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자료〈죽은 자의 집 청소〉를 쓴 김완 작가는 특수청소 업체의 대표다.

“전문 작가가 아닌 글 잘 쓰는 전문 직업인에 의한 에세이 시장이 확고해졌다.” 2020년 올해의 책 설문에 응한 한 출판인이 이렇게 평했다. 직업 작가가 아닌 이들이 자신만의 특수한 경험과 사유를 풀어내 인기를 모았다.

올해의 국내서로 뽑힌 〈김지은입니다〉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력 피해자 김지은씨의 에세이다. ‘안희정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이라는 부제처럼 책은 저자가 사건을 알리게 된 과정, 피해 상황, 재판 경과 등을 기록했다. 미투 이후에 받은 위협과 조력도 써내려갔다.

〈김지은입니다〉는 지난 3월에 나왔는데, 출간 4개월 후 유독 많이 팔렸다. 안 전 지사 모친상 조문 논란, 박원순 전 서울시장 사망사건이 연달아 일어났고, SNS를 중심으로 이 책을 구매해 성범죄 피해자와 연대하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7월8일 책을 펴낸 봄알람 출판사는 트위터에 “찍어둔 재고가 적지 않았는데 이틀 새 지난 두 달간 나간 것보다 (책이) 많이 나갔다”라고 적었다.

올해의 책 설문에서 이 책을 꼽은 출판인 가운데에는 저자에게 ‘빚을 졌다’고 쓴 이들이 있었다. 이런 의견이었다. “저자는 책을 내면 보통 권위를 얻는다. 하지만 김지은 저자는 자신의 커리어를 모두 포기하면서 용기 있게 발언해 동시대 여성들이 ‘받을 수 있는 피해’를 줄였다.” “김지은씨의 용기에 많은 것을 빚졌다고 생각하게 된다. 용기의 초석이 되는 책.”

〈죽은 자의 집 청소〉는 〈김지은입니다〉에 버금가는 추천을 받았다. 특수청소 업체 하드웍스의 대표 김완씨가 쓴 에세이다. 고독사 현장, 쓰레기가 쌓인 집, 오물이 가득한 집 등을 청소한 경험에 대해 적었다. “죽음도 눈길을 끌지 못했던 사람들을 인간으로, 우리 이웃으로 끌어낸 기록” “특수청소라는 소재를 통해 죽음의 현장에서 삶을 돌이켜보게 하는 수작” “날카로운 경험과 깊은 사유를 동시에 던진 발군의 논픽션” 등 호평이 나왔다. 지난 7월 〈시사IN〉과 인터뷰에서 저자 김완씨는 ‘죽음학(thanatology)’을 언급했다(〈시사IN〉 제667호 ‘고독을 청소하며 제를 올린다’ 참조). “죽음이라는 결과가 아니라 (인간의) 고독·고립이라는 현상에 대한 이해와 연구가 접목돼야 한다”는 것이다.

장애인 문제를 다룬 저서들이 이름을 올렸다. 〈그냥, 사람〉과 〈장애학의 도전〉이다. 〈그냥, 사람〉은 13년간 노들장애인야간학교에서 근무한 저자 홍은전씨가 쓴 칼럼 모음집이다. 홍은전 작가는 출판인이 꼽은 ‘올해의 저자’이기도 하다. “삶에서 묻어나오는 드물게 진실한 문장들” “약자 곁에서 차별을 함께 겪어낸 마음과 생각이 온전히 담긴 모범적 에세이”라는 평이 나왔다. 홍 작가와 마찬가지로 노들장애인야학 출신인 김도현씨의 〈장애학의 도전〉도 호평을 얻었다. 이 책은 지난해 11월 출간되었으나, 같은 시기 진행한 ‘2019 행복한 책꽂이’ 설문에 반영하기 어려웠기에 올해 추천을 받았다. 책을 펴낸 오월의봄 관계자는 이 분야에 일종의 흐름이 감지된다고 했다. “최근 들어 장애인, 장애학 관련 국내외 도서가 동시다발적으로 나오고 있다.”

“시대가 다시 혹독해졌다는 방증”

〈임계장 이야기〉를 꼽은 이들도 적지 않았다. 버스회사 배차 계장, 경비원, 청소원 등 임시계약직으로 일해온 저자가 경험을 쓴 에세이다. “입주민 폭행과 협박에 시달리던 경비원 분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안타까운 일 이후 책을 읽었다. 그들이 어떤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하시는지 볼 수 있다” “밀려난 세대가 우리 모르게 감당하는 노동의 무게” 등이 추천 이유였다.

소설로는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와 이미예 작가의 〈달러구트 꿈 백화점〉이 꼽혔다. 〈시선으로부터,〉를 추천한 이들은 정세랑 작가를 두고 ‘대세’ ‘대표 소설가’ ‘정세랑 월드’ 따위 수식어를 붙였다. “여성의 이야기라는 점” “다정하지만 예리한 문장” 등을 강점으로 들었다. SF 소설 〈달러구트 꿈 백화점〉은 출간 과정이 이색적인 책이다. ‘텀블벅’에서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해 전자책이 먼저 나왔고, 전자책 베스트셀러가 된 뒤 종이책으로 출간돼 큰 호응을 얻었다. 한 출판인은 이 책을 두고 “생산자·평단이 아닌 소비자인 독자에서 시작된 책이다. 이제 등단의 의미가 바뀌었다”라고 평했다.

이서윤·홍주연 작가의 〈더 해빙〉을 꼽은 이들은 〈시크릿〉(론다 번 지음, 살림Biz)을 떠올렸다. ‘부와 행운은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는 내용의 자기계발서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 출판인은 “시대가 다시 〈시크릿〉류를 필요로 하는 혹독한 세상이라는 방증”이라고 적었다. 이 밖에 20대 담론을 계급 세습의 문제로 조명한 〈세습 중산층 사회〉(조귀동 지음),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최초로 보도한 이들이 쓴 르포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추적단 불꽃 지음)도 여러 출판인의 추천을 받았다.

번역서 분야에서는 〈명랑한 은둔자〉가 올해의 책으로 선정됐다. 2002년 마흔둘의 나이로 사망한 캐럴라인 냅의 에세이 모음집이다. 알코올의존증과 섭식장애를 겪고 고독, 우울함과 싸우던 자신이 어떻게 세상과 관계 맺게 되었는지 썼다. 출판인들은 “저자와 오늘날 한국 여성의 공통 키워드 ‘혼자’를 주제로 즐겁게 대화 나누는 책” “1인 가구가 증가하는 요즘 읽어볼 만한 삶의 태도”라고 의견을 냈다. 옮긴이인 김명남 번역가에 대해 “저자와 독자의 가교가 되어주는 옮긴이”라는 호평이 나왔다.

온라인 영상 스트리밍 기업 넷플릭스의 조직문화를 다룬 〈규칙 없음〉이 뒤를 이었다. 넷플릭스 CEO인 저자 리드 헤이스팅스는 인재풀을 구축하고 솔직한 문화를 조성한 뒤, 대부분 통제를 제거하라는 ‘비법’을 공유했다. 책이 주목받은 배경은 코로나19와  연관되어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넷플릭스 시청이 폭증한 데다, 재택근무 등 유연한 노동 형태를 도입한 회사가 늘어난 것. 출판인들은 “코로나로 인해 기업의 전통적 경영방식이 무너지는 시기” “밀레니얼 세대가 주목하는 기업문화”를 추천 이유로 들었다.

환경문제를 다룬 과학자들의 책이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여성 지구과학자 호프 자런은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에서 지난 50년간 인간과 지구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짚는다. 식량 생산은 폭증했으나 그 대가로 자연이 입은 손상은 막심하다고 지적한다. 이 책을 추천한 한 출판인은 “코로나19 위기를 겪으며 인간이 자연에 지은 죗값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평했다. 〈향모를 땋으며〉는 북아메리카 원주민 출신 식물생태학자가 쓴 과학 에세이다. 북미 원주민 문화와 과학 지식을 연결해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고찰한다.

차별을 다룬 책도 주목받았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는 〈보이지 않는 여자들〉에서 스마트폰 무게부터 사무실 권장 온도까지, 이 세계가 남성을 표준으로 설계돼 여성은 피해를 본다고 주장한다. 일본계 영국 이민자가 쓴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는 이민자 차별 문제를 다룬다. “엄청 마이너할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을 깨고 중학생 아들의 양육 이야기를 쉽고 재밌게 쓴 책”이라는 평이 나왔다.

소설로는 〈노멀 피플〉과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가 많이 언급됐다. 문학상과 연관되어 있다. 〈노멀 피플〉의 샐리 루니는 27세 나이로 맨부커상 후보에 올랐고,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를 쓴 올가 토카르추크는 201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다. 유행을 선도한다는 평이 많았다. 이들을 추천한 출판인들은 각각 “세계적 대세, 핫한 작가를 최대한 빨리 만나자” “세계문학의 흐름을 주도하는 영미 문학계가 요즘 뭘 원하는지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공교육을 거부하는 가정에서 자라 독학으로 대학에 들어간 타라 웨스트오버의 에세이 〈배움의 발견〉도 여러 출판인의 추천을 받았다. “앎은 삶을 재건하는 데 치명적 도움이 된다”라는 평이 나왔다.

예상과 달리 코로나19를 정면으로 다룬 책은 국내서와 번역서 모두 순위에 들지 못했다. 한 출판인은 “관련 서적이 쏟아져 나온 건 맞는데 막상 기억나는 책은 없다”라고 말했다. 다른 이는 “대부분 공저에, 지나치게 급조된 듯한 책이 많아 아쉬웠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이상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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