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것을 본다고 모두 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 서울에 살면서 아침 저녁으로 오다가다 한강 밤섬을 보는 사람이 아마도 수만명, 아니 수백만명일지 모르는데, 그중 ‘대도시 한복판 무인도 표류기’를 생각해낸 사람은 이해준 감독뿐이다(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 어느 날 강변북로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밤섬을 보았다는 감독이 영화 주간지 〈씨네21〉에 털어놓기를 “만약 누군가 밤섬에 갇혀 있더라도 이렇게 빠른 속도감 속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눈여겨볼 수 없겠구나”라고 생각했단다. 오호라, 뭔가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막연한 아이디어는 정말 뭔가 이야기가 되었다. 겁나게 재미있고 눈물 나게  따뜻한 이야기가….

얘기는 이렇다. 김씨(정재영)가 한강에 빠졌다. 죽고 싶어서다. 그런데 눈떠 보니 밤섬이다. 빚 갚으라고 독촉하는 사람도 없고 가슴에 대못 박는 여자 친구도 없다. 그러니 살 만하다. “그래, 죽는 건 아무 때나 할 수 있다.” 이렇게 마음먹고 나니 불현듯 ‘사는 건 지금밖에 할 수 없겠구나’라고 이상하게 삶의 의지가 솟구친다. 표류 직후 모래사장에 써놓았던 ‘help’를 슬그머니 ‘hello’로 바꿔 쓰고 나서부터 이 남자의 본격적인 무인도 정착 생활이 시작된다.

한편, 강 건너 아파트에도 김씨(정려원)가 산다.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히키코모리, 일명 은둔형 외톨이. 죽지 못해 사는 이 여자가 망원렌즈로 달 사진을 찍으려다 우연히 밤섬의 김씨를 발견한다. 모래사장에 새겨넣은 ‘hello’에 답하기 위해 3년 만에 처음 집 밖으로 나온 여자. 급기야 두 사람은 ‘Hello’에서 ‘How are you?’로, 다시 ‘Who are you?’로 조금씩 긴 문장을 주고받는다. 각자 외롭게 표류하던 두 사람이 그렇게 익명의 친구를 사귄다.

이해준 감독은 종종 인척 관계로 오해받는 이해영 감독과 함께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2006)를 만들었다. 〈김씨 표류기〉는 〈천하장사 마돈나〉보다 딱 1.5배 따뜻한 영화다. 〈천하장사 마돈나〉보다 딱 2.5배 더 웃기는 영화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천하장사 마돈나〉보다 딱 3.5배 찡한 영화로 기억될지 모른다.

관객을 행복하게 만든 감독과 배우

감독 혼자 모든 공을 독차지할 영화는 아니다. 물론 ‘밤섬 표류’라는 기발한 착상과 “진화는 곧 맛있어지는 과정이다”라는 따위 기막힌 ‘대사발’이야 직접 시나리오 쓴 감독을 칭찬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촬영 도중 서로 거의 만나는 일 없이 각자 일종의 모노드라마를 펼친 두 배우의 각별한 재능과 만나지 못했다면, 단지 시나리오‘만’ 좋은 영화, 혹은 시나리오‘는’ 좋은 영화로 남았을지 모른다. 우리가 기대한 정재영의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우리가 기대하지 못한 정려원의 어떤 것도 볼 수 있다. 감독에게는 행운이고 관객에게는 행복이다.

“모든 사람은 섬이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영화 〈어바웃 어 보이〉에서 주인공 윌(휴 그랜트)이 말한다. “하지만, 확실히, 어떤 사람들은 군도의 일부분이다. 수면 아래에서 그 섬들은 실제로 연결되어 있다.” 맞다. 우리 모두 점점이 뿌려진 섬이라고 느낄 때가 있다. 자취방에서, 도서관에서, 내 창백한 모니터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이 퇴근하고 없는 한밤 사무실에서…. 마치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한 장면처럼, 아무리 손을 흔들며 구조 요청을 해도 도와주러 올 사람이 없을 것 같은 완벽한 외로움. 하지만, 확실히, 어떤 사람들은 군도의 일부분이라는 걸 〈김씨 표류기〉가 보여준다. 수면 아래로 연결된 섬들끼리 서로 안부를 묻고 마음을 터놓으려는 의지를 격려한다. 각자 자신의 밤섬에서 표류하는 도시의 로빈슨 크루소들에게 꽤 고마운 위로가 되어줄 영화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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