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피치 로빈슨의 〈임종〉(1858년)은 5장의 원화를 합성하고, 연출을 통하여 완벽한회화적 순간을 만들어낸 사진이다.

중앙일간지가 주관했던 국제 사진 공모전의 대상 작품이 합성된 것으로 판명되어 수상이 취소되었다. 노루 가족이 설경의 산간 지역을 지나가는, 전경과 배경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작품이다. 너무 완벽한 풍경이라서 합성 의혹이 제기되었다.

해당 작가가 합성으로 자신의 작품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숨긴 것은 분명 잘못되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셔터를 누르는 순간의 모습 그대로를 담은 이미지라고 허위로 주장했다. 자신이 빛과 형태, 내용이 완벽한 ‘결정적 순간’을 포착했다고 말했다. 그 모든 이야기들이 거짓으로 드러날 때 작품을 보는 근본적 시선은 바뀔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 대부분은 합성 자체를 비도덕적 행위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합성은 절대 하면 안 되는 일일까? 모든 것이 가능하고 가변적인 디지털 시대에 사진 합성 자체가 잘못이라기보다는 여전히 ‘그림 같은’ 사진만을 고집하는 공모전의 형식이 진부한 건 아닐까? ‘그림 같은’ 사진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다루기보다 이상적인 풍경을 추구한다. 이상적인 그림을 추구하는 것이 공모전의 목적이라면, 오히려 합성으로 완벽한 그림을 만들어내는 것이 나을 수 있다. 공모전의 목적과 방법이 서로 상충된다.

사진에 합성이 도입된 것은 더 완벽한 표현을 위해서였다. 1858년에 헨리 피치 로빈슨이 발표한 〈임종〉은 폐결핵으로 죽음을 앞둔 아름다운 젊은 여성과 애통해하는 가족의 모습을 담았다. 구름이 짙게 드리워진 창밖 풍경 또한 의미심장하다. 실제 이 사진은 원화 5장를 조합하고, 배우들을 동원해 연출했다. 그는 “사진가는 어떤 기교나 마술도 이용”하여 주제를 돋보이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이 이상화된 풍경화의 기본이다. 다큐멘터리 사진이라면 모를까, 사진의 완벽함은 반드시 셔터를 누르는 그 순간에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진의 기록성은 중요하다. 하지만 사진은 기록만을 위한 예술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줘야 하는지, 아니면 ‘연출’과 ‘합성’을 통해서라도 완벽한 이미지를 만들어낼 것인지는 사진이 발명된 이후 계속 이어진 예술적 논란이다. 사진은 단순히 현실을 반영할 뿐인 매체가 아니다. 셔터를 누른 순간 만들어진 이미지에도 사진가의 의도와 해석이 가미될 수 있다. 또한 사진은 누군가의 아이디어를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는 예술적 도구다. 현대의 컴퓨터 이미지 기술은 사진을 그 어느 때보다도 완벽한 창의적 도구로 만들었다. 포토저널리즘 안에도 ‘포토 일러스트레이션’이라는 분야가 존재한다. 스트레이트한 사진으로 보여줄 수 없는 아이디어를 합성과 연출을 통해 보여주는 부문이다.

사진 공모전 형식 자체를 고민해야

19세기의 ‘이상화된’ 풍경을 공모전 형식을 통해 선발하고 고무했던 ‘살롱 사진’ 전통이 디지털 시대에도 이어지고 있다. 좋은 전통은 계속되어야 하지만, 그 전통이 ‘요술’을 부릴 수 있는 사진의 예술적 가능성을 막는다면 우리는 공모전 형식 자체를 먼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지금은 삼척동자도 멋진 사진을 찍고 순식간에 사진을 합성할 수 있는 ‘창의적’ 시대다. 이런 시대에 한 가지 형식만을 고집하는 건, 사진을 변화무쌍한 ‘마술’이 아닌 기술자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일인지도 모른다.

기자명 김성민 (경주대학교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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