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현지 그림

민주주의는 ‘1인 1표’로 설명된다. 선거 때 우리는 똑같은 한 표를 행사한다. 재벌기업 회장이라고 해서, 다선 국회의원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이러한 민주주의 원리가 기업 안에서 어떻게 작동되고 있을까? 한국에 지배적인 주주자본주의 모델을 잘 설명하는 용어는 ‘1원(1주) 1표’다. 가진 돈(주식)의 크기만큼 차등적인 무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의미다. ‘주주 이익 극대화’가 기업 운영원리로 작동할 수밖에 없다.

최근 주주자본주의 담론을 주도하는 진영에서도 이런 모델의 지속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기업이 주주만이 아니라 노동자·소비자·공동체의 이익에 복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난해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BRT)이 주도한 새로운 기업 목적에 관한 성명서에 미국의 주요 기업 최고경영자 181명이 서명했고,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는 ‘자본주의, 리셋할 때(Capitalism. Time for a Reset)’ 캠페인을 시작했다. 핵심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새로운 기업윤리로 채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해관계자로서의 노동자 경영 참여를 통해 기업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일은 불평등과 불안정성, 불확실성이 심화하는 시대에 더욱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노동자의 목소리가 기업 경영에 거의 반영되지 못한다. 임금과 노동조건 결정 과정에조차 직접 참여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노동조합이 있는 기업에서는 단체교섭을 통해 이를 결정하지만, 전체 노동자 가운데 조합원은 10명 중 1명을 조금 넘는 수준(2018년 말 기준 11.8%)이다. 사장 선출이나 새로운 사업을 입안하는 과정에 노동자가 참여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민주주의가 기업 문 앞에서 멈춘다고 말하는 이유다.

노동자는 기업을 구성하는 여러 이해관계자 중에서도 특수한 지위를 갖는다. 사업계획이나 투자 결정이 잘 이뤄져 이익이 발생하면 고용안정을 보장받고 성과급을 받기도 하지만, 손해가 발생하면 임금 손실을 감내하며 회사 정상화에 나서기도 한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의 말을 빌리면, 기업 이해관계자 중에서 노동자처럼 ‘주주(잔여적 청구권자)’와 ‘채권자(임금채권자)’ 속성을 모두 갖춘 당사자가 없다. 그런 만큼 노동자에게 경영 참여 기회를 보장하는 것은 회사 지배원리에도 부합한다. 참여를 통해 의사결정의 민주성을 높이면 결정의 집행력을 담보할 수 있고, 기업의 이익 도모와 사회적 역할 확장에도 도움이 된다.

노동이사제로 실현하는 기업 민주주의

이런 까닭에 노동자가 이사회 구성원으로 참여하는 노동이사제에 대한 관심이 높다. 노동이사는 다른 비상임이사들과 동등한 권한과 책임을 갖고 기업의 장기 이익을 위해 복무하는 것을 전제로 노동의 관점에서 의견을 제시하며, 의사결정 과정을 견제·감시하며 참여한다. 독일·프랑스·스웨덴 등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운영 중인 보편적인 제도다. 서울시에서는 2016년 제정된 조례에 근거해 2017년부터 노동이사가 선출되기 시작했고, 경기·광주·부산 등 다른 지방정부의 조례 제정으로 이어져 현재 10개 지방정부 산하 공기업 51곳에서 노동이사 75명이 선출되어 활동하고 있다. 나는 2019년에 동료들과 서울시 노동이사제 3년의 운영 과정을 평가했는데, 노동이사제 도입 이후 경영투명성과 이사회 운영의 민주성, 기관의 공익성을 높이는 데에 긍정적 변화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각에서 제기하는 의사결정 지연 등의 부정적 효과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특히 기관장들은 노동이사를 통해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의사결정에 효율을 기할 수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지방 공기업을 넘어 중앙 공공기관으로 노동이사제 적용을 확대하기 위해 제21대 국회에 법률 개정안 몇 개가 발의되어 있다. 알찬 논의가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이제 노동이사제 도입을 통해 민주주의를 기업 안으로 들여올 때다.

기자명 이정희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