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시사IN〉 창간 1주년 기념 특강에서 “성장이 멈췄다, 춤을 추자”라고 말한 김종철 선생(왼쪽)과 이문재 시인. ⓒ시사IN 자료

“교수 월급을 반으로 줄이고 강사 월급을 올려줘야 한다.” “와~” 하고 박수가 터져 나왔다. 10여 년 전, 내가 몸담고 있는 대학에서 교양교육 혁신을 준비하면서 김종철(1947~2020) 선생을 초청해 세미나를 연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선생은 위와 같이 말하면서 그리니치 천문대 이야기를 덧붙였다.

덴마크 여왕이 별에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여왕이 영국을 방문한 길에 그리니치 천문대를 찾았는데, 천문대에서 근무하는 과학자들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여왕이 천문대장에게 “내가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부탁해서 과학자들 처우를 개선해달라고 하겠소”라고 하자, 천문대장은 손사래를 쳤다. “월급 올려주면 연구 안 합니다.” 게다가 연봉이 오르면 엉뚱한 사람들이 몰려온다는 것이었다.

지난해 6월25일 세상을 떠난 김종철 선생을 생각할 때마다 저 장면이 먼저 떠오른다. 나이 든 교수와 젊은 강사가 모여 앉은 학술회의에서 교수 월급을 깎아서 강사들을 제대로 대우해줘야 한다고 말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선생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른 것은 그르다, 옳은 것은 옳다고 가차 없이 지적했다. 선생의 삶과 사상은 비타협적이었다. 선생이 30년 가까이 한 호도 거르지 않고 발간한 격월간 〈녹색평론〉 또한 다르지 않았다. 선생은 평생 ‘근원적으로 폭력에 기반한’ 근대 산업문명의 역기능을 전방위에서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공생공락의 가난한 사회’, 즉 생태 문명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창했다.

선생은 공적 지식인이자 실천적 사상가였다. 분단 이후 한국 문단에서 선생처럼 근대문명에 정면으로 맞서온 문학인은 찾아보기 어렵다. 내 좁은 소견이지만, 선생처럼 문학의 외연을 문명 전반으로 확대시킨 비평가는 없다. 선생의 폭넓은 사유와 실천의 뿌리는 ‘시의 마음’이었다. 선생의 삶과 사상을 지탱한 시심(詩心)은 낭만주의나 서정성과 거리가 멀다. 선생의 시적 상상력은 민중 전통과 민중 생활에 기반한 비판과 저항정신에서 비롯된다.

소년 김종철은, 4·19와 5·16이라는 격변기 속에 기성세대의 허위의식과 권위주의를 목격하면서도 ‘보통 사람과 다른 것을 섬기는’ 시인이 되고자 했다. 1965년 서울대 영문과에 입학하면서 ‘김종철 문학’의 나침반을 하나 마련한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읽은 것이다. 새장 속에 갇힌 새 한 마리, 주인집 문 앞에서 굶어 죽어가는 개 한 마리가 제국의 멸망을 예고한다는 블레이크의 시를 접하고 충격을 받는다. 이후 블레이크의 ‘벌거벗은 정직성’, 민중에 대한 친화력, 그리고 예언자 정신에 사로잡힌다. 선생에 따르면,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말하는 것에서 예언이 나온다. 선생은 시인의 “정직함이 바로 위대함”이라고 자신의 첫 평론집 〈시와 역사적 상상력〉(1978)에 못 박고 있다.

블레이크의 시에서 “억압적 부르주아 체제에 대하여 가장 근본적인 비판에 도달한 근대 최초의 지식인이자 사상가”의 풍모를 발견한 선생은 프란츠 파농의 제3세계(탈식민) 문학론과 1930년대 한국문학에서 ‘문학의 미래’를 발굴한다. 다름 아닌 민중문화의 전통과 실감을 계승 발전시키는 것. 선생은 백석·육사·용악의 시에서, 그리고 분단 이후 신동엽과 김수영의 시에서 ‘시의 큰마음’을 찾아내고 이를 ‘땅(農)의 문화’로 연결시킨다. 선생의 문학과 사상에서 땅(흙, 대지)은 단순한 메타포가 아니다. 농(農)의 문화는 선생의 비판적 상상력의 거점이자 실천의 현장이고 대안의 발판이다.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선생은 1983년 미국 대학에 잠시 체류하면서 블레이크 이후 새로운 ‘지도’와 만난다. 그간 막연하게 인식하고 있던 에콜로지와 정식으로 마주한 것이다. 1980년대 후반 동구권이 몰락하자 국내 진보 진영은 무기력증에 빠졌다. 마르크스주의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었다. 모스크바도 워싱턴과 다르지 않게 생산력 제일주의를 내세우며 인간과 지구를 착취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 문학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망령에 휘둘려 지적 허무주의를 ‘진리’처럼 떠받들고 있었다. 선생은 더 이상 기존 진보세력이나 ‘현실이 없는’ 문학에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문학은 망한 것이었다. 선생은 새로운 문학, 더 큰 문학을 하기 위해 결단을 내린다. 1991년 격월간 〈녹색평론〉을 창간한 것이다.

선생의 ‘농적(農的) 가치’ 옹호는 거의 신앙에 가깝다. ‘농의 세계’는 “인간이 늘 자신보다도 더 큰 생존의 근원과 테두리를 의식하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이 지상에서 살 수 있게 하는 터전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모든 건강한 지적·윤리적·심미적 사고와 생동의 뿌리를 이루는 종교적 감수성과 덕성이 함양되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선생이 온몸을 바쳐 도달하고자 했던 ‘미래’는 ‘공생공락의 가난한 사회’, 즉 땅에 뿌리박은 지속 가능한 생태사회였다.

선생은 문학비평을 시작하던 1970년대 초,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훌륭한 문학이 주는 가장 큰 효과는 우리로 하여금 세계에 대한 근원적 신뢰감을 회복시켜주는 것이라 믿는다.” 종교와 무관한, 호모 사피엔스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비종교 영성이 곧 세계에 대한 근원적 신뢰감이다. 그리고 이 근원에 대한 신뢰감이야말로 곧 ‘시의 마음’일 것이다. 선생은 마지막까지 겸손하라고 당부했다.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우리가 천지자연 앞에서 겸손해질 때, 인간과 세계가 달리 보일 것이다. 지금, 여기 그 너머가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선생은 2008년 〈시사IN〉 창간 1주년 기념 특강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성장이 멈췄다, 춤을 추자.” 그렇다. 경제성장을 멈추고(지금과 같은 개발과 성장은 불가능하다. 공멸을 재촉할 뿐이다), ‘시의 마음’을 되찾아야 한다. 우리가 근원에 대한 신뢰감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공유할 때, 우리는 서로 손을 잡고 춤추고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난폭한 생산력 제일주의에 빼앗긴 인간성을 되찾고 지구 생태계 또한 지속가능성을 회복할 것이다.

기자명 이문재 (시인·경희대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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