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orge Sim Johnston 기록보관소 제공학대 가정에서 구조된 후의 메리 엘런.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성장이 느리다. 웬만한 짐승은 태어나자마자 일어서고 몇 달 지나면 거의 다 자란 느낌을 주지. 하지만 사람은 돌이 되어서야 아장아장 걷고 생후 10년이 지나도 성인의 보호 없이는 생존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인류 역사에서 아동은 오랫동안 보호의 대상보다는 한시바삐 키워 그 노동력을 써먹어야 할 사육의 대상이었고, 어른들이 저지른 범죄의 제물이자 빗나간 학대의 희생자일 때가 더 많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차별받고 설움에 찬, 우울한 아이들의 설화가 그득한 이유일 거야. 우리나라에 콩쥐와 팥쥐가 있었다면 서양에는 신데렐라가 있었고, 장화와 홍련이 억울한 귀신이 됐다면 백설공주는 그 새어머니에게 몇 번이고 목숨을 위협받지 않았겠니.

아동보호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정립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스탠리 홀(1846~1924)은 〈아동 마음의 내용〉이라는 논문을 통해 아동을 사랑과 따뜻함으로 양육해야 한다는 생각을 확산시켰고, 아널드 게젤은 아동기의 발달 특성을 체계화하여 연령별 순서적인 발달과정을 과학적으로 연구했다(〈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이숙희 사회복지학부 명예교수).” 하지만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았어. 아동을 어른들의 소유물로 여겨 보호자가 아동에게 어떤 행동을 하든 ‘집안 문제’라는 인식이 강했고, 아동에 대한 폭력과 학대를 법으로 처벌한다는 개념은 거의 없었지. 그러던 중 1874년 미국 사회는 한 어린 소녀, 메리 엘런 윌슨의 비극 앞에서 크나큰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메리 엘런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를 잃었어. 아버지가 남북전쟁에서 전사했기 때문이지. 아이를 감당할 수 없게 된 어머니는 아는 사람의 집에 아이를 맡겼다. 〈레 미제라블〉에 나오는 어린 코제트의 처지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겠구나. 메리의 어머니는 코제트의 어머니 판틴처럼 갖은 노력으로 돈을 벌어 송금했지만 아이를 맡은 이의 요구를 채워주지 못했다. 결국 메리는 뉴욕시의 자선부(Department of Charity) 산하 고아원에 보내지게 돼.

뉴욕시 자선부는 딱하지만 ‘세금을 축내는’ 존재였던 메리를 돌볼 의사가 없었어. 뜬금없이 나타나서 자신들이 메리의 친부모라고 주장하는 매코맥 부부에게 덜렁 메리를 안겨줄 정도로 말이다. 매코맥 부부는 자신들이 메리의 부모라는 증거를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았지만 메리는 그야말로 짐짝처럼 그들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어. 더 황당한 사실은 그들이 메리를 데려오면서 기이한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메리에게 기약도 애매하고 급료도 없는 가사노동을 시킨다는 내용이었어. 즉 매코맥 부부는 하녀로 쓸 생각에 친부모 행세까지 하며 아이를 데려갔고, 자선부는 옳다구나 하고 떠넘긴 것이었단다.

남편 매코맥은 메리를 데려간 후 곧 죽었다. 아내는 곧 재혼해 이번에는 ‘코널리 부인’이 되어 뉴욕 웨스트 41번가 아파트로 이사를 갔어. 여기서 코널리 부인은 〈레 미제라블〉 속 악역인 테나르디에 부인 이상의 악마로 현신한다. 어린아이를 혹독하게 부려먹는 건 약과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지. 메리를 수시로 때리고 불로 지지고 옷장 속에 가뒀으며 외출할 때는 캄캄한 방에 개처럼 쇠사슬로 결박해놓았어. 그때마다 이웃들은 찢어질 듯 구원을 청하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어야 했단다. 그러나 그걸 제지할 수 있는 수단도, 남의 ‘가정사’에 오지랖 넓게 나설 사람도 없었지.

ⓒ시사IN 이명익뉴욕 아동학대방지협회의 스티븐 포레스터 관리 책임자(왼쪽)와 메리 엘런이 입었던 원피스.

한 인간을 구하는 것은 우주를 구하는 것

그래도 참다 못한 이웃 한 명이 에타 휠러라는 감리교 선교사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게 돼. 휠러는 가까스로 메리를 만났지. 당시 메리의 상태가 어땠는지는 후일 그녀 자신이 한 증언을 통해 짐작해볼 수 있어. “나는 다른 아이와 놀 수 있도록 허락받은 적이 없었고, 친구와 사귀어본 적도 없어요. 엄마는 거의 매일 채찍질하고 때렸어요. 꼬인 채찍으로 때려서 피부가 벗겨지기도 했어요. 내 몸에 항상 시퍼런 멍자국이 있었어요. 지금도 내 머리에는 엄마가 낸 시퍼런 멍자국이 있고 왼뺨에는 가위에 찔린 흉터가 있어요.”

휠러는 분통을 터뜨리며 메리를 코널리 부부로부터 구해내고자 했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뜻밖에도 미지근했어. “애가 거리를 헤매는 것보다는 차라리 코널리 부부의 보호를 받는 게 낫지 않겠어?” “구식이고 완고하긴 하지만 애를 엄하게 교육시킨다는데 무슨 처벌을?” 세상이 무심할수록 휠러는 머리를 쥐어뜯었어. 무슨 수가 없을까? 궁리하던 그녀에게 조카딸이 뜻밖의 제안을 해왔어.

“동물보호운동가 헨리 베르그라고 들어봤죠? 요즘 동물학대 사례를 많이 발굴해서 엄청나게 떴잖아요. 그 사람이 세운 동물학대방지협회(ASPCA) 회원 수도 엄청나요. 그 사람에게 가보지 그래요?” 휠러는 버럭 소리를 질렀지. “메리는 동물이 아니라고!” 그러나 조카딸 역시 야무지게 대답했어. “지금 그녀는 작은 동물일 뿐이에요, 틀림없이(She is a little animal, surely).” 메리는 동물 취급을 받고 있으며, 사람을 보호할 법이 없다면 동물보호법이라도 동원해야 한다는 뜻이었지.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휠러는 헨리 베르그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한다. 베르그는 사회 저명인사이며 언론과도 접점이 많았지. 사태를 파악한 뒤 경악을 금치 못한 그는 적극적으로 메리 구출작전에 나선다. 휠러는 주변의 증언을 모으는 역할을 맡았어. 베르그는 동물학대방지협회 조사원을 위장 투입해 실태를 파악했고 증언을 입증할 현장 증거를 수집했다. 그리고 언론에 이를 낱낱이 폭로한다.

메리를 구출해달라며 법정 투쟁에 나선 동물학대방지협회 고문변호사는 법정에서 이렇게 외쳤지. “동물학대를 막는 법이 아동을 보호하는 법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Laws protecting animals from abuse should not be greater than laws protecting children).” 미국인들은 그제야 눈을 뜬다. 동물보호소는 있었지만 학대받는 아이들은 갈 곳이 없었던, 고아원에서 친부모 행세를 하며 아이를 데려와 하녀로 부려먹으면서 손쉽게 가학성의 제물로 삼을 수 있었던 암울한 현실과 직면한 거야. 미국 법원은 이 참혹한 아동학대의 가해자인 코널리 부인에게 역사적인 ‘징역 1년’ 판결을 내린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처벌 같지만 “거리를 헤매는 것보다 학대하는 부모 곁에 있는 게 낫다”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던 당시로서는 지대한 의미가 담긴 판결이었지. 이 사건을 계기로 세계 최초 아동보호기관인 ‘뉴욕 아동학대방지협회(NYSPCC)’가 설립됐다.

컴컴한 아파트 벽장에 갇혀 매 맞고 시들어가던 소녀 메리는 구원받았고 휠러의 가족들 품에서 새 삶을 찾았다. 메리는 결혼하여 행복한 생활을 했으며 훌륭한 어머니로 아이들을 길러냈다. 무려 아흔두 살까지 장수를 누리다가 세상을 떠났어. “한 인간을 구하는 것은 우주를 구하는 것”이라는 탈무드의 경구를 떠올려본다. 어린아이의 비명을 견디지 못하고 도움을 청한 이웃, 그에 응해 분노하며 눈물 흘린 에타 휠러, 그녀와 손잡고 메리 엘런을 구해낸 헨리 베르그는 우주 여러 개를 구해낸 셈이지. 우리도 때로는 귀를 열고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자꾸나. 우리에게 닿은 가냘픈 비명, 애타는 호소 하나에 호응하는 것이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고 우리의 삶과 우리 후손들의 미래를 바꿀 수도 있음을 되새기고 곱씹으면서 말이다.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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