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9일, 회고록에서 고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전두환씨가 항소심 재판에 출석한 후 광주지방법원을 떠나고 있다. ⓒ연합뉴스

7년6개월 동안 권세를 누린 독재자는 90년을 살다가 자신의 집에서 사망했다. 반란수괴, 내란수괴, 내란목적 살인 등 혐의로 기소되어 대법원에서 무기징역(1심은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그가 감옥에서 보낸 시간은 2년에 불과했다. 사망한 독재자의 이름은 전두환. 2021년 11월23일 오전, 서울시 연희동 자택에서 생을 마감했다. 구체적인 사인은 11월25일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사망 전까지 다발성 골수종을 앓은 것으로 알려졌다.

권좌에서 내려온 후에도 그의 삶은 대부분의 순간이 논란거리였다. “29만원밖에 없다(1997년)”를 비롯해 수많은 어록을 만들어냈고, 자신의 잘못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사망하는 순간까지 그는 피고인이었다. 2017년 4월에 출간한 회고록에서 고 조비오 신부를 비난해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을 받던 중이었다. 1심에서 유죄판결(집행유예)을 받았지만, 항소 후 2심이 진행되고 있었다.

독재자는 죽어서도 논란을 남겼다. 정치권에서는 그의 사망을 대하는 방식을 두고 적잖은 소란이 뒤따랐다. 당장 대선후보의 조문 여부가 관심사였다. 여당에서는 일찌감치 조문과 선을 그었다. 호남 지역 출신 국회의원들은 이날 오후 2시20분에 기자회견을 열고 “전두환의 마지막 길이 전직 대통령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국가장의 예우를 받는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라며 성명을 발표했다. 지난 10월26일 사망한 노태우씨의 국가장 논란을 겪은 터라, 미리 국가장 여지를 남기지 않기 위한 행동이었다. 이재명 민주당 대선후보도 조문을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히며 “역사와 진실의 법정엔 공소시효가 없다. 전직 대통령 이전에 한 자연인의 죽음 앞에 선뜻 추모의 마음을 전할 수 없는 것은 현대사에 그가 드리운 그늘이 그만큼 크고 짙기 때문”이라는 말을 남겼다.

국민의힘에서는 다소 복잡 미묘한 상황이 뒤따랐다. 현재 당을 실질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는 윤석열 대선후보는 이날 오전 조문 여부에 대해 “가야 되지 않겠나 생각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전씨 장례 형식에 대해서도 “정부가 유족의 뜻과 국민 정서 이런 것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하지 않겠나”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3시간 뒤인 오후 2시45분 국민의힘은 “윤 후보는 조문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라고 발표했다. 이날 당 대선 경선 후보들과 점심을 함께하는 자리에서 참가자들이 조문을 만류했다는 이야기가 뒤따랐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역시 조문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2019년 2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망언

국민의힘 출신 정치인들이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망언을 쏟아냈던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혼선이다. 불과 2년 전인 2019년 2월, 당시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 소속인 이종명·김순례 의원은 5·18 관련 공청회에서 “북한군이 개입한 폭동(이종명)” “5·18 유공자라는 괴물 집단을 만들어내 세금을 축낸다(김순례)”라는 발언을 해 논란을 일으켰다. 지난해 김종인 당시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광주 국립 5·18민주묘지를 찾아 무릎을 꿇고 사과했지만, 여전히 전두환씨에 대해 호의적 태도를 보이는 강경파 보수 인사들이 당에 남아 있는 상황이다.

11월23일 MBN 10주년 행사에 모인 여야 대선후보들. 아무도 전두환씨 빈소를 찾지 않았다.ⓒ국회사진기자단

이러한 현실에서 보수 야당의 ‘조문 불참 선언’은 대선을 앞두고 중도층 포섭을 염두에 둔 결정으로 풀이된다. 대선을 불과 100여 일 앞두고 있다는 정치적 상황,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지난 10월19일 부산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군사쿠데타와 5·18만 빼면, 정치는 잘했다고 얘기하는 분들이 많다”라고 발언해 논란을 일으킨 전력이 ‘조문 취소’의 결정적인 배경이 됐다.

야당의 이 같은 ‘거리두기’에 전두환씨 빈소는 정치권에서 경계구역이 됐다. 이러한 거리두기가 가능한 데에는 대다수 여론이 전두환이라는 인물을 ‘과거의 향수’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각종 여론 지표에서도 전두환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내리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시사IN〉이 매년 실시하는 신뢰도 조사에서도 이 같은 결과를 알 수 있다. ‘가장 신뢰하는 전직 대통령’을 묻는 질문에 전두환씨를 꼽은 이들은 응답자의 0.7~2.2%(2012~2021년 연간 조사)에 불과했다. 이마저도 최근에는 0.8%(2020년), 0.7%(2021년) 수준이었다.

한국갤럽이 지난 10월26~28일 전국 성인 1000명에게 전직 대통령의 공과를 물은 여론조사(신뢰수준 95%, 표본오차 ±3.1%포인트,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고)에서도 전두환씨에 대한 평가는 박했다. 전두환씨가 ‘잘한 일이 많다’고 평가하는 응답자는 16%에 불과한 반면, ‘잘못한 일이 많다’고 평가한 응답자는 73%에 달했다.

다른 전직 대통령에 대한 긍정 평가(박정희 61%, 노태우 21%, 김영삼 41%, 김대중 62%, 노무현 61%)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치다.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 전두환이라는 인물에 대한 대중 인식이 압도적으로 부정적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선거를 앞둔 대중 정치인으로서는 이 같은 ‘대중의 평가’를 거스르기 어렵다. 이 때문에 전두환씨 빈소는 사흘째인 11월25일까지 정치인의 발길이 뜸했다. 현직 정치인 중에서는 김기현 국민의힘 원내대표와 윤상현(과거 전씨의 사위)·주호영·박대출 의원만 조문했을 뿐이다. 이재오·김진태·민경욱 전 의원도 조문했으나 모두 윤석열 후보의 ‘조문 의사 번복’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이었다.

여론은 정치인의 추모를 막았고, 정치권의 ‘거리두기’는 전두환이라는 인물을 과도하게 포장하거나 추켜세우는 것을 미연에 차단시켰다. ‘전두환 조문 불가’가 2021년 한국 정치권에서는 ‘최소한의 상식선’으로 작동한 셈이다. 대선 직전이 아니었다면, 중도층 표심을 두고 경쟁하는 치열한 구도가 아니었다면 이 같은 거리두기가 불가능했을 수도 있다.

이 같은 여론 지형은 전두환씨 스스로가 초래한 성격이 크다. 당장 본인이 해결하지 않은 문제가 산적하다. 5·18 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하던 당시 발포 명령에 대해 여전히 부인했고, 20년 넘게 법원의 추징금을 미납한 경력도 대중의 인식에 영향을 미쳤다. 전씨는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추징금 2205억원을 선고받았으나, 이 가운데 956억원을 미납한 상태다.

현행법상 ‘미납금 956억원’ 추징 어려워

현행 형사소송법상 전씨가 사망한 상태에서 더 이상 추징하기는 어렵다. 윤호중 민주당 원내대표는 11월25일 “불법은 죽어도 불법이다. 현행 법체계를 존중하면서도 뇌물로 인한 거액 추징금을 의도적으로 납부하지 않은 경우, 사망 후에도 환수받도록 법률 제정에 나서겠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관련법을 제·개정 하더라도 소급 적용 가능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현 시점 전두환씨에 대한 여론 지형이 부정적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그에 대해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식의 주장이 돌출될 가능성은 남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단초를 제공한 인물은 윤석열 대선후보다. 윤 후보는 “(전씨가) 정치를 잘했다”는 자신의 말이 논란이 되자, 다음 날인 10월20일 “전두환 정권 군사독재 시절 김재익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 ‘경제 대통령’ 소리를 들었을 정도로 전문가적 역량을 발휘했던 것”을 예시로 들며 “인재를 적재적소에 기용”하겠다는 의도였다고 해명했다. 결국 10월21일에 자신의 발언에 대해 사과했지만, 사과 직전까지 ‘전두환 독재 시절 경제는 좋았다’는 지점을 부각하려 했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독재와는 별개로 경제는 잘 운영했다’는 프레임에 대해서도 여전히 논란이 남는다. 저유가·저달러·저금리로 대표되는 ‘3저 호황’이 맞물렸을 뿐이라는 평가부터 집권 초반 정부 재정을 과도하게 긴축한 덕분에 물가를 잡았다는 분석까지 다양한 해석이 뒤따른다.

11월25일 전두환씨 빈소가 마련된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5공 피해자 11개 시민단체’ 회원들이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정희 독재가 국가가 주도하는 산업화의 시간이었다면, 전두환 독재가 펼쳐진 1980년대부터는 개별 경제주체가 ‘중산층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펼친 시대이기도 했다. 당시 거시경제 환경과 경제정책에 대한 해석이 분분한 가운데, 전두환 독재 당시를 단순히 미화하기란 어렵다.

결국 전두환의 죽음을 두고 벌어진 일련의 논쟁은 1980년대를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돌아보길 요구하고 있다. 전두환이라는 인물을 5·18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과 언론 탄압, 각종 고문과 검열의 시대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적어도 이 시점, 대중은 전두환이라는 인물에 대해 엄혹한 독재를 떠올리며 ‘반성하지 않은 독재자’였음을 상기한다.

정치권의 ‘거리두기’가 한창인 가운데, 5월 단체들은 11월25일 전두환씨의 빈소 앞에서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한다. “우리는 지난 41년간 그 어디에서도 전두환에게 사과 비슷한 것도 받아본 적이 없다. 아직도 전두환 추종자 무리들은 1997년 대법원으로부터 유죄 확정판결을 받고도 일말의 공식적 사과 발언도 없다. 오히려 그들은 또 다른 수구세력을 부추겨 지난 41년간 5·18과 5공 피해자들에 대한 왜곡 폄훼 세력의 뒷배로 작용해왔다.”

여전히 전두환이라는 시절을 미화하려는 시도가 잔존해 있고, 이를 가장 적극적으로 내세운 대선후보가 정치의 최전선에서 ‘입장 번복’을 반복했다. 전두환씨가 숨진 시점이 ‘대선을 앞둔 상황이 아니었다면, 과연 어땠을까’를 돌이켜보게 만든다. 현 시점 정치권은 ‘거리두기’를 통해 그들(왜곡 폄훼 세력)에게 정치적 공간을 내어주지 않고 있지만, 전두환 조문 거부라는 ‘최소한의 상식선’은 지속적으로 도전받을 가능성이 크다.

기자명 김동인 기자 다른기사 보기 astori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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