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호(오른쪽)의 요리는 자본이 던진 양념범벅의 음식에 익숙한 이들의 입에는 어색한 맛을 내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에게 끌리었다.

임지호는 자신이 요리한 음식을 먹지 않았다. 손님이 먹을 음식으로 요리를 한 것이니 자신이 먹을 수는 없다고 했다. 요리사라는 직업인이 갖추어야 할 정신 자세를 내게 말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식당 밖에서도 그는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지 않았다. 1996년 그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도 그랬다. 식당에 손님이 없어 나만을 위해 놀이 삼아 별스러운 요리를 했는데 그는 그 음식을 한 점도 입에 넣지 않았다. 별난 요리사라고 여겼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깨닫고 있다. 그는 요리사가 아니었다. 할머니이고 어머니였다. 우리를 먹이던 그이들이었다.

“응응, 많이 먹어.”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없다. 곁에 앉아 나물을 뒤집고 생선살을 발라 밥 위에 올릴 뿐 자신의 입에 음식을 넣지 않는다. 드시라고 하면 “나는 됐다”라고 하신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그랬고, 임지호도 그랬다. 그는 사람들 먹이기에 바빴다. 다 먹이고 나면 그때에야 먹었다. 혼자서 쪼그리고 앉아 먹었다. 라면이 제일 맛있다고 했다. 요리 예술가 임지호가 라면이 제일 맛있다고 했다.

임지호는 10대에 가출을 했다. 생모를 본 적이 없고 양모의 품에서도 오래 있지 못했다. 어머니의 부재는 그에게 운명적 결핍이었다. 임지호는 나이 든 여성 앞에서는 어린아이로 변했다. 그이들과 눈을 맞추고 살갑게 말을 나누었다. 주방에서 하도 사납게 굴어 제자 하나 없는 임지호인데, 그이들 앞에서는 귀염을 받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가 되었다. 가출 이후 식당을 전전하며 배웠던 요리 솜씨를 그이들 앞에서 자랑했다. 음식이 차려지면 마침내 임지호는 자신이 그렇게 그리워하던 어머니가 되었다. “응응, 많이 먹어.” “나는 됐다.”

임지호가 유명해지고 나서도 그의 식당을 찾는 고객은 많지 않았다. 임지호가 유명해진 것은 그러니까 그의 음식에 대한 대중적 평가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 임지호의 요리를 먹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요리사 임지호에게 매료되었다. 임지호가 우리에게 먹였던 것은 음식이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가 임지호를 통해 채웠던 것은 미각적 쾌락이나 위장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어머니의 부재는 임지호만의 일이 아니다.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어머니는 더 이상 전통적 의미의 어머니로 존재할 수가 없게 되었다. 집안일을 하며 직장 일도 하는 어머니가 늘어났다. 자식을 낳아도 예전처럼 어머니가 밤낮으로 보살피지 않게 되었고, 집에서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에 익숙해질 기회가 줄어들었다. 피자, 햄버거, 치킨, 떡볶이 등의 산업사회 음식이 어머니의 음식을 대신했다.

인류는 공동으로 먹을거리를 확보해 함께 먹는 집단을 기본 단위로 하여 생존해왔다. 농업사회에서는 피붙이끼리 자신들의 경작지에서 먹을거리를 생산해  먹었다. 산업화는 노동자 계급을 탄생시켰고, 이들은 경작지가 없어 음식을 사먹게 되었다. 매식(買食)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매식의 시대에는 모든 음식이 자본의 논리에 의해 평가된다. 소비자가 지불한 돈만큼 맛과 질과 서비스가 제공되는지 따지는 일만 남았다. 내가 낸 돈만큼 맛있으면 별 다섯이고, 내가 낸 돈만큼 맛있지 못하면 별 하나가 주어진다. 많이 팔리는 음식이 맛있는 음식이다. 음식을 내는 사람의 마음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사탕발림의 얕은 술수가 판을 친다. 요리에서 마음과 술수는, 예를 들면 이런 차이다. 쓴맛의 나물은 누구든 처음에는 먹어내기가 어렵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사랑하는 자식이 자신의 품을 떠나서도 쓴맛의 나물을 즐길 수 있게 쓴맛을 적절히 살려서 요리를 한다. 자본은 당장에 맛있다는 평가를 들어야 하니 쓴맛을 설탕으로 가려버린다.

임지호는 자연을 가리는 요리법을 쓰지 않았다. 그는 요리사를 “자연을 전달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자연을 꺾어 인공으로 만들 생각이 없었고, 그래서 자본이 던져주었던 양념 범벅의 음식에 익숙한 이들의 입에는 어색한 맛을 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임지호에게 끌리었다. 음식이 아니라 사람에게 끌리었다. 임지호의 마음에 끌리었다. 산업화 이후 우리 시야 저편으로 점점 사라져가는 ‘요리하는 사람의 마음’이 임지호에게 있었다.

‘임지호들’이 늘어날 것이다

임지호는 요리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요리사 스승도 없었다. 주방에서 거친 노동을 하며 혼자 몸으로 요리를 익혔다. 재료 공부는 자연에서 했다. 입에 들어갈 수 있는 자연물은 무엇이든 일단은 집어넣어 맛을 보았다. 돌 맛과 염소 똥 맛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가르쳤다. 그에게 천재의 기운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요리는 똑똑한 머리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항상 물에 불어 있는 손과 칼질로 단련된 그의 어깨가 이를 증명했다. “밤낮없이 몰아의 지경에서 요리만 해대었더니 문득 요리의 세상이 열리었다”라는, 작두 탄 무당이나 할 만한 그의 말을 나는 믿는다. 자신을 끝장내듯 몰아쳐본 사람들은 이 경지를 안다. 열리면, 그다음은 노는 일밖에 없다. 그에게 주방은 놀이터였다. 먹일 사람이 있으니 더 신이 났다. 임지호는 신명나게 놀다가 갔다. 더 놀아도 되는데, 갔다. 라면 정도는 내가 끓여줄 수도 있는데, 일찍 가버렸다.

임지호는 요리학교를 세우고 싶어 했다. 그 돈을 모으겠다고, 어울리지도 않게, 청담동에 고가의 음식을 내는 식당을 차리기도 했다. 어느 봄날에 식당 마당에 앉아 흘러가는 구름을 올려다보며 이런 말을 주고받았다.

“누가 임지호 밑에서 요리를 배우겠다고 오겠어요? 식당 경영을 모르잖아요. 재료 원가를 계산하면서 음식 내는 거 아니잖아요. 임지호니까 이나마 버티지 다른 사람이 임지호처럼 놀았다가는 바로 망해요.”

“그러니까 내가 요리학교를 하자는 거지요. 다들 돈 되는 요리법만 가르치잖아요. 요리하는 사람의 마음을 가르치는 학교가 필요해요.”

자본의 논리에 충실한 음식만 먹고 살아도 되기는 하지만, 일생이 그래서는 너무 심심하지 않겠는가. 임지호는 갔어도 임지호의 생각은 남았다. 임지호의 생각이 학교이다. 임지호는 그 존재만으로 이미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임지호들’이 늘어날 것이다. 음식에 마음을 담아내는 요리사를 만나면 나는 임지호의 말을 입에 올려서 요리사에게 경의를 표할 것이다. “임지호는 순수한 맛은 순수한 마음과 통한다고 했지요. 잊었던 제 순수를 찾아주어서 고맙습니다.”

기자명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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