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근 제공

서점을 운영하면서 추억이 깃들어 있는 책을 찾아주고 사례비 대신 그 책에 얽힌 사연을 받는 특별한 일을 시작한 게 벌써 10여 년이 흘렀다. 책을 찾는 이유와 거기에 얽힌 사연은 저마다 다르다. 때론 별것 아닌 이유로 몇 년 동안 책을 찾아다니는 사람도 보고, 가슴이 뭉클해지는 한 사람의 인생을 책 속에서 만나기도 한다.

그런데 책을 찾기에 가장 어려운 사연은 따로 있다. 무슨 책을 찾는지 본인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경우다. 모르는 책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런 경우는 분명히 있다. 몇 년 전 서점에 찾아왔던 중년의 한 손님처럼 말이다.

K씨는 현재 평범한 회사원으로 어릴 때 아버지가 읽어보라고 권했던 책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책 제목이나 출판사, 출판연도 등 기본적인 서지 사항을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책 크기나 표지 디자인이라도 알면 좋은데 그마저도 전혀 기억에 없다. 그 이유는 아버지가 읽어보라고 했던 그 책을 당시엔 슬쩍 들춰만 봤을 뿐 제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책 내용이 조금은 기억나요. 그림책 아니면 동화책이고 삽화는 모두 흑백이었어요. 이상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관한 이야기인데, 단편집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각 단편이 서로 이어지는 내용이고요. 다른 내용은 전혀 기억이 안 나는데 어떤 농장에 개와 고양이가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있었어요.”

아버지의 유산을 쓰다듬다

안타깝게도 K씨가 기억하는 것은 여기까지다. 나중에 ‘얀’이라는 이름도 기억해냈는데 그게 개, 혹은 고양이 이름이었는지 아니면 농장 일꾼인지는 역시 모르겠다는 거다. K씨는 초등학생 때 이 책을 아버지가 주셨다고 했으니 1970년대 중후반에 출판된 어떤
책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 외에 다른 단서는 책을 찾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런 경우 책 찾기는 탐정이 하는 일과 비슷하다. 작은 단서들을 가지고 추리를 한 다음 퍼즐 조각을 맞춰나가는 것이다. 나는 ‘얀’이라는 이름에서부터 출발했다. 이름으로 보면 유럽의 어느 나라, 좀 더 범위를 좁히면 슬라브 국가에서 펴낸 책이 아닐까? 일단은 그것만으로도 찾아봐야 할 책 범위는 많이 줄어든다.

나는 틈날 때마다 도서관과 서점을 다니며 197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번역 출간된 어린이 책 중에 유럽 작가의 작품을 살폈다. 그리고 거의 1년 만에 그 책이 폴란드 태생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의 〈바보들의 나라, 켈름〉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이 책은 오랜 시간 동안 절판되지 않고 사랑받은 스테디셀러다. 여전히 서점에 가면 ‘켈름’을 만날 수 있다. 그로부터 몇 개월을 더 수고한 끝에 나는 1979년에 두레출판사에서 펴낸 켈름 초판을 구해서 K씨에게 전해드릴 수 있었다.

어린 K씨는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아버지는 이 책을 갖고 있으면 어른이 되어서 봐도 좋은 내용이니까 언제든 꼭 읽어보라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K씨가 고등학생일 때 병으로 돌아가셨다. K씨는 그런 일을 겪고 나서 그 책을 완전히 잊고 살았다. 어른이 되어 몇 번 이사를 하면서 책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보다 나이가 더 많은
K씨는 낡은 책을 받아 들고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리고 늦게나마 아버지가 주신 책을 읽어볼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자신의 세상으로 돌아갔다.

기자명 윤성근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대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