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9일 PC방에서 한 유저가 〈디아블로2 레저렉션〉 게임을 하고 있다.ⓒ시사IN 조남진

밤 10시가 되자 어김없이 ‘접속’이 끊어졌다. 재접속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디아블로2 레저렉션(D2R)〉 실행파일을 더블클릭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들어가자 이미 난장판이 벌어져 있었다. 전날에도 같은 일이 일어났고, 새벽 3시나 돼서 서버가 복구됐다는 글이 보였다. 헛웃음을 지으며 컴퓨터 전원을 껐다. 몬스터를 잡아 획득한 고가의 아이템을 떠올리자 조금 위안이 됐다. 그러나 다음 날 저녁 다시 게임에 접속해 ‘가방’을 보자 헛웃음이 나오는 대신 이가 갈렸다. 몇 시간 동안 획득한 아이템은 온데간데없었고 힘들여 올린 레벨도 도로 줄어 있었다. 서버 오류 때문에 전날 한 ‘노동’이 통째 증발한 것이다. 같은 일을 겪은 사람들은 온라인 커뮤니티에 ‘블리자드사의 만행에 대해 고발합니다’라는 국민청원 게시물 링크를 뿌렸다. 블리자드엔터테인먼트(블리자드)는 〈D2R〉 개발사이다. 일개 게임사의 부실한 서버 관리를 대통령에게 고발하는 이 비논리적 청원에, 기자를 포함한 1만5000여 명이 동의했다.

〈D2R〉은 지난 9월24일 나온 온라인게임이다. 야만용사, 원소술사 등 7개 직업을 선택해 최대 8명이 함께 플레이할 수 있다. 주요 콘텐츠는 몬스터 사냥이다. 죽은 몬스터는 전리품(아이템)을 떨어트리는데 어떤 아이템이 떨어질지는 알 수 없다. 더 좋은 아이템을 캐릭터에 채우고, 더 빠른 속도로 몬스터를 잡아 죽이는 ‘선순환’이 게이머들의 목표다. 좋은 아이템을 떨어트린다고 알려진 특정 몬스터를 반복적으로 사냥하는 과정을 ‘앵벌이(또는 앵벌)’라고 한다. 정확한 어원은 알 수 없다. 수 시간 동안 같은 일을 반복해도 좀처럼 고급 아이템이 나오지 않는 절망감에서 나온 용어라고 짐작할 따름이다. 〈D2R〉 플레이어 대부분은 앵벌이를 하며 게임 시간을 보낸다.

〈D2R〉은 2000년 출시한 〈디아블로2〉를 ‘리마스터’한 게임이다. 게임 방식은 20년 전 그대로 유지하되 그래픽을 개선하고 편의성 요소를 일부 추가했다. 〈디아블로2〉는 2000년대 초 전 세계를 술렁이게 한 작품이다. 특히 한국에서 인기가 높았다. 출시 1년4개월 만에 국내에서 200만 장 이상이 팔렸다. 오랫동안 국민 게임 자리를 지키며 ‘민속놀이’라는 별칭까지 얻었던 〈스타크래프트〉가 출시 후 3년이 지나서야 달성한 기록이다. 2000년대 초중반 전국 PC방 계산대에는 하나같이 파란색 〈스타크래프트〉 CD 상자와 빨간색 〈디아블로2〉 CD 상자를 수십 개씩 비치해놓았다. 〈스타크래프트〉와 〈디아블로2〉, 추후 내놓은 〈워크래프트3〉(2002),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2004)까지, 내놓는 작품마다 홈런을 터트린 블리자드는 세계 게임계를 주름잡는 공룡으로 군림해왔다.

하지만 그런 블리자드의 위세도 권불십년이었다. 후속작 성과는 나쁘지 않았다. 〈스타크래프트2〉와 〈디아블로3〉 모두 세계적으로 준수한 판매고를 올렸다. 그러나 후발주자 라이엇사가 개발한 〈리그 오브 레전드(LOL)〉(2009)가 인기몰이를 하며 게임계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e스포츠’가 가장 활발한 종목도 〈LOL〉이다. 스마트폰이 보급되자 PC 게임 대신 ‘라이트한’ 휴대전화 게임에 빠지는 이들도 늘어갔다. 블리자드는 〈디아블로 이모탈〉이라는 이름으로 ‘모바일 기기용 〈디아블로〉’ 개발 계획을 발표했으나, 기존 게임 형식을 선호하던 팬들은 ‘어울리지 않는 옷’이라고 혹평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 7월에는 내부의 성추문도 드러났다. 사내의 성적 괴롭힘 때문에 여직원이 자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한 남직원이 수유실에 난입해 여직원을 내쫓았다는 증언도 나왔다. 인사팀에 이런 부조리를 보고한 사람은 강제로 부서 이동되는 등 보복을 당했다. 회사 수뇌부가 이를 묵인했다는 논란도 나온다. 블리자드는 사안에 대해 사과하고 관련자들을 내보냈다. 〈D2R〉은 내우외환에 처한 블리자드가 내놓은 전가의 보도인 셈이다.

〈D2R〉이 10월 PC방 사용시간 점유율 2위

출시 한 달여 된 시점을 기준으로 〈D2R〉은 성공을 거두고 있는 듯하다. 신작 효과를 감안하더라도 접속자 수가 많다. PC방 리서치 업체 ‘게임트릭스’에 따르면 〈D2R〉의 10월 PC방 사용시간 점유율은 8.38%로 모든 게임 가운데 2위이다. 수위인 〈LOL〉의 아성을 위협할 정도는 못 되지만 〈D2R〉과 같은 RPG(Role-Playing Game, 역할 수행 게임) 장르 가운데에는 1위이다. RPG 중 PC방 점유율 2위인 〈로스트아크〉(4.67%)를 제외하면 대부분 점유율 1% 안팎에 머물러 있다. 게다가 〈D2R〉의 ‘실제 인기’는 PC방 점유율 이상일 가능성이 높다. 모순되게도 이는 현재 〈D2R〉이 가장 크게 비난받고 있는 지점에서 미루어 알 수 있다. 불안정한 서버 문제이다. 밤 시간대에 접속자가 너무 많아서 서버가 터져나가는 것이다.

2019년 7월5일 서울 장충아레나에서 열린 지역 대항 국제대회 ‘리프트 라이벌즈’.ⓒ연합뉴스

10월 중순까지 〈D2R〉 서버는 자주 먹통이 됐다. 특히 밤 10시 전후가 문제였다. 이용자들은 서버가 다운될 때마다 ‘약속의 10시가 됐다’며 빈정댔다. 20년 전 〈디아블로2〉를 즐겼고 이제는 30~40대가 된 이들이 특히 아우성쳤다. “퇴근하고 애들 재운 뒤에 게임 좀 하려고 켜보니” 접속이 안 된다는 것이다.

블리자드는 이런 일에 대해 “예상치 못한 큰 규모의 접속량 증가(특히 한국 지역)로 인해 전 지역 서버 작동 중단이 발생했다. 이 증가량은 그간 저희 서버에서 겪지 못한 수준의 한계치였고, 출시 시점에서조차 발생치 않았던 수치였다”라고 밝혔다. 〈D2R〉은 대기열을 만들었다. 게임 입장 인원을 제한하는 것이다. 그러자 주말 밤 아시아 서버 대기열은 500에서 1000까지 올라갔다. 플레이하려면 3시간 이상 기다려야 했다. 11월 들어 서버 다운 빈도는 줄어들었지만 간헐적으로 접속이 끊기거나 다른 플레이어와 만날 수 없는 등의 문제는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이는 블리자드의 무능함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D2R〉이 개발사도 예상하지 못할 정도의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사실 역시 보여준다.

투덜대면서도 〈D2R〉 대기열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게임업계에서는 대체로 ‘3040 세대’를 지목한다. 20년 전 〈디아블로2〉를 경험한 사람들이 추억에 젖어 접속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추억만으로 〈D2R〉 열풍을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불안정한 서버 상황과 불충분한 개발사 대응,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20년 전과 똑같이 불편한 게임 내 시스템에도 불구하고 이용자들은 접속에 목을 맨다. “대체재가 없다”라고 하소연하는 일군의 마니아들이 있다.

게임의 성취감은 난관에서 나온다. 특유의 규칙을 체득하고, 어려운 임무를 해내는 게 게임의 재미다. 〈테트리스〉를 처음 접한 사람은 우선 ‘가로로 한 줄을 채우면 블록이 깨진다’는 기본 규칙을 익힌다. 이후 블록이 떨어지는 속도가 빨라지면 대응책을 고민한다. 이 과정에서 ‘블록을 ㄱ자보다 ㄴ자 형태로 배치하는 편이 유리하다’ 따위 새 규칙을 익히고 실력 향상을 느끼며 즐거워한다.

그런데 게임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LOL〉은 숙련되려면 시간을 들여야 한다. 진입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으나 숙달되기까지는 노력을 요한다. 다른 사람과 팀을 짜서 승부를 겨루는 게임(PvP, Player versus Player)이기에 초보자에게 가혹한 환경이기도 하다. 승리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팀원들로부터 맹비난을 받는다. 〈디아블로2〉와 유사하게 AI(몬스터, 기계 등)를 잡는 게임(PvE, Player versus Environment)은 대개 돈이 많이 든다. ‘한국형 RPG’라고 불리는 게임 다수는 신규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게임을 무료로 배포하는데, 추가 콘텐츠를 즐기려면 적잖은 돈을 내야 한다. 도박에 가까운 ‘확률형 아이템’이다 보니 막대한 자금을 부어야 하는 탓에 원성을 사는 일도 있다(〈시사IN〉 제708호 ‘당첨 없는 로또, 확률형 아이템의 기만’ 참조).

모바일 게임이 ‘장수’하기 어려운 이유

다른 한편에는 모바일 게임이 있다. 누구나 쉽게 어디서나 즐길 수 있다는 게 강점이다. 하지만 모바일 게임 가운데 장수하는 작품은 찾기 어렵다. 입력 기기의 근본적 한계 때문에 PC 게임보다 단순한 구조이다. 키보드 버튼 수십 개와 마우스의 세밀한 조작으로 성패가 갈리는 게임은 어렵기는 하지만 ‘효능감’이 높다. 휴대전화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모바일 게임은 이 한계를 극복할 수가 없다. 좁은 화면에서 복잡한 조작을 구현하려 한 게임은 이용자를 금방 피로하게 만든다. 그래서 대다수 모바일 RPG 게임은 ‘자동사냥’ 방식을 채택한다. 게임을 켜놓으면 자동으로 몬스터를 죽이고 아이템을 획득하는 것이다. ‘내’가 하는 게 없는 상황에서 아이템만 획득하는 게임이 질리지 않을 리 만무하다.

사실 최근 나오는 RPG 게임들과 비교해 〈D2R〉은 몹시 불친절한 게임이다. 어떤 기술을 써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떤 아이템을 쓰고 버려야 할지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심지어 어떤 직업을 택해야 하는지부터 고비다. 직업 간 형평성이 엉망이던 20년 전 〈디아블로2〉의 시스템을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에 택하는 직업에 따라 게임 난이도가 극과 극으로 갈린다. ‘자유도’가 높은 것도 아니다. 캐릭터가 빠르게 돈을 벌고 강해지는 데까지는 최적의 정답이 정해져 있다. 엉뚱한 기술을 배우거나 중요한 아이템을 상점에 파는 등 선택을 잘못하면 어떤 식으로든 호된 대가를 치른다. 신규 게이머에게는 장애물투성이 게임인 셈이다.

물론 20년 전 〈디아블로2〉에 숙련된 팬덤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 망설임 없이 첫 캐릭터로 원소술사를 택하고, 캐릭터의 에너지가 아니라 생명력에 투자하며, 창고에는 금색 아이템 대신 최하급 보석과 주얼, 룬을 쌓아두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D2R〉은, 팀원들에게 거친 욕을 들어가며 〈LOL〉을 하거나, 군소 RPG 게임에 끝없이 현금을 붓는 것보다 훨씬 매력적 선택지이다. 오늘도 미어터지는 〈D2R〉 아시아 서버 상황은, 이런 사람들의 수가 모두의 예상을 크게 뛰어넘을 정도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기자명 이상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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