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하라고 주장해온 이형숙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대표. ⓒ시사IN 이명익

옥살이는 벌써 세 번째였다. 하지만 익숙해지지 않았다. 휠체어 없이 두 팔로 바닥을 기어야만 움직일 수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다. 휠체어는 구치소에 반입 불가다. 같은 방을 쓰는 재소자의 도움 없이는 볼일을 볼 수도, 씻으러 갈 수도 없었다. 일부러 조금만 먹고 하루 종일 꼼짝없이 앉아 있어야 했다. 2.5평(약 8.26㎡) 남짓한 좁은 감옥 안에서도 장애인의 이동권은 보장되지 않았다. 3월20일 오후 7시30분, 이형숙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대표는 불이 꺼진 구치소 내부를 바라보며 체념했다. ‘또 잠이나 자야겠구나.’

이 대표는 장애인 이동권을 위해 시위하다 부과된 벌금을 내지 못해 사흘 전 서울구치소에 들어왔다. 구치소 생활은 장애인 거주시설과 비슷했다. 오전 6시20분에 일어나면 10분 뒤부터 아침식사 배급이 시작됐다. 오전 11시30분에 점심을, 오후 4시에 저녁을 먹었다. “오후 5시가 되면 모든 일정이 딱 끝나야 한다. 5시에 교도관들이 교대하니까.” 시설관리인의 일정에 맞춰 하루가 돌아간다는 점에서 교도소와 장애인 거주시설이 얼마나 닮은꼴인지 곱씹던 그에게 갑자기 교도관이 “나가도 된다”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깜짝 놀랐다. 4440만원에 달하는 벌금이 사흘 만에 모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어리둥절한 채 ‘출소’할 준비를 하면서도 그는 교도관에게 건의하기를 잊지 않았다. “이제는 구치소도 바뀌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우리가 싸워온 20년 동안 저상버스도 생기고 지하철에 엘리베이터도 놓였는데, 구치소는 바뀐 게 하나도 없다.” 이 대표가 처음 구치소에 들어온 건 2015년이었다. 장애인은 탈 수 없는 경기도 이층버스를 점거했다는 이유로 부과된 벌금을 내지 않아서였다. 두 번째로 구치소에 들어온 이유 역시 벌금을 내지 않아서였다. 2017년 장애인 예산 확대를 요구하며 국회에서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당사까지 행진해 벌금형을 받았다. 구치소도 바뀌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이 대표의 말에 2015년에도, 2017년에도 들었던 대답이 2021년에도 똑같이 되풀이됐다. “장애인이 지내려면 공간이 두 배나 필요한데, 지금 상황에서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지금’은 자꾸 미뤄졌다.

구치소를 나오자 동료 활동가들이 반겼다. 함께 노역에 들어갔던 박경석 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 이사장과 권달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도 다시 만났다. 신체를 전혀 움직이지 못해 24시간 활동 보조가 필요한 최용기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은 구치소에 들어간 당일 저녁 노역을 중단하고 나와야 했다. 최용기 회장은 “매번 동료들에게 미안했다. 이번에는 정말 마음 단단히 먹고 구치소에 들어갔는데, 장애인은 노역조차 할 수 없게 하는 사회가 또다시 나를 죄스럽게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이들 4명에게 부과된 벌금 4440만원은 2016년부터 쌓인 액수다. 도로를 점거하지 않고는 세상에 나설 방법이 없는 그들이 집회를 열 때마다 도로교통법 위반, 업무방해 등 각종 죄목이 추가됐다. 주머니 사정 때문에 벌금을 내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센터에서 운영하는 휠체어 리프트 차량에 압류가 들어오자 이 대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이동권을 보장하라’는 외침에 대한 사회의 응답은 이들의 유일한 이동수단을 빼앗는 것이었다.

이형숙 대표는 ‘노역 투쟁’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벌금을 낼 돈도 없었지만 설령 돈이 있다 하더라도 ‘벌금’이라는 명목으로 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 스스로 구치소에 들어가 하루 10만원씩 벌금이 차감되는 노역형을 택했다. 이 대표의 둘째 딸은 장애인 인권 관련 이슈를 다루는 독립언론 〈비마이너〉에 “나의 멋진 엄마가 감옥에 갔다, ‘저항’이라고 했다”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사흘 만에 벌금 4440만원을 훌쩍 뛰어넘는 금액이 모였다.

하지만 벌금은 또 쌓일 전망이다. 이들이 시위에 나서야 할 현실이 바뀌지 않아서다. 구치소를 나온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3월26일 이형숙 대표는 또다시 농성에 나섰다. 원래 기자회견만 열 예정이었지만 상황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오송역에서 세종시청까지 한 번에 가는 ‘B1 버스’에 저상버스를 도입하라는 기자회견이 끝난 뒤였다. 이형숙 대표가 B1 버스 기사에게 “세종시청 가나요?”라고 묻자 기사는 “휠체어 탄 사람은 못 탄다”라고 말했다. 실랑이가 벌어지자 다른 버스들은 승강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비장애인 승객들만 싣고 떠나버렸다. 그 장면을 본 이 대표는 휠체어에서 내려와 버스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버스가 출발하지 못하자 마지못해 내린 한 승객이 버스 밑에서 웅크리고 있는 그를 향해 쏘아붙였다. “야, 너네는 장애인이니까 그렇다 쳐도 왜 우리를 못 가게 막는 거야. 너네랑 우리랑 같아?”

장애인만이 아니라 누구나 누릴 권리

이형숙 대표가 2008년 장애인 인권 활동을 시작한 뒤 숱하게 들었던 말이다. “도와주고 싶다가도 너네가 이러니까 돕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진다”라는 말은 들어도 들어도 매번 상처로 남았다. 상처받으면서도, 진압하던 경찰들의 전투화 사이를 기어 버스에 오르고 지하철을 탔다. 비장애인들은 장애인이 대중교통을 타는 행위를 ‘점거’라고 불렀다.

2021년 올해에만 대대적으로 세 차례나 ‘점거’를 했다. 2015년 서울시가 발표한 ‘장애인 이동권 증진을 위한 서울시 선언’이 무효가 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당시 서울시는 2022년까지 모든 지하철 역사에 1동선 승강기(교통약자가 역 밖으로 나와 횡단보도 등을 건널 필요 없이 내부에서 한 번에 환승이 가능하도록 만든 승강기)를 설치하고, 2025년까지 모든 버스를 저상버스로 운영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올해 관련 예산은 삭감되거나 한 푼도 책정되지 않았다.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둔 4월1일 현재까지도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는 장애 인권 단체들의 정책 질의서에 아무런 답변도 내놓지 않고 있다. 이형숙 대표는 “이대로 있다가는 오이도역 리프트 참사가 일어났던 그때로 후퇴할 것 같았다. 그럴 순 없다는 생각에, 각오하고 올해 들어 한 달에 한 번꼴로 지하철 타기 시위를 열었다”라고 말했다.

2001년 1월22일 설 연휴가 시작되기 하루 전, 서울에 올라온 장애인 노부부가 4호선 오이도역에서 리프트를 이용하다 추락해 숨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본격화되었지만, 저상버스 도입은 여전히 더디다. 2020년 7월 기준, 전국 저상버스 도입률은 28.4%다. 그나마 서울시의 저상버스 도입률(56.4%)이 가장 높지만, 마을버스 중 저상버스는 올해 들어서야 처음으로 두 노선에 도입됐다.

1동선 승강기 사정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1동선 승강기를 확보한 서울 지하철역은 278곳 중 256곳(92.1%)이다. 여전히 위험 요소는 남아 있다. 1동선 승강기가 없는 지하철역에서는 아직도 장애인이 목숨 걸고 리프트를 타야 한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 급히 설치되기 시작한 리프트는 조금이라도 용량이 맞지 않거나 조종을 잘 못하면 추락했다. 장애인차별철폐연대 자료에 따르면, 1999년부터 2019년까지 발생한 리프트 추락 사고는 13건이다. 13명 중 5명이 숨졌고, 나머지는 중상을 입었다. 2009년 국가인권위원회는 휠체어 리프트를 “장애인에게 제공되어야 할 정당한 편의시설로 볼 수 없다”라며 정부가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이형숙 대표는 ‘고작 장애인 몇 명을 위해 엘리베이터를 설치해주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나중에 보면 엘리베이터를 제일 많이 탄다며 웃었다. 계단이 없고 공간이 넓은 저상버스도 마찬가지다. 버스 기사들은 안전사고가 적게 일어나는 저상버스 운행을 선호한다. “우리가 말하는 ‘이동권’은 ‘장애인 이동권’이 아니다. 장애인만이 아니라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여야 한다.” 이형숙 대표가 말했다. 저상버스나 엘리베이터는 누구에게나 편리하고 안전하기에 도입해야 한다는 의미다.

기자명 나경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did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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