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이냐, 번식이냐 ‘가혹한 차악’ TNR
  • 변진경 기자
  • 호수 93
  • 승인 2009.06.22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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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길고양이에게 베풀 수 있는 ‘최선’은 자연을 돌려주는 것이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도시 환경에선 그나마 그들의 생존을 위한 ‘차악’을 택할 수밖에 없다. 길고양이 중성화 수술 프로그램(TNR)이 바로 그것
   
ⓒ시사IN 변진경
서울 이촌동의 한 동물병원에서 한 암컷 길고양이가 중성화 수술을 받기 위해 누워 있다.
이미 생태계의 먹이사슬이 무너진 이상, 도시에서 길고양이를 ‘자연 상태’로 놔두는 일이 꼭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길고양이 개체 수가 너무 많이 늘어나면 길고양이에게나 사람에게나 좋지 않다. 길고양이끼리 영역 다툼이 치열해져 서로 싸우다가 많이 다치기도 하고, 번식을 위한 암컷 길고양이의 아기 울음소리가 한밤중 사람들의 수면을 방해하기도 한다.

최근까지 ‘길고양이 대책’이라 불릴 만한 것은 살처분뿐이었다. 길고양이가 시끄럽고 지저분하다며 지방자치단체에 민원이 들어오면 동물구조협회 등에서 생포해 유기동물보호소에 몰아넣는다. 일정 기간 찾으러 오거나 입양하는 사람이 없으면 길고양이를 죽인다. 동물보호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차라리 잡자마자 죽여라”고 말할 정도로 보호소의 환경은 열악하다.

고심 끝에 도입한 것이 바로 길고양이 중성화 수술 프로그램(TNR)이다. 길고양이를 잡아서(Trap) 중성화 수술을 시킨 뒤(Neuter) 다시 제 영역으로 돌려보내는(Return) 과정으로 진행된다. 살처분 방식이 오히려 진공 효과(빈 영역에 다른 길고양이들이 들어오거나, 암컷이 새끼를 빨리 배 결국 길고양이 수가 줄어들지 않는 효과)를 일으킨다는 연구 결과에 따라 영국에서 처음 시행한 방식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몇 년 전부터 서울 강남구와 용산구에서 시범 실시하다가 지난해 3월부터 서울시 전체로 확대했다.

“인간이 숲과 먹이를 없앤 이상…”

정부에서 나서기 전 민간 동물보호 단체에서 먼저 TNR를 실시하고 있었다. 서울 한강맨션의 ‘캣맘’들이나 고양이보호협회 회원들이 후원금을 모아 민원이 잦은 동네의 길고양이를 잡아 동물병원에서 중성화 수술을 시켜왔다. 이들은 ‘잡아서 수술시키는 과정’보다 ‘안전하게 돌려보내는’ 사후 모니터링 과정에 더 신경을 쓴다. 수술 후 회복이 덜 된 길고양이가 자기 영역에 제대로 정착하지 못할 경우 오히려 이전보다 더 불행한 결과를 낳을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길고양이 보호 활동을 벌이는 사람들은 지자체에서 TNR 프로그램을 시작한 게 한편으로는 반갑지만 한편으로는 “일단 많이 잡아서 수술시키고 보자”라는 실적주의에 빠질까봐 걱정스럽다.

길고양이를 집에 들여 함께 지내는 사람들도 대부분 중성화 수술을 시킨다. 쉬운 결정은 아니다. 옆집 담 밑 좁은 곳에 갇혀서 우는 새끼 고양이를 구출해 8년간 키운 일러스트레이터 전지영씨(39)는 수술을 시킨 뒤 (고양이를 키우지 않는) 주변 사람들에게 비난을 많이 들었다. “비윤리적이고 고양이에게 엄청나게 불행한 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전씨를 비롯한 고양이 애호가들은 대부분 길고양이 중성화 수술을 “어쩔 수 없는 차악”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모든 숲과 먹이를 없앤 이상, 도시에서 이미 태어난 길고양이의 생명을 존중하되 인간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중간 선택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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