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고 멋졌던 산양이 “이제는 지팡이 없이는 한 걸음도 걷지 못하는 늙은 산양이 되었”다. 지팡이를 짚은 채 엉거주춤, 선 듯도 하고 앉은 듯도 한 자세의 늙은 산양은 무슨 생각을 할까. 내가 왜 이 지경이 되었냐는 한탄, 젊었을 때 얼마나 좋았던가 하는 회상, 그때는 그렇게 옆에 꼬이던 것들이 이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는 분노…. 온갖 상념이 스쳐갈 것이다. 그러다 지팡이를 떨어뜨리는 날이 늘어가고, 어느 날 문득 “뭐야, 혹시 죽을 날이 가까웠나?” 정신이 번쩍 든다. 이 깨우침의 장면은 압도적이다. 아무리 늙었어도, 아무리 지팡이 없이는 한 걸음도 못 걷는 시든 몸이 됐어도, 죽음의 자각은 그렇게나 충격적이라는 말일 것이다. 언젠가는 죽겠지, 죽는 게 낫겠지, 이 꼴 저 꼴 안 보고 빨리 죽어야지 따위의 으레 하는 한탄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말일 것이다.

젊은 날의 기개가 아직 남아 있는 산양은 “가만히 앉아 죽을 수는 없”다며 분연히 길을 나선다. 커다란 짐을 들고, “죽기 딱 좋은 곳을 찾아” 떠난다고 이웃에게 호언을 남기며. 보란 듯이 살았으니 보란 듯이 죽겠다는 심사일 것이다. 죽으러 갈 때에도 짊어진 커다란 보따리 속에는 뭐가 들었을까? 죽을 때 멋있어 보이도록 꾸밀 어떤 것들? 산양은 “마지막으로 멋지게 달리다 죽”을 들판으로 가지만 거기는 달리는 동물들이 바글바글하다. 멋지게 달리는 게 처음인 듯한 어린 동물도 많다. 산양은 들판을 포기한다. “죽기에 너무 시끄럽”다는 핑계를 대지만 사실은, 들판은 그 튀어나가는 젊은 힘들을 위해 양보해야 하는 곳임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높은 곳에서 홀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죽어야지’ 생각하던 산양은, 마음먹고 오르던 절벽도 오를 힘이 없어 포기한다. 게다가 높아서 돋보이고 우러러보이는 자리는 죽기에 딱 좋은 곳이 아니다. 그렇다면 낮은 곳으로, 시원한 강으로 가자. 그래서 강으로 가보니…. 이 강 장면이 또 가슴을 친다.

어디 산양뿐이겠는가

“강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본 늙은 산양은 잠시도 그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조차도 봐줄 수 없는 자신의 실체를 확인한 자의 충격과 망연함이다. 산양은 죽음을 준비하는 중에야 자기 자신을 마주하는 것이다. 어디 산양뿐이겠는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 늙은 산양은 다음 날 더 먼 곳으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얼핏 돋보이는 죽을 자리 찾기를 여전히 포기하지 않은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산양의 등에 커다란 짐 보따리는 사라지고 없다. 좋았던 젊은 시절 다시 한번 되살려볼 거야, 우러러보이는 자리에서 죽을 거야, 나는 아직 괜찮아 보일 거야, 이런 모든 욕망과 허상을 내려놓고, 자신의 실체를 버리고 돌아온 산양에게 평안이 깃든다. 늘 손에 들려 있던 노란 지팡이가 하늘의 초승달로 떠오른 마지막 장면이 의미심장하다. 죽기 딱 좋은 곳이 어디인지를 그제야 찾아낸 산양에게 축복이 있기를.

기자명 김서정 (동화작가·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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