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나리〉의 순자 역으로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국 배우 최초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 ⓒAP Photo

윤여정만큼 ‘독보적’이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배우가 또 있을까. 어떤 배역이든 ‘전형성’에 갇히지 않는 연기, 70대에 맥주·의류 광고를 찍을 정도의 트렌디한 감각, 관습에 순응하지 않는 캐릭터, 영화와 TV 드라마와 예능을 넘나드는 활발한 커리어 등 어느 것 하나 뒤처지는 분야가 없다. 제9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조연상 수상은 이 같은 독보적 행보의 정점이다. 그의 수상은 ‘한국 영화사의 쾌거가 아닌 개인의 승리’라는 봉준호 감독의 인상적 논평 역시 같은 맥락 안에 있다. 봉준호의 말을 좀 더 인용하면, 어떤 작품이든지 “성실하고 늘 아름답게 연기해왔”던 배우 윤여정은 끝없이 진화하며 독보적인 위치를 굳혀가는 중이다.

독보적 배우의 영화 속 여정

그럼에도 윤여정의 인생 여정 위로 특정한 이름들이 떠오르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예컨대 윤여정이 오스카 수상 소감에서도 언급한 “인생 첫 감독” 김기영이 있다. 한국 영화사에서 또 한 명의 ‘독보적’인 캐릭터 김기영과 윤여정의 첫 만남은 그야말로 강렬했다. 윤여정은 영화 데뷔작 〈화녀〉에서 광기 어린 팜므파탈과 순진무구한 시골 처녀의 얼굴을 자유자재로 오가면서 가부장적 중산층 세계에 파국을 불러오는 캐릭터로 단번에 그만의 인장을 뚜렷이 새겼다. 이 불온한 문제적 여성의 이미지는 이후 영화 속 윤여정의 모습에서 일관되게 이어진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의 일이지만, 윤여정의 배우 경력에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왔다고 평가받는 임상수 감독의 작품 속 모습도 마찬가지다. 노년 여성의 성적 욕망을 과감하게 표현한 〈바람난 가족〉, 젊은 연하남과의 관계를 통해 기존의 성별 위계질서를 전복하는 모습으로 충격을 던져준 〈돈의 맛〉 등 임상수 감독과의 연이은 협업 속에서 윤여정은 독자적이고 개성적인 캐릭터로 중노년 여배우들이 흔히 갇히곤 하는 전형적인 어머니상, 할머니상으로부터 멀리 달아났다.

〈하하하〉 〈다른 나라에서〉 〈자유의 언덕〉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등 네 편이나 작품을 함께한 홍상수 감독, 〈여배우들〉과 〈죽여주는 여자〉에서 함께 한 이재용 감독과의 작업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노년 여성의 성매매 문제를 고발한 2016년 작품 〈죽여주는 여자〉는 70대를 눈앞에 두고도 여전히 도발적이면서 더 깊고 원숙한 연기를 선보일 수 있는, 윤여정의 또 한 번의 진화를 증명한 작품이었다.

ⓒ디자인소프트 제공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제공
ⓒ연합뉴스
배우 윤여정은 1971년 데뷔 이래 각종 영화와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에서 활약해왔다.맨 위부터 그가 출연한 〈화녀〉 〈여배우들〉 〈디어 마이 프렌즈〉 〈죽여주는 여자〉.

연대하는 여성으로서의 드라마 속 여정

더 흥미로운 것은 드라마 경력이다. 영화 경력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덜 조명되지만, 끝없는 진화의 아이콘으로서 윤여정을 설명할 때는 오히려 더 중요하다. 영화 속 그의 캐릭터가 기득권 질서에 균열을 가져오는 예리한 송곳 같은 모습이라면, 드라마 속에서 연기해온 캐릭터는 동시대, 특히 여성들과 좀 더 따뜻하게 교감하는 인물들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특징은 김수현, 노희경 등 여성 작가들과의 협업에서 두드러진다. 이들 드라마 속 윤여정의 캐릭터는 고유한 개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같은 여성들과의 보편적 공감대와 유대를 보여준다.

‘인생 첫 작가’라고 할 만한 김수현과의 협업부터 이야기해보자. 1975년 김수현 작가는 MBC에서 〈여고동창생〉이라는 옴니버스 드라마를 선보였다. 여고 동창생 5명의 이야기가 시점을 달리하며 펼쳐지는 이 작품에서, 윤여정은 남정임·김혜자·김윤경·나문희와 함께 주연급 캐릭터를 맡았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윤여정의 드라마 인물들은 대부분 여성과의 유대 관계가 돋보이는 캐릭터가 되고, 이때 함께 연기한 김혜자·나문희와의 인연은 훗날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로 이어진다.

결혼과 이혼 뒤 배우 경력이 단절되다시피 한 윤여정에게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준 이도 김수현 작가였다. 김수현 작가가 극본을 쓴 충무로 복귀작 〈어미〉(1985)에서 윤여정은 딸을 비참한 비극 속으로 몰아 넣은 범죄자들을 잔혹하게 응징하는 여성을 연기했다. 남성 기득권과 대립하다가 파국을 맞고 만 〈화녀〉의 명자가 한층 강인하게 성장한 듯한 모습으로 특유의 아우라를 되찾은 윤여정은, 김수현 작가의 메가히트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MBC)를 통해 개성파 중년 여성 배우로 안방극장에 다시 안착한다. 드라마 속 윤여정은 보수적인 집안에서 인고의 삶을 사는 김혜자에 비해 수평적인 가정의 모던한 중년 여성으로 그려지지만, 결국에는 가부장제하 중년 기혼 여성의 애환을 환기하는 인물이다.

이후 노희경과의 만남을 통해 윤여정이 연기하는 인물들과 동시대 여성들의 교감은 한층 깊어진다. 가령 1997년작 〈내가 사는 이유〉(MBC)에서 윤여정은 이영애·김현주·강성연 등이 연기하는 밑바닥 여성들의 큰언니 역할이기도 한 술집 마담을 연기했다. 1998년 〈거짓말〉(KBS)에서는 딸 성우(배종옥)와 함께 살아가는 중년의 싱글맘으로 등장한다. 노희경은 이 작품 속에서 배종옥·이성재·유호정·김상중· 추상미 등 젊은 출연진이 이끌어가는 캐릭터들의 서사와 거의 유사한 비중으로 중년 여성의 고독과 사랑을 묘사했다. 윤여정은 엄마이기 전에 외로운 싱글 여성으로서 딸과 공감을 나누는 친구 같은 존재로 그려진다.

이 같은 여성 유대의 서사는 노희경 작가의 2008년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KBS)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극 중에서 윤여정은 자전적 요소가 어느 정도 반영된 오랜 경력의 60대 배우 오민숙 역을 맡았다. 오민숙의 집은 극 중 다른 여성들이 위로와 충전이 필요할 때면 모여드는 공간이다. 톱배우였으나 개인사적 부침으로 구설에 시달리는 40대 윤영(배종옥), 까칠하고 예민해서 더 상처받기 쉬운 30대 작가 서우(김여진), 열정 넘치지만 좌충우돌 성장통을 겪는 20대 드라마 PD 준영(송혜교) 등 각종 편견에 시달리고 고민에 빠진 여성들은 오민숙을 중심으로 세대 초월 유대의 서사를 함께 그려나간다.

이러한 특징은 〈디어 마이 프렌즈〉 (tvN, 2016)에서도 이어진다. 노년이 된 초등학교 동창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에서 윤여정이 연기하는 충남은 결혼제도에 편입되지 않은 채 자유로운 싱글로 살아가는 캐릭터다. 그가 운영하는 카페는 〈그들이 사는 세상〉에 이어 여성들이 연대하고 위로를 나누는 공간으로 묘사된다. 40년 전 김수현 드라마 〈여고동창생〉의 친구였으며 각자의 위치에서 대배우가 된 김혜자·나문희와 함께 다시 한번 같은 작품에서 더 깊은 유대의 이야기를 써가는 윤여정의 연기는 그 자체로 감동적인 진화의 사례다.

윤여정의 담백한 모습은 예능 속에서 더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위는 〈윤스테이〉(tvN) 출연진. ⓒtvN 제공

후배 여성들의 롤모델이 된 예능 속 여정

드라마에서 선보인 여성들과의 유대는 예능에서 한층 더 빛을 발했다. 2010년대 들어 주류가 된 관찰 예능은 유명인들의 진솔한 모습을 자연스럽게 반영한다. 나영석 PD의 말을 인용하면 ‘카메라 밖과 안의 차이가 거의 없는’ 윤여정의 담백한 모습은 예능 속에서 더 큰 공감을 불러왔다. 그의 첫 관찰 예능인 〈꽃보다 누나〉(tvN, 2013)는 다양한 세대의 여성 연기자들이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다. 그중 최연장자인 윤여정은 굳이 맏언니로서 어른 노릇을 하려고 들지 않는데도 김자옥·김희애·이미연 등 후배들에게 존재만으로도 의지가 되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다. “나 역시 67세가 처음”이라며 스스로를 평생 도전하고 성장하는 존재로서 규정하는 모습은 많은 이에게 신선한 깨달음을 주었다. 후속 프로그램인 〈윤식당〉(tvN, 2017~2018)에서도 마찬가지다. 윤여정은 또 다른 후배 정유미와 함께 낯선 업무를 배워가는 여전한 도전자로서 등장한다. 현재 윤여정에 대한 MZ 세대 여성들의 지지는 이처럼 그녀가 드라마·예능 등을 통해 일관되게 보여준 연대와 진화의 메시지에 바탕하고 있다. 본인은 스스로 누군가의 롤모델이 되지 못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이미 새로운 길을 누구보다 앞장서서 걷는 그의 모습 자체가 그 뒤를 따라가는 여성들의 귀감이 된다.

이는 윤여정의 오스카(아카데미상) 행보에서도 알 수 있다. 영화 〈미나리〉는 할머니 순자(윤여정)와 이민 2세대 데이비드(앨런 김)의 관계가 중심이지만, 사실 순자의 힘은 딸인 모니카(한예리)를 향한 교감에서 나온다. 모니카는 그런 순자의 옆에서 차츰 강인함을 되찾는다. 그리하여 〈미나리〉는 메마른 땅을 적실 물을 찾느라 헤매는 남성들 옆에서 조용히 깊은 뿌리를 내리는 여성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 바깥에서도 윤여정은 오스카 시상식 일정 동안 한예리와 내내 동행하면서 여성들 간의 유대를 굳건히 했다.

시대와 불화하면서도 끝내 굴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가는 여성의 이야기는 같은 고민을 통과하는 후대 여성들에게 그 자체로 커다란 힘이 된다. 윤여정의 끝없는 진화의 여정을 지지하는 이유다.

기자명 김선영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