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은 최근 〈시절의 독서〉라는 책을 펴냈다. 2016년에 출판한 〈김영란의 책 읽기의 쓸모〉에 이어 두 번째 독서 에세이다.ⓒ시사IN 조남진

‘김영란’은 이제 보통명사다.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라는 긴 이름의 법을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은 없어도, ‘김영란법’이라고 하면 모두가 안다. 2015년 대가성 없는 금품 수수도 처벌하는 법이 만들어졌다. 이전까지만 해도 변호사로부터 ‘사랑의 정표’로 벤츠를 받은 검사는 처벌할 수 없었다. 인식 전환을 가져온 법에 당시 국민권익위원장이던 제안자 김영란의 이름이 붙었다.

김영란법 이전에는 그에게 ‘최초 여성 대법관’이라는 수식어가 주로 따라다녔다. 김영란 당시 대전고등법원 부장판사가 대법관으로 임명된 시기는 2004년이다. 1948년 제헌헌법이 공포된 이후 56년 만에 여성 대법관이 나온 것이었다. 40대에 대법관으로 제청된 그는 당시 기수 파괴의 상징이기도 했다. 2010년 임기를 마칠 때까지 김영란 대법관은 박시환·김지형·이홍훈·전수안 대법관과 함께 ‘독수리 오형제’로 불렸다. ‘서오남(서울대·50대·남성)’ 위주의 대법원 순혈주의에 변화를 가져온 이들은 다양한 소수의견을 내놓았다.

“독수리 오형제는 지구를 지켜야 하는데, 대법원 전원합의체 구성상 전체 13명 중 5명으로는 지구를 못 지킨다는 농담만 했다”라며 그는 대법관 시절을 회고했다. 6년 재임하는 동안 김영란 대법관은 18건 소수의견에 가담했고 그중 판결문 7건을 썼다.

제사 주재자를 어떻게 결정하는지에 대한 200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대표적이다. 당시 대법원은 ‘공동 상속인들 사이 협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장남이 제사를 주재한다’고 판단했다. 장남이 없으면 장손, 아들이 없으면 장녀가 제사 주재자가 된다는 다수의견에 ‘독수리 오형제’가 반기를 들었다.

‘협의가 되지 않을 때 왜 아들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하느냐’는 소수의견을 남겼다. 당시 대법원에서는 소수의견이었지만, 이후 한국 사회가 흘러온 방향을 보면 그들의 논리는 소수의견으로만 머물지 않았다. “비록 지금은 다수의견이 되지 않지만 사회 변화와 궤를 같이하는 의견이어서 머지않아 법률 해석의 변화가 예견되는 소수의견이 있다(〈판결을 다시 생각한다〉)”라는 김영란 전 대법관의 설명처럼, 그들이 남긴 소수의견은 사회 변화의 물꼬를 트기도 했다.

대법관과 국민권익위원장을 수행한 후 그는 학교로 갔다. ‘전관 변호사’의 길을 걷지 않고 강의를 했다. 서강대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에서 9년간 석좌교수를 지냈고 지금은 아주대 로스쿨에서 같은 역할을 맡고 있다. 2019년부터 양형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다시 공직에 몸담게 되었지만, 현재 김영란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은 ‘읽는 인간’이다. 법관, 교수, 국민권익위원장, 양형위원장 등을 맡았지만 김영란의 인생 전체를 아우르는 ‘본캐’는 독서가다.

독서는 평생의 습관이었다. 살면서 유일하게 계속한 일은 책 읽기뿐이라고 말할 정도다. 여행을 갈 때 가장 신중한 결정은 ‘책 고르기’다. 무엇을 먹고, 어디를 가고, 어떤 옷을 챙겨 갈지가 아니다. 어떤 책이 이번 여행에 적합한지를 고민한다. 가져간 책을 여행 중간에 다 읽어버리면 곤란하니, 여러 변수를 종합적으로 고려한다. 꼼짝없이 독서만 할 수 있는 비행기 안에서는 가장 어려운 책을 골라 읽는다. 우연히 집어든 책에서 색다른 재미를 발견하거나 지평의 확대를 경험할 때가 있어, 다양한 분야의 책을 보는 편이다. 독서가 길러준 상상력은 다른 사람의 삶과 세계를 가늠해보고 공감할 수 있게 해줬다. 거꾸로 그 상상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도 있었다. 성실한 독서의 기록 중 일부를 모아 최근 〈시절의 독서〉라는 책을 펴냈다. 2016년 출판한 〈김영란의 책 읽기의 쓸모〉에 이어 두 번째 독서 에세이다.

1956년생인 그는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집에 텔레비전이 없었다. 1남4녀 중 셋째 딸인 그를 언니들이 놀이에 끼워주지 않았다. 어리다는 이유에서였다.

자연스레 집에서 책만 봤다. 친구 집에 놀러가서도 책꽂이를 구경했다. 남의 취향을 살피는 것이 왠지 나쁘게 느껴졌지만, 궁금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 시절 가장 재미난 놀이가 독서였다. “취미가 독서라는 사람은 여럿 봤는데, ‘진짜 취미’가 독서인 사람은 처음 봤다”라고 결혼 후 남편 강지원 변호사가 말할 정도였다.

집안 곳곳에 책을 두고 짬나는 대로 읽다

법조인 김영란(오른쪽에서 네 번째)은 2004년부터 2010년까지 대법관으로 일했다. ⓒ연합뉴스

정신없던 법관 시절에도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책을 펼쳤다. 여기저기 책을 두고 상황에 맞는 책을 읽는 버릇은 그때부터 생겼다. 바쁜 일상 속에서 판사, 엄마, 아내, 며느리, 딸 등의 역할 수행을 한꺼번에 요구받은 그는 부엌, 식탁, 텔레비전, 침대 등에 책을 두고 짬이 나는 대로 봤다. 그렇게 읽어낸 책 중에서 작가 루이자 메이 올컷, 브론테 자매들, 버지니아 울프, 도리스 레싱, 마거릿 애트우드, 프란츠 카프카, 밀란 쿤데라, 커트 보니것, 안데르센의 작품을 골라 〈시절의 독서〉에 담았다. 해당 책을 중심에 두고 풀어내되 개인사를 조금씩 곁들였다.

1919년생 도리스 레싱은 결혼과 출산 후 아이들을 돌보기보다는 취업해 독립했다. 일생 동안 글을 쓰면서도 동시에 모성의 신화와 싸워야 했다. 그런 도리스 레싱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한국 첫 여성 대법관’의 서사가 겹쳐 보인다. “도리스의 삶은 노벨문학상까지 받는 영광을 누린 것과 상관없이 집안의 천사와 전문직으로서의 완벽함을 모두 요구당하는 여성들에게 연민을 자아내는 삶이다. 이 또한 도리스가 선택해 나갔던 삶의 결과라고 하면 그만이겠지만 그녀가 바꿀 수 없는 이런저런 제도적·문화적·전통적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그 한계 내에서 선택을 마주할 때마다 그녀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으리라 믿기에 그녀의 삶이 더욱 슬프게 다가온다(〈시절의 독서〉).”

그는 1981년부터 판사로 일했다. 사무실로 걸려오는 전화 속 상대방은 수신자가 여자면 다짜고짜 반말을 했다. 그때마다 항의했지만 사과를 받은 적은 거의 없다. 법정에서도 재판진행권을 침해당하기도 했다. 출산휴가는 한 달도 채우지 못하고 출근해야 했다. “여성이 늘어나는 직종의 사회적 평가가 급격히 낮아지는데 판사도 마찬가지다”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여자 판사 앞에서 하는 남자 판사도 있었다.

“법률가로서 교육을 받으면서도 기본적 인권이 보장되면 여성의 인권은 당연히 보장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여성 인권의 특수성을 따로 공부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그 후 전문직 여성으로서의 삶과,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주부로서 살아가는 삶을 병행하면서 비로소 여성 인권의 문제가 실감나게 다가왔다(〈시절의 독서〉).”

카프카와 쿤데라의 저서를 읽으면서는 법률가로 살아온 시절을 반추했다. 쿤데라는 〈농담〉에서 위계질서와 상호감시를 기반으로 하는 ‘농담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를 그렸다. 여자 친구에게 보내는 엽서에 쓴 농담 한마디로 삶이 뒤흔들려버린 루드빅의 이야기다. 카프카의 〈성〉에는 성(城)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주인공 K가 나온다. 이 소설에서 성은 위계질서의 상징이다.

“나는 30년 가까이 직업적인 법률가로 살아오면서 〈성〉이 관료주의가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세계의 암울한 예측이라는 해석에 점점 더 공감하게 되었다. 법률가인 내 경우만 보더라도 가장 많이 한 일은 법해석학이었다. 구체적인 사건에 적용될 법률을 찾아서 그 사건이 그 법률에 포섭되는지를 판단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내 앞에 놓인 미로는, 또는 내가 서 있던 법의 문은 이미 만들어진 법의, 이미 이루어진 해석을 찾아가기 위한 문이었을 뿐이다. 그 해석이 여러 갈래의 길로 주어질 때 그중 어느 길을 선택하여 나아갈지 결정하는 정도가 나에게 주어진 조그만 자유였다(〈시절의 독서〉).”

최고 법관 자리에 있었던 그의 고백은 ‘법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법이 처한 현실일까, 사려 깊고 겸손한 법관의 성찰일까. 그는 1993년부터 5년간 지냈던 대법원 재판연구관 경험을 말했다. 대법관 업무를 보조하며 다양한 보고서를 썼다. 1·2심에서는 보기 힘든 일이 대법원에서는 수시로 일어났다. 사실심인 1·2심과 법률심인 대법원의 세계는 완전히 달랐다. 대법관의 추가 지시에 따라, 정반대의 논리를 전개하는 보고서가 얼마든지 만들어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앞선 10여 년 판사 생활을 하며 그는 ‘사건에는 정답이 있고 판결은 선택이 아니다’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대법원에서 판결은 선택이었다. “이렇게 선택하면 이렇게 해석되는 거고, 저렇게 선택하면 저렇게 해석된다. 이걸 두고 대법관들이 무엇을 선택하는 게 최선인지 치열하게 토론해서 합의해 결과를 내놓았다.”

‘김영란’이라는 렌즈로 읽는 명작

그에 따른 충격과 두려움이 컸다. 이후 대법관으로 재직할 때도 두려움이 줄어들지 않았다고 한다. 김영란은 카프카의 작품을 떠올렸다. “카프카가 하고 싶었던 건 (체제에) 조그마한 창문을 내는 거였다. 법 해석도 창문을 어떻게 낼 것인가 고민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법은 불변이 아니다. “한때 신이 정한 법, 절대왕권이 정한 법, 자연법이 사람 사는 사회와 별개의 이상적 규율체계라 생각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법은 더는 사람들이 닿지 않는 곳에서 온 어떤 것이 아니다. 법은 입법기관이나 사법기관의 전유물이 아니다. 법을 공부하고 이해하는 것은 국민이 진정한 주인으로 살기 위한 것이다(〈김영란의 열린 법 이야기〉).”

‘김영란’이라는 렌즈로 읽는 명작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마무리를 한다. “나는 책에서 세상과 싸울 무기를 구하기보다는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세상을 납득해보려는 도구를 찾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삶을 지탱해주는 것이 가끔은 무기였을지라도 대부분은 도구였기 때문이다. 책 읽기가 때로는 사유의 샘을 깨우는 폭포수일 수도 있지만, 삶의 각 페이지를 어렵게 넘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까운 친구가 되어주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책 읽기의 쓸모가 여러 가지라는 생각을 해본다(〈시절의 독서〉).” 그러므로 김영란은 오늘도 읽는다.

기자명 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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