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원 그림

학교 끝나고 돌아와 간식을 먹던 아들이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엄마, 우리 집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식당이었으면 좋겠어!” 깜짝 놀라, 간식으로 해준 햄버거가 맛이 없냐고 물어보자 다시 답한다. “그게 아니라, 그럼 맛있는 거 먹으러 사람들도 많이 많이 찾아올 거고 그러면 엄마가 돈을 아주 많이 벌 수 있잖아! 하루에 10만원 넘게 많이!” 그렇구나, 뜬금없이 멀쩡한 집을 식당으로 만들려던 이유가 돈을 많이 벌고 싶기 때문이었구나.

실은 얼마 전 이가 아프다는 아이를 데리고 치과에 다녀왔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가보니 썩은 이가 생각 이상으로 많아 치료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치료비 또한 상당한 금액이 청구되었다. 이번 기회에 이를 제대로 안 닦는 습관을 고치고자 “충치 치료하느라 엄마 통장에 있는 돈 다 썼어! 그러니까 앞으로는 이를 열심히 닦아야 해!”라고 장난처럼 당부했는데, 그때는 별말 않더니만 아무래도 내내 신경이 쓰였나 보다. 식당 안 해도 된다고, 엄마 돈 있다고 말해주었지만 쉬이 불안이 가시지 않는지 “엄마 통장에 다시 돈 들어왔어? 10만원 있어?” 하고 몇 번을 확인한다. 있다고 하니 “우와, 다행이다! 엄마 부자네!” 하며 다시 안심하고 활짝 웃는다.

이럴 때면 참으로 복잡한 마음이 든다. 엄마가 자기 때문에 돈을 다 써버렸을까 봐 안절부절못하며 미안해하는 모습을 볼 때는 다 컸구나 싶어 대견하고 안쓰럽다가도, 10만원이라는 매우 구체적인 숫자와 함께 그 돈만 있으면 걱정 없다는 듯 행동하는 것을 보면서는 어린이는 역시나 어린이구나 싶어 슬며시 웃음이 나기도 한다. 하기야, 용돈이랍시고 일주일에 2000원씩 받는 여덟 살에게 10만원은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 내의 가장 큰 돈일 것이다.

이렇듯 아이와 함께 생활하다 보면 다양한 사실을 알게 된다. 아이도 어른처럼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산다는 것을, 한 사람에게 너무나 다양한 모습이 들어 있다는 것을, 한 명의 인간으로서 세상을 경험하고 그 과정에서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감정을 느낀다는 것을 말이다. 아이와 생활하기 전에는 미처 몰랐던 점들이다. 그런 측면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기 전의 나와 엄마가 된 이후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물론 모두가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아이를 낳아봐야 진정한 어른이 된다거나 하는 식의 말에도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나의 경우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인간 자체에 대한 이해의 폭이 좀 더 넓어진 것은 사실이다. 김소영의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더욱 굳힐 수 있었다. 출산 경험 여부와 관계없이, 세상은 어린이라는 하나의 집단을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더욱 넓어진다는 것을, 인간은 절대적으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으며 단편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세상은 수많은 약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어린이라는 세계〉는 어린이책 편집자로 일하다 지금은 어린이 독서 교실을 운영하는 김소영 작가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대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것들을 쓴 책이다. 어린이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지만 어린이의 특성을 일방적으로 규정하거나 매뉴얼화한 ‘육아법’이 아닌, 한 명의 대등한 인간으로서, 즉 ‘작은 어른들’로서 어린이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그들과 어떤 방식으로 공존해나갈 것인지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책의 미덕은 어린이들과의 재미있고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읽는 이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날 틈이 없도록 만들면서도, 어린이들을 대하는 그 시선이 매우 공정하고 따스하다는 데 있다. 그는 아이들을 시혜적으로 바라보거나 동정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천사 같다거나 사랑스럽다는 등 한 가지 측면으로 대상화하지도 않는다. 그는 어린이는 ‘작은 어른’이나 마찬가지라며, 존중받아본 어린이들은 점잖게 행동할 수 있다고, 어른들이 기다려준 경험, 어른들로부터 배려받아본 경험을 한 아이들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가 더 좋아질 수 있으리라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어린이들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는다.

어린이를 헤아리고 어른을 다독인다

같은 선상에서 세상이 때로 어린이들에게 지나치게 각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지금의 어른들이 어려서 존중받거나 귀한 대접을 받아본 경험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기적으로 노키즈존 논란이 이는 것이나 스쿨존의 차량 속도를 두고 여러 불만이 폭주하듯 터지는 것 또한 어쩌면 어른들 역시 마음 한구석이 여전히 상처받은 어린이인 채로 남아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차원에서 이 책은 작은 어른인 어린이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동시에 큰 어린이인 어른들의 마음까지도 다독여준다. 읽는 동안 여러번 눈시울이 뜨거워진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일 터이다.

책을 읽고 나서 괜히 평소보다 마음이 쓰여 아이 방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몇 시간 전 늦었는데 얼른 안 자고 뭐 하냐고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고 크게 화를 낸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까닭이다. 불 꺼진 방 안 침대에 아이가 등을 돌리고 누워 있었다. 들어가 아이의 작은 어깨를 안고 말했다. “아까는 엄마가 미안해. 엄마도 사람이라 실수를 할 때가 있어서 그래.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말이야. 정말 미안해.” 그러자 아이가 답했다. “괜찮아. 엄마가 화가 났을 때도 마음속으로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거 알고 있거든. 그래서 괜찮아. 난 항상 엄마를 사랑해.” 그런 아이의 말에 그만 눈물이 나려는 것을 꾹 참았다. 역시 아이는 작은 어른이고 어른은 큰 어린이가 맞는 것 같다.

기자명 한승혜 (작가·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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