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2일 메이저리그 선수노조 브루스 메이어 수석 교섭인(왼쪽)과 토니 클라크 사무총장이 텍사스주 어빙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AP Photo

메이저리그는 지난해 12월2일(이하 현지 시각)부터 직장폐쇄에 돌입했다. 5년 기한의 단체협약 갱신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단주들은 선수노조를 압박하기 위해 만장일치로 직장폐쇄를 의결했다. 직장폐쇄 기간에 각 구단은 기존 선수 명단(40인 로스터)을 유지해야 한다. 새로운 계약은 이뤄질 수 없다. 협상 결렬을 앞둔 지난해 11월 말 굵직굵직한 프리에이전트(FA) 계약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졌던 건 이 때문이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네 번째 직장폐쇄다. 직장폐쇄에 대응하는 선수 측 수단인 파업은 모두 다섯 번 일어났다. 직장폐쇄와 파업으로 경기 일정이 취소된 사례는 세 번이다. 1994~1995년 파업 때는 월드시리즈가 취소됐고 모두 938경기가 열리지 못했다. 이번 직장폐쇄는 리그 일정 취소나 단축으로 이어지지 않으리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단체협상 난항의 가장 큰 이유는 선수 쪽의 불만이었다. 메이저리그 선수 연봉은 지난 3년 연속 하향 추세였다. 지난해 연봉 상위 125명 평균액은 1840만 달러로 전년 대비 2.6% 감소했다. 5년 전 협상 때도 선수들의 불만은 대단했지만 협상은 순탄했다. 연봉 감소의 가장 큰 이유는 구단들이 과거와 달리 FA 계약에 큰 비중을 두지 않고, 미래를 위해 당장 성적을 포기하는 ‘탱킹’ 전술을 쓰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에 대해 노조 쪽이 효과적인 대안을 내세우기 어렵다는 점이다. 최저임금 인상, 연봉조정 신청자격 취득기한 단축, FA 계약 보상 완화 등에서 타협이 이뤄질 전망이다.

단체협약은 한국 프로야구에는 없는 제도다. 노동법상 단체협약을 맺을 수 있는 단체교섭권은 노동조합에 부여된다.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는 과거 노조 전환을 시도했지만 무산됐다. 미국뿐 아니라 일본, 타이완 프로야구 선수 단체도 노조로 설립돼 있다.

메이저리그에서 단체협약의 위상은 대단하다. 메이저리그는 오랫동안 반독점법 예외를 누려왔다. 미국 의회는 1998년 선수 고용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사항에 대해서는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커트 플러드 법’을 제정했다. 이 사항을 정하는 게 단체협약이다. 메이저리그 최상위 규범인 ‘메이저리그 헌장’은 제2조에서 커미셔너(메이저리그의 총재)를 다룬다. 커미셔너는 헌장 제2조와 제4조에 의해 ‘야구 최선의 이익(the best interests of baseball)’을 수호하기 위해 막강한 권한을 가진다. 하지만 헌장 제5조는 ‘단체협약과 관계된 사안’에서는 이 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고 못을 박는다.

임의단체로 출발했던 메이저리그 선수노조는 1960년대 노동조합 자격을 취득했다. 이에 따라 1935년 제정된 노동관계법(National Labor Relation Act)이 보장한 단체교섭권을 얻었다. 이를 주도한 인물이 1966년 노조 사무총장에 취임한 마빈 밀러였다. 뉴욕 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밀러는 미국 철강노조 등에서 잔뼈가 굵은 노동운동 전문가였다. 당시 메이저리그 야구선수들은 노조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전후 매카시즘이 득세했고, 1962년엔 쿠바 위기가 일어났다. 노조 활동가가 공산주의자 취급을 받을 때였다.

무엇보다 선수들이 자신의 일을 ‘노동’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선수노조의 정식 이름은 메이저리그 선수협회(Major League Baseball Players Association)다. 지금 미국 언론에선 통칭 ‘노조(Union)’라고 한다. 1960년대 선수들은 굳이 ‘협회(Association)’라는 단어를 썼다. ‘노조’라는 단어를 혐오한 이가 많았다.

1966년 메이저리그 선수노조 사무총장에 취임한 마빈 밀러(가운데). ⓒAP Photo

“1년은 1년일 뿐 영원할 수 없다”

밀러는 LA 다저스 투수 샌디 코팩스와 돈 드라이스데일의 연봉 인상 등 구단 측과의 협상에서 몇 차례 승리를 거두며 신뢰를 얻었다. 코카콜라와 단체초상권 계약을 해 노조 재정을 충실히 했다. 1968년 2월21일엔 미국 프로스포츠 사상 처음으로 구단들과 2년 기한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선수들은 노조원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단체협약은 지금 기준으로는 평범한 내용이었다. 최저연봉을 6000달러에서 1만 달러로 인상한다는 게 골자였다. 여기에 식대와 숙소 등 자잘한 처우 개선이 있었다. 그리고 자잘해 보였지만 나중에 초대형 폭탄이 되는 합의사항이 있었다. 선수가 구단 또는 리그와 분쟁을 겪을 경우 커미셔너가 최종 조정을 하도록 했다. 구단 측은 큰 이의가 없었다. 제도적으로 커미셔너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지만 결국 구단의 피고용자이기 때문이다.

1970년 두 번째 단체협약에서 최종 조정자는 커미셔너에서 구단과 선수 측이 한 명씩의 추천권을 가지는 3인 조정위원회로 변경됐다. 의장을 맡는 나머지 한 명은 중립 인사였다. 구단들은 별 이견이 없었다. 첫 단체협약이 발효된 해인 1968년 선수 측의 조정 요청은 세 건에 불과했다. “겨울에 농구 좀 했다고 구단이 벌금을 매겼다” 따위 사소한 사안이었다.

메이저리그 노사관계를 결정적으로 바꾼 단체협약은 1976년 7월12일 체결됐다. 이 협약에서 지금의 메이저리그 FA 제도가 시작됐다. 이전까지 선수는 구단의 독점계약권인 보류권 아래 묶여 있었다. FA 제도에서 선수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자유롭게 모든 구단과 계약 협상을 할 수 있다.

보류권 철폐와 계약의 자유 획득은 밀러와 선수노조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당시 선수 계약서는 구단이 소속 선수와 시즌 전까지 계약에 합의하지 못하면 자동으로 계약이 1년 연장되도록 규정했다. 그다음 해에는? 구단들은 또다시 1년이 연장된다는 주장이었다.

1975년 투수 앤디 매서스미스와 데이브 맥널리는 계약이 자동 갱신된 상태에서 한 시즌을 뛰었다. 그리고 시즌 뒤 조정을 신청했다. “1년은 1년일 뿐 영원할 수 없다”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다. 1975년 12월23일 조정위원장인 피터 자이츠는 두 선수에 대해 “다른 구단과 자유롭게 협상하고 계약할 권리를 갖는다”라고 결정문을 발표했다. 구단들의 억지 해석이 제3자의 지지를 받을 수는 없었다. 밀러가 첫 단체협약에서 묻어둔 폭탄의 뇌관이 7년이 지나 터진 셈이다.

자이츠의 조정은 모든 선수가 계약서에 사인하지 않고 1년을 버티면 FA가 될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구단들은 보류권 조항이 조정 대상이 될 수 없다며 법정투쟁에 나섰지만 패소했다. 결국 1976년 단체협약에서 FA 제도에 합의해야 했다.

기자명 최민규(한국야구학회 이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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