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pulationonevr.com‘파퓰레이션:원’ 게임은 전 세계 플레이어와 팀을 이루어 목숨 건 전투를 벌인다.

뇌과학을 통해 감정을 연구하는 미국 노스이스턴 대학의 석좌교수 리사 펠드먼 배럿은 2017년 출간한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서, 감정에 대한 본질주의적 관점, 즉 ‘인간은 날 때부터 감정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기존 통념을 통렬하게 반박한다. 그리고 다양한 실험 결과와 이에 바탕한 논리적 추론을 통해 ‘감정은 사회적으로 학습되는 것’이라는 구성주의적 관점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이는 우리가 특정한 감정에 대한 개념을 먼저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 감정을 느낄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배럿은 우리가 느낄 수 없는 감정의 대표적 예로 ‘리제트(liget)’를 든다. 이 감정은 사람을 사냥하는 부족인 필리핀의 일롱고트족(Ilongot)이 경험하는 열광적 공격성의 느낌이다.

일롱고트족이 경험하는 이 감정에는 다른 집단과의 목숨을 건 경쟁이 주는 긴장된 집중, 열정, 활기 등이 포함되어 있다. 배럿이 보기에 리제트는 단지 하나의 정신상태만은 아니다. 리제트는 어떤 활동을 할 때 느끼고, 리제트를 느끼는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등에 관한 사회적 규칙이 존재한다. 일롱고트족에게 리제트는 행복이나 슬픔만큼이나 실재하는 감정이다. 나는 지난 3개월 동안 매일 밤 이 리제트를 느끼고 있다.

물론 당연히, 내가 매일 밤 진짜 사람을 사냥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일부는 이미 필자가 무엇을 말할지 눈치챘을 것이다. 바로 ‘배틀로얄’이라는 게임 장르를 통해, 그리고 차원이 다른 몰입감을 선사하는 VR(가상현실)이라는 미디어를 통해 이 새로운 감정에 눈을 뜨게 되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매일 밤 VR 기기인 ‘오큘러스 퀘스트 2(Oculus Quest 2)’를 착용하고 ‘파퓰레이션:원(Population: One)’이라는 게임 속으로 들어간다. 전 세계 친구들과 함께 팀을 이뤄 다른 팀과의 목숨을 건 전투를 벌이며 승리하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한다. 하늘을 날고 땅을 달리며 건물을 기어오르고 몸을 돌려 적을 향해 총을 쏘는 10여 분의 전투가 끝나고 나면 손발은 땀으로 젖어 있다. 긴장감과 흥분에 더해 VR의 특징인 신체 움직임 덕분에 지난 10년 동안 도달하지 못했던 ‘이상적 체중’에도 다가가고 있다. 배틀로얄 혹은 VR의 무엇이 사람에게 이토록 강렬한 경험을 선사하는 것일까?

먼저 배틀로얄이라는 장르에 대해 말해야겠다. 많은 이들은 배틀로얄이라는 단어를 밀레니엄의 해에 일본에서 만들어진,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기타노 다케시 주연의 영화로 기억할 것이다. 그 전해 일본에서 출판된 베스트셀러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서 수학여행을 간 중학교 3학년 한 반의 학생들은 최후의 한 명이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 죽여야 한다는 명령을 받는다. 당시 이 영화가 누린 인기의 비결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두려움, 영화 속 설정 밑에 깔린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 등으로 분석할 수 있을 터이다. 2009년,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또한 이 작품을 1992년(타란티노가 감독 생활을 시작한 해) 이후 나온 영화 중 독보적인 1위로 꼽은 바 있다. 어쩌면, 살아남기 위해 옆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단순한 규칙은 이 글의 시작에서 보인 것처럼 인간의 근본적인 내면을 자극하는 것일지 모른다.

이 같은 설정, 즉 최후의 1인이 남을 때까지 싸우는 방식은 몇 년 뒤 게임으로 등장하게 된다. 최초로 게임에 도입된 배틀로얄은 2012년 ‘마인크래프트’의 한 모드(Mod:특정한 설정을 넣어 만든 게임 속 게임을 일컫는다)로 2008년 출간된 헝거게임 시리즈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후 FPS(일인칭 슈팅게임) 기반의 서바이벌 게임인 ‘아르마 2(ARMA 2)’의 모드로도 만들어진다.

그리고 2017년, 우리가 잘 아는 배틀그라운드, 혹은 펍지(PUBG)로 불리는 게임이 출시되면서 배틀로얄은 게임계의 판도를 바꾸는 개념으로 떠오른다. 특히 저명한 게임 디자이너인 브렌던 그린이 펍지에 합류하면서 비로소 고공 낙하를 통해 자유롭게 선택되는 시작 지점, 게임을 진행함에 따라 점점 좁아지는 안전지대, 가끔씩 공중에서 떨어지는 고급 아이템 등 오늘날 대부분의 배틀로얄 장르가 가진 기본 개념이 완성된다.

ⓒ오큘러스 공식 웹페이지페이스북의 최신 VR 헤드셋인 ‘오큘러스 퀘스트 2’.

동등한 조건, 성장, 플레이어 간 상호작용

배틀로얄이란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수십~수백 명에 달하는 다수의 플레이어가 1인 혹은 2~4인의 팀으로 참여하며, 모두 빈손 혹은 최소한의 장비로 시작하고, 탐험과 아이템 습득 및 대결을 통해 성장하며, 생존 가능 지역이 줄어들기 때문에 10~30분 정도의 짧은 시간 안에 최후의 승자가 결정되는 게임 장르다. 이때 서로 대결하는 방식으로는 현대적 무기를 이용하는 FPS(일인칭 슈팅게임)가 주로 쓰인다.

2017년 3월 출시한 펍지는 출시 13주 만에 매출 1억 달러를 돌파했고 350만 동시 접속자(동접자)라는 기록을 세웠다. 역대 가장 많이 팔린 PC 게임 1위에 올랐다. 이후 수많은 배틀로얄 게임이 등장했고, 그중 가장 인기를 끈 포트나이트는 동접자 1000만명 이상을 돌파하더니 계속해서 새 기록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배틀로얄의 어떤 측면이 이렇게 많은 이들을 몰입하게 만들었을까? 게임 연구자인 유타 대학의 로젤리오 E. 카르도나 리베라는 배틀로얄이 가진 생존, 탐험, 수집 등의 요소가 심리학자 매슬로가 주장한 인간 욕구 5단계를 충족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매슬로의 1·2단계인 생리적 욕구와 안전 욕구가 배틀로얄 게임에서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과정에서 자극되며, 최후의 1인으로 살아남는 과정에서 4·5단계인 존경 욕구와 자아실현 욕구가 충족된다는 것이다. 팀으로 함께 싸우는 경우 3단계인 애정·소속 욕구 또한 충족된다.

배틀로얄의 인기를 진단한 여러 글은 이 밖에도 다양한 요인들을 거론한다. 트위치와 유튜브로 대표되는, 과거 직접적 참여의 대상이었던 게임이 인터넷을 통해 관람의 대상이 된 문화적 변화 또한 언급된다. 단 한 명의 승자만이 남을 수 있는, 어떻게 보면 대부분이 패배자가 되기 쉬운 이 장르에서 뛰어난 실력을 가진 유명 유튜버를 감상하면서 마치 스타 스포츠 선수의 플레이에 감탄하는 것과 같은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다는 얘기다.

나는 몇 가지 요소를 더 언급하고 싶다. 우선 가장 먼저 꼽고 싶은 요소는 모두가 동등한 조건으로 시작한다는 점이다. 굳이 ‘공정’이란 단어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다른 많은 게임에서 고질적인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초보와 속칭 ‘고인물’ 사이에 존재하는 출발선의 차이가 배틀로얄 장르에는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순수한 실력 차이에 의해 승부가 결정된다는 것이 배틀로얄이 가진 장점일 터이다.

두 번째는 다른 많은 게임 장르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고려되는 ‘성장’이라는 요소다. 빈손으로 시작한 플레이어는 짧은 한 판 내에서도 다양한 아이템을 스스로 줍거나 적과 싸워 빼앗으면서 점점 더 강해진다. 살아남은 다른 플레이어와 싸우기 때문에 점점 더 강한 적을 만나게 된다. 전형적인 성장형 게임의 구조다. 한편 앞서 순수한 실력 차이가 승부를 가른다고 말했지만 판마다 달라지는 아이템 습득의 운 또한 게임의 향방을 결정한다. 이는 각 게임이 시작될 때마다 플레이어에게 새로운 희망을 줘서 다음 게임을 기대하게 만드는 요소가 된다.

세 번째 요소는 다른 인간(플레이어)과의 상호작용이다. 배틀로얄 장르에서는 아무리 많은 판에 거듭 참가해도 같은 게임은 존재하지 않는다. 게임을 하는 다른 플레이어들 역시 ‘나’와 같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모든 플레이어들은 서로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지난 판의 실수를 복기하고 자신의 오류를 반성하며 더 나은 전략을 선택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에 따라 수백, 수천 판을 치른 플레이어도 새로운 다음 판을 기대하게 되며, 이는 업계의 용어로 ‘리플레이어빌러티(Replayability)’로 불리는 ‘반복성’을 크게 높인다.

특히 팀끼리 싸우는 배틀로얄 게임에서는 다른 팀과 조우하는 각각의 다른 상황 속에서 구성원들에게 각자의 역할이 생겨난다. 예를 들자면, ‘전면에서 싸우는 이’ ‘뒤에서 보조하는 이’ ‘동료를 치료하거나 살리는 이’ 등의 역할이 생겨나며 이때 자신에게 기대되는 역할을 얼마나 잘 수행하는지가 팀의 승리를 결정한다.

이는 자신의 팀이 이길 때 구성원들이 단순한 승리의 기쁨이 아니라 생사를 같이한 전우와 함께 느끼는 또 다른 감정(앞서 이야기한 리제트와 유사한)을 품게 만들어준다.

이런 과정에서 구성원들은 매 순간 ‘죽느냐 죽이느냐’의 긴장감을 갖게 된다. 이 생사를 가르는 긴장감은 VR 환경에서 극대화된다.

영화 〈배틀로얄〉은 ‘최후의 한 명이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 죽인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다.

‘스타크래프트’ 못지않은 충격적 첫인상

VR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의 약자로, 실제 현실이 아닌 모든 가상의 현실 혹은 인간을 그런 가상의 현실로 이끄는 기술을 가리킨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소설·영화·드라마를 즐기면서 주인공을 자신과 동일시하며 그가 처한 상황을 현실처럼 인식하는 경우까지도 일종의 ‘VR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의 상상력 혹은 ‘거울 신경세포(특정 행동을 직접 수행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이 그 행위를 수행하는 것을 관찰할 때 활성화되는 신경세포)’의 무한한 잠재력 덕분일 것이다.

물론 이는 가상현실을 너무 넓게 정의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VR이라 부르는 것은, 인간의 시각과 청각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게 만들어진 첨단 ‘HMD (Head Mount Display) 기술’이다. HMD 장치를 눈에 착용하면 얼굴의 방향에 따라 적절한 시각적 정보를 제공받게 된다. 이로써 HMD 착용자는 전혀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느낌을 받는다. 이에 더해 착용자가 컨트롤러라 불리는 조작 기기를 양손에 쥐면 가상 세계 속에서 자신의 신체를 움직일 수 있다. 그 가상의 세계와 착용자의 상호작용도 가능해진다.

오늘날 HMD 기반 VR의 가장 큰 특징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시각과 청각의 완벽한 장악을 통해 착용자가 새로운 가상현실에 충분히 몰입하게 만든다. 둘째, 그 가상현실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신체를 실제 세상과 비슷하게 활용할 수 있게 함으로써 한층 더 높은 몰입감을 만든다.

이런 특징이 VR 기반의 배틀로얄 게임인 ‘파퓰레이션:원’에는 어떻게 구현되었을까. ‘파퓰레이션:원’의 가장 큰 특징은 기존의 2차원에 가까운 PC와 모바일의 전장 대신 3차원을 완벽하게 활용할 수 있는 수직 전투 시스템(Vertical Combat System)을 채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전투 시스템은 기존 2차원 전장에 ‘높이’라는 하나의 차원을 더한 시스템이다. 곧 플레이어는 전장 내에 위치한 모든 건물과 암벽 등의 구조물을 손으로 잡고 오르내리며 이동할 수 있다.

이에 더해 ‘파퓰레이션:원’에서는 등에 윙슈트와 비슷한 기구를 착용해 팔을 벌리는 행동만으로 활강의 형태로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 있다. 이카로스 이래 인간의 오랜 꿈이었던 하늘을 나는 느낌을 ‘파퓰레이션:원’은 매우 현실감 있게 재현한다. 하늘을 나는 상태로 지상의 혹은 다른 하늘을 나는 적과 전투할 수 있으며, 지상의 적에게 수류탄을 투하하는 등의 행동도 가능하다.

그러나 VR이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미디어로서 장점만 가진 것은 아니다. IT 전문 미디어인 〈엔가젯(Engadget)〉이 지난해 10월 ‘파퓰레이션:원’을 다룬 기사는, ‘VR에 배틀로얄이 적용되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기자의 의문으로 시작된다. 그 의문은 VR의 단점이라고 할 수 있는 정보 입력의 낮은 해상도 때문이다. 예컨대 VR에서 이름을 입력하려면 눈앞에 떠 있는 가상의 키보드를 하나하나 손을 움직여 눌러야 한다. PC에서 키보드를 누르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이 느리다. 마우스로 가상의 키보드를 누르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다고 해서 마우스가 키보드에 비해 열등한 입력장치는 아니다. 예를 들어 화면 귀퉁이의 적을 빠르게 조준해야 하는 작업의 경우에는 마우스가 키보드보다 더 유리하다. PC와 VR의 관계도 이와 비슷하다. PC 배틀로얄에서 아이템을 교체하거나 특정한 동작을 취하는 것이 키보드를 통해 빠르게 이루어진다면, VR에서는 이에 해당하는 행동을 하면 된다. 이것은 오히려 장점에 더 가깝다. 탄창을 갈고 몸을 바위 뒤에 숨기며 머리와 팔만 내밀어 적을 쏠 때, VR에서는 이에 해당하는 행동을 그대로 수행하면 된다. 이를 통해 한층 더 높은 몰입감을 맛보게 된다.

즉 VR 플레이어는 자신의 눈과 귀를 통해 적의 위치를 파악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적의 위치에 따른 적절한 무기를 들고 자신의 눈과 손을 통해 적을 조준한다는 점에서, 또 자기 신체의 창조적 움직임을 통해 게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적보다 유리한 지점으로 바꾸어나간다는 점에서 한층 더 강화된 몰입감을 준다. 이 몰입감이 다시 생사가 걸린 긴장감을 끝없이 증폭한다는 점에서 VR은 배틀로얄 장르를 진정으로 완성시키는 미디어가 되는 것이다.

위에 나온 〈엔가젯〉 기사의 첫 댓글은 이러하다. “정말 끝내주는 게임이다. 나는 배틀로얄의 미래는 VR에 있다고 생각한다.” 동의한다. 이 글은 배틀로얄 장르가 가진 흡입력의 비밀과 VR 기술의 특징, 그리고 ‘파퓰레이션:원’이 어떻게 이 둘을 조화시켰는가에 관한 것이다. 즉, ‘배틀로얄 장르의 미래가 VR에 있다’는 것은 이미 진행 중인 사실이다. 지금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 한다.

미디어의 역사를 살펴보면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할 때 그 미디어의 보급을 부채질하는, 해당 미디어에 최적인 콘텐츠가 거의 반드시 존재했다. 그렇다면 배틀로얄 장르, 좀 더 구체적으론 ‘파퓰레이션:원’이 VR 보급의 기폭제가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지난 30년 동안 수많은 게임에 몰입해왔으며 특히 ‘스타크래프트’와 ‘디아블로’ ‘월드오브워크래프트’의 첫인상을 생생히 기억하는 필자 입장에서는, ‘파퓰레이션:원’이 그 게임들에 못지않은, 새로운 감각을 깨우는 충격을 주었다고 말하고 싶다.

기자명 이효석 (뉴스페퍼민트 대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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