경한 조치를 요구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서방국가들에 전투기 지원 및 EU 가입 절차의 신속화를 요구한다. 그러나 독일 정부는 ‘전투기 지원이 전쟁 국면을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며 일단 거부한 상태다. EU 규정상 우크라이나의 빠른 가입 역시 불가능하다는 시각이 강하다.

3월15일 독일 동부 슈베트에서 환경단체 그린피스의 활동가들이 러시아산 원유 수입 금지를 요구하며 정유공장으로 통하는 철로를 막은 채 시위하고 있다. ⓒdpa

그러나 독일 정부에서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러시아산 에너지의 수입 문제다. 〈슈피겔〉에 따르면, 독일이 2020년 수입한 천연가스의 55%, 석탄의 46%, 석유의 36%가 러시아산이다. 러시아산 에너지에 대한 의존도가 낮은 미국과 달리 독일이 갑자기 러시아산 천연가스와 석유의 수입을 전면 중단하기는 어렵다. 앞서 나온 ARD의 시사 프로그램 〈안네 빌〉에 나온 로베르트 하베크 독일 경제기후장관이 ‘독일은 러시아 에너지로부터 자립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며 ‘밤낮으로 노력 중’이라고 밝힌 이유다.

하베크 장관은 에너지차관에게 가능한 한 최대치의 액화가스를 비싼 가격으로라도 글로벌 차원에서 구입하라고 지시한 상태다. 노르트스트림 1(지금까지 운영해온 러시아와 독일을 잇는 천연가스 수송라인)을 통한 천연가스 구입량도 늘렸다. 〈슈피겔〉은 이에 대해, ‘독일이 러시아로부터의 가스 수입을 선제적으로 중단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러시아 측에서 가스 공급을 먼저 끊었을 경우에 대비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슈피겔〉에 따르면, 독일이 현재 러시아에 지불하는 천연가스 대금이 푸틴의 전쟁 비용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독일이 천연가스를 풍부하게 확보해놓으면, 러시아와 천연가스 거래가 실제로 끊어지는 경우에 독일보다 러시아의 피해가 더 클 수 있다고 설명했다.

독일 경제기후부는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이 갑자기 중단되면, 독일의 산업 생산 역시 큰 차질을 빚게 된다는 점을 우려한다. 하베크 경제기후장관이 ‘러시아산 에너지로부터 점차적 독립’을 선호하는 이유다. 하베크 장관뿐 아니라 연정을 구성하는 사민당이나 자민당의 주요 정치인, 야당인 기민당 정치인들의 상당수가 즉각적인 러시아 에너지 수입의 중단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가 전쟁으로 겪는 고통에 비한다면 독일이 러시아 에너지 수입을 중단했을 때 감내해야 하는 고통은 견딜 만한 것이라며, 독일 정부가 즉각적으로 러시아산 에너지를 거부해야 한다는 여론 또한 적지 않다. 〈슈피겔〉이 3월 초 여론조사기관 치베이(civey)에 의뢰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독일인의 65%는 독일 정부가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이 있더라도 러시아를 제재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27%만이 이에 반대했다.

기자명 프랑크푸르트∙김인건 통신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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