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청기사
로라 스피니 지음, 전병근 옮김, 유유 펴냄

“그들은 군복을 입지도 않았고, 관통상이 있는 것도 아닌 데다, 포위된 전쟁터에서 쓰러진 것도 아니다.”

전쟁에는 승자가 있지만 범유행병에는 패배한 자들만 있을 뿐이다. 무덤이 부족할 정도로 사람이 죽어 나가지만 속수무책이다. 한 세기가 지난 오늘에서야 수수께끼의 실마리나마 잡아볼 뿐이다. 〈죽음의 청기사〉는 1918년 스페인독감을 샅샅이 추적한다. 막대한 사망자 수로 대표되는 통계 뒤에 가려진 인물과 사건의 면면을 솜씨 좋게 펼쳐놓는다. 역사적 사실과 최신 연구 성과까지 더해 차곡차곡 쌓아올린 이야기는 힘이 있다. 스페인독감이 양차 대전 못지않게, 그 이상으로 인류에게 영향을 미쳤음을 증명해나간다. 코로나19라는 긴 터널 끝에는 무엇이 남을까. 스페인독감이라는 ‘선례’가 팬데믹 이후의 삶을 가늠해보게 한다.

 

 

 

 

 

 

 

 

기억의 목소리
허은실 지음, 고현주 사진, 문학동네 펴냄

“그는 맥심 알커피 한 스푼에 설탕 두 스푼, 나는 커피 두 스푼에 설탕 한 스푼.”

원고를 쓰려 앉기 전에 삼배를 했다. “녹슬고 삭고 헐고 해지고 바래고 부서지고 그러나 끝내 살아남아 전하는 이야기”를 잊지 않으려고, 잊지 않고 간직하려고. 시인 허은실은 70여 년 전 일어난 사건을 연옥 할머니, 방자 할머니, 재후 할아버지 등 구체적 이름을 통해 오늘로 불러온다. 그리하여 눈부시게 아름다운 제주의 관광지들이 4·3 당시 집단학살 터라는 것을 우리가 함께 기억할 수는 없겠느냐고 묻는다. 사진작가 고현주는 우리가 누리는 풍경이 ‘피의 대가’라고 말한다. 시인과 사진작가가 먼지 쌓여 닳고 사라져가는 ‘유품’을 기록했다. “오래 들여다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사물의 영혼”까지 담으려 애썼다. 5월2일까지 서울 류가헌에서 동명의 사진전도 열린다.

 

 

 

 

 

 

 

 

머물고 싶은 동네가 뜬다
모종린 지음, 알키 펴냄

“오프라인 시장의 미래는 로컬이다.”

책 제목만 보면 한참 철지난 이야기 같다. 전자기기부터 내일 아침 국거리까지 집으로 모든 것을 배달시키는 시대다. 이른바 ‘오프라인 시장’은 언젠가 사라질 운명처럼 보인다. 팬데믹은 이런 상황을 더욱 가속화했다. 거리의 온갖 매장에는 눈에 띄게 사람이 줄었다. 반면 슬리퍼 차림으로 갈 수 있는 곳을 뜻하는 ‘슬세권’, 직장과 집이 가까워야 한다는 ‘직주근접’ 같은 말이 유행하기도 한다.
저자는 오프라인 비즈니스의 미래가 로컬, 즉 동네에 있다고 말한다. 삶의 질, 개성, 윤리를 중시하는 젊은 세대는 새로운 공간을 원한다. 이런 욕구를 잘 살펴 ‘택배도시에 도전하는 창조적 커뮤니티’를 만들자는 제안이다. 젠트리피케이션 같은 난제에 대해서도 장기적인 해법을 모색한다.

 

 

 

 

 

 

 

 

얼어붙은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김계영·고광식 옮김, 레모 펴냄

“이런 날들 가운데 어떤 하루는 시간이 흘러야만 그 의미가 드러난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아니 에르노는 자서전도 소설도 아닌, 문학과 사회학과 역사학 그 어느 범주에도 포섭되지 않는 ‘강한 지문’을 가진 작가다. 초기작 중 하나인 〈얼어붙은 여자〉는 어린 소녀가 아내와 엄마로 성장하기까지 맞닥뜨려야 하는 무수한 비합리와 차별을 작가 특유의 방식으로 들춰낸다. 수십 년 전, 그것도 프랑스에서 그가 경험한 그 일들은 왜 오늘날에도 현재성을 갖는 걸까. 많이 변했다는 세상은 왜 여전히 특정 성별에게 보이지 않는 억압으로 작동할까. 아니 에르노는 한국 독자들에게 당부를 덧붙인다. “사회가 전통적으로 남성에게 부여한 특권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특권들을 문제 삼고 후대에 넘겨주지 않는 일이야말로 여성의 의무다.”

 

 

 

 

 

 

 

 

꿈꾸는 유령 방과후강사 이야기
김경희 지음, 호밀밭 펴냄

“방과후강사가 무슨 선생님이야. 이 학교 저 학교 다니는 보따리 강사지.”

저자는 16년 차 초등학교 독서논술 방과후강사다. 자신을 포함한 방과후강사들이 학교에서 겪은 일들을 책에 생생하게 담았다. “나는 방과후강사와는 인사 안 틉니다”라며 방과후강사의 인사를 지나치는 교장 선생님이 있었다. 스승의 날에 방과후선생님에게 편지 쓰겠다는 반 학생에게 ‘보따리장수 말고 진짜 선생님에게 편지 쓰라’는 담임선생님도 있었다. 방과후강사들은 학교에서 자신들이 투명하거나 희미한 유령 같은 존재라고 느꼈다.
하지만 교장 선생님이나 정규직 교원들을 비난하고자 쓴 책이 아니다. 저자는 합리적이지 못한 교육행정과 노동 전반에 대한 정책과 철학 부재가 학교 노동자 간 차별과 갈등을 만들어낸 근본적 문제라고 확신한다.

 

 

 

 

 

 

 

 


김홍모 지음, 창비 펴냄

“이 이야기의 끝은 희망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책의 부제는 ‘어느 세월호 생존자 이야기’.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들 수 없는 제목이다. 국가 기능이 마비된 그때, 함께 탑승한 학생들을 구하려 한 생존자의 사연을 다뤘다. 언론은 그를 ‘세월호 의인’이라고 불렀지만 의인의 7년은 영광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람을 더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약을 먹어야 잠을 자고, 불성실한 정부의 해명에 분개해 여러 차례 자해를 했다. 가족들은 고통을 나눠 받았다. 생존자의 절망과 분노, 슬픔을 그림으로 표현해냈다. 7년 전 참사가 ‘지겹다’는 생각이 들거나, 이제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생길 때 들여다보길 권한다. 누구보다 그날을 잊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기자명 시사IN 편집국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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