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제공2월17일 서오기전 김성수 대표가 현대중공업 회장 자택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님, 제1호 민원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2월18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중소기업 ㈜서오기전을 운영하는 김성수 대표의 읍소가 올라왔다. 현 정부 들어 두 번째다. “기술개발의 잠재력을 갖고 있는 중소기업들이 대기업의 횡포에 몰락한다면 양질의 고용도, 저출산 문제도 해결될 수 없습니다. 중소 하청업체들이 집 팔고 땅 팔아 대기업들을 도와주고 있는 현실이 개탄스럽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님 당선 뒤 서울 광화문에 국민인수위를 설치하고 불공정거래 민원을 접수받았습니다. 1년 후 대통령께서 국민인수위에 억울한 민원이 18만 건 접수되었다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18만 건 접수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해결이 중요하지요. 5시간을 기다렸다가 1번으로 접수한 (기술 탈취 납품단가 후려치기) 민원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서오기전의 김성수 대표는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인수위를 출범시켰을 때 제1호로 청원을 냈다. 문 대통령은 국민 의견과 고충을 국정에 적극적으로 반영하겠다며 광화문 앞 세종공원에 인수위 정책 제안기구인 ‘광화문 1번가’를 설치했다. 광화문 1번가가 문을 열던 날, 김 대표는 새벽에 집을 나서 5시간 동안 대기한 끝에 자신의 피해 사례를 제1호 불공정 사례로 접수시켰다. 그는 접수장에 “저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저의 가슴에 박힌 대못을 뽑아주세요”라고 적었다. 당시 김 대표가 낸 청원은 1호라는 상징성 때문에 크게 보도됐다.

해당 청원은 ‘재벌의 갑질’, 즉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불공정거래 행위에 관한 것이었다. 김 대표의 회사인 서오기전이 현대중공업으로부터 ‘단가 후려치기’ ‘특허기술 빼돌리기’ 등의 갑질을 당하다가 고사당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2016년 6월1일 국민인수위에 접수된 이 제1호 민원은 대기업-중소기업 분쟁 처리의 주무 부서인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로 넘어갔다. 공정위 조사가 시작되자 서오기전 김 대표는 ‘이제야 억울함을 풀 기회가 왔다’고 내심 기대했다. 조사관의 태도에서도 공정하게 조사해 처리하겠다는 의지가 읽혔다. 하지만 그 뒤 갑자기 담당 조사관이 교체됐다. 이후 1년간 공정위 담당 조사관은 두 차례나 더 바뀌었다. 불길한 생각이 김 대표의 뇌리를 스쳤다. 공정위가 시간만 끌다가 중소기업의 피해를 묵살하고 대기업의 갑질에 면죄부를 주려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었다.

ⓒ시사IN 윤무영김성수 대표가 받은 광화문 1번가 1호 민원 접수증.

기술 및 도면 유출 의혹도 제기

공정위는 1년 반이 지난 2018년 말, 김 대표에게 다음과 같은 짤막한 회신문을 보내왔다. “(현대중공업과) 거래가 종료된 지 3년이 경과되었으므로 하도급법 제23조에 따라 공정위 조사 대상에 해당하지 않음.”

공정위의 답변은 한마디로 ‘시간이 지났으니 조사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김 대표는 아연실색했다. “때리는 시어미(현대중공업)보다 말리는 시누이(공정위)가 더 미웠다.”

서오기전과 현대중공업 간 분쟁은 대기업의 대표적인 갑질 행태로 꼽히는 납품단가 후려치기에서 비롯됐다. 1986년 창업한 서오기전은 초고속 차단기 등 150여 품목에 달하는 원자력발전 설비의 핵심 부품을 개발해왔다. 현대중공업 같은 대기업이 해외에서 전량 수입하는 제품들이었다. 이런 부품들을 수입 가격의 절반 수준으로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 배경에는, 김성수 대표가 독일·스웨덴·일본 등 발전설비 제조 선진국을 여러 차례 방문해서 벤치마킹한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서오기전의 국산 기술개발은 이 부문에서 수천억 원대의 수입대체 효과를 낸 것으로 평가된다. 김 대표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00년대 들어 잇따라 대통령 표창과 산업 훈·포장 등을 수상한 바 있다.

현대중공업도 서오기전을 4년 연속(1995~1998) 국산화 개발 최우수 업체로 선정해 표창했다. 당시 서오기전이 초고속 차단기 등 수많은 발전설비 부품을 국산화하지 못했다면, 현대중공업 역시 관련 설비를 훨씬 비싼 값으로 수입해서 사용할 수밖에 없던 처지였다. 이렇게 서오기전과 현대중공업의 우호적인 관계가 유지되었다.

하지만 두 기업의 상생 협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2011년 들어 갑자기 현대중공업의 태도가 돌변했다. 서오기전에 초고속 차단기의 납품단가를 27% 인하해달라고 요구했다. 더 나아가 19개 품목에 대해 최대 74%까지 단가를 인하하지 않으면 거래를 끊겠다고 통보했다. 김성수 대표는 현대중공업 김 아무개 부사장을 만나 부당함을 호소했다. 김 대표는 그동안 현대중공업의 비용 절감에 기여한 공로, 서오기전 제품의 기술적 우수성과 차별성 등을 설명하며 위의 요구사항을 재고해달라고 호소했다. “현대중공업 김 부사장은 충분히 이해한다면서 지속적인 협력을 약속했다. 그래서 나도 상생을 위해 고육지책이지만 얼마간 납품단가 인하에 협조하기로 마음먹고 19개 품목에 대해 일괄 8% 인하를 약속했다. 2013년부터 3년간 ‘연간 6억원대 발주 물량 보장’ ‘신규 아이템 개발 시 참여’ 등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김 부사장은 흔쾌히 약속했다.”

하지만 현대중공업 경영진이 김성수 대표에게 한 ‘약속’은 곧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현대중공업 측은 신규 납품 계약이 체결된 뒤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발주 물량을 줄이기 시작했다. 2018년부터는 사실상 서오기전과의 거래를 중단했다. 이에 대해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서오기전에 초도품 20개 외에는 별도로 신규 품목 제조를 위탁하지 않았다. 우리는 배전반 모델 제작 방식 변경에 따라 불가피하게 추가 납품을 위탁하지 않을 것일 뿐 이미 계약된 물량을 취소한 것은 아니므로 잘못이 없다”라고 주장했다.

김성수 대표는 현대중공업이 서오기전에서 납품받던 핵심 발전설비 부품을 대체 어디서 납품받는지 파악하려고 현대중공업 개발팀을 접촉했다. 이때 그는 또다시 배신감을 맛봤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현대중공업은 서오기전이 개발한 핵심 부품 도면과 제조공정 자료를 다른 업체에 넘겨 대체 개발시킨 뒤 공급받고 있었다. 김 대표가 광화문 1번가에 제1호로 낸 민원의 내용이다.

하지만 공정위에서는 시간만 끌다가 ‘기한 도과(기한이 지남)’를 이유로 현대중공업의 갑질에 대해 무혐의 처분하고 말았다. 2월18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다시 오른 청원에서 김성수 대표가 현대중공업 및 정부에 요구한 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현대중공업은 2011년 이후 3년간 공급 물량 보장 약속 불이행에 따른 피해를 보상하라. 두 번째, 현대중공업은 서오기전 창고에 쌓인 22억원 규모의 완제품을 인수하라. 세 번째, 정부는 기술 유용 및 도면 유출을 조사하고 처벌하라.”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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