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이 광고판은 8월2일 ‘성소수자를 싫어하는’ 용의자에 의해 훼손되었다.
ⓒ시사IN 신선영8월5일 서울 신촌역에 재설치된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 공동행동’ 광고판.

2016년 5월 서울 강남역에서 한 여성이 살해되었다. 용의자는 경찰조사 과정에서 “평소 여성들에게 무시를 당했다”라고 말했다고 알려졌다. 이때부터 이 사건은 ‘여성혐오 범죄’로 규정되었다. 강남역을 가득 메운 추모와 분노, 항의의 열기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2020년 8월 서울 신촌역에서 성소수자 차별을 반대하는 광고판이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체포된 용의자는 “성소수자들이 싫어서 광고판을 찢었다”라고 말했다. 성소수자 단체들은 이 사건을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범죄라 규정했고 강력한 항의와 더불어 광고판을 복원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2020년 10월 경기도 남양주의 한 사찰에서 불이 났다. 방화 용의자는 경찰 조사에서 “신의 계시가 있었다” “할렐루야”라고 진술했다고 알려졌다. 그는 이전에도 방화 미수나 사찰 내 시설에 걸터앉아 있는 등 크고 작은 소동을 일으켰다고 한다.

최근 ‘혐오범죄’로 명명된 사건들이다. 몇 년 전부터 한국 사회에서 혐오범죄 또는 ‘증오범죄(hate crime)’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실제로 엄밀한 의미에서 혐오범죄에 해당하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혐오범죄는 혐오나 편견이 동기가 되어 살인·상해·폭행·재물손괴·명예훼손·모욕·방화 등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뜻한다. 혐오범죄법이 제정된 국가에서 이와 유사한 사건이 터지면 수사 과정 때 범행동기를 상세히 수사한다. 혐오범죄에 해당할 경우 적용 법조 자체가 달라지고 가중된 법정형이 적용되기 때문에 범죄가 혐오와 편견에서 비롯된 것인지 여부가 수사 과정에서 철저히 규명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들 국가에서는 혐오범죄 수사에 관한 구체적인 기준과 방법, 가이드라인과 매뉴얼이 개발되어 있으며 수사관들은 혐오범죄를 수사하고 피해자를 보호하는 방법을 교육받고 숙지하고 있다.

반면 한국에는 근거 법령이 전무하며 시스템도 갖추어져 있지 않다. 혐오범죄를 따로 분류하여 조사하거나 통계를 구축해놓지도 않았다. 그러니 한국 사회에서 혐오범죄가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인정될 수 없었던 것이다.

해외 주요 국가들의 혐오범죄 대책에서 특별히 주목할 점은 발생 건수를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관리한다는 것이다. 혐오범죄 대책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그 실태를 정확히 조사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유럽안보협력기구 민주제도인권사무소(ODIHR) 등 국제기구에서도 혐오범죄 통계를 위한 방법론을 개발하고 각국 사례를 수집하려 힘을 쏟고 있다.

미국 FBI 범죄 통계에 따르면 2018년 미국 내에서 혐오범죄가 8496건 발생했다. 인종(민족·혈통·편견)을 이유로 한 혐오범죄가 59.6%, 종교 18.7%, 성적 지향 16.7%, 성별 정체성 2.2%, 장애 2.1%, 성별 0.7% 등이다. 독일 연방 내무부 통계에 따르면 독일 내 혐오범죄는 연간 1만1212건(2017년)으로 집계되었고, 영국 경찰청 통계에서는 10만3379건(2019년), 프랑스는 950건(2017년)이 보고되었다. 나라별로 혐오범죄 건수가 들쭉날쭉한 이유는 이 개념과 범위가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범죄의 주된 동기가 편견과 혐오일 경우 혐오범죄법에 따라 가중처벌된다. 만약 편견과 혐오가 부수적인 동기에 그친다면 혐오범죄로 분류되지 않을 수도 있다. 실제로 미국 통계청의 혐오범죄 통계는 개인이 스스로 혐오범죄 피해자라고 인지하는 경우를 기준으로 하는데, 이 기준에 따르면 연간 20만 건이 넘는 것으로 집계된다. 편견과 혐오가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준 혐오범죄까지 포함한다면 그 건수는 훨씬 더 많아질 것이다.

한국에서도 혐오범죄가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기 위한 시도가 몇 차례 있었다. 2011년 형사정책연구원이 외국인을 대상으로 혐오범죄 피해 실태를 조사했는데, 폭행당한 경험이 1.1%, 위협이 2.4%, 성폭행을 당했거나 당할 뻔한 경험이 1.7%, 소유물을 파손당하거나 당할 뻔한 경험이 0.6%, 물건이나 돈을 빼앗기거나 빼앗길 뻔한 경험이 2.5%로 나타났다. 2019년 〈경향신문〉은 3년간 살인·상해·폭행·업무방해 등 일반 형사사건 판결문에서 혐오·증오·편견이라는 키워드가 등장하는 사건을 조사했는데 13건이 나왔다. 2019년 김중곤 교수(계명대 경찰행정학과)의 연구에 따르면 인터넷 기사를 통해 혐오범죄라고 볼 수 있는 사례가 2018년 9건, 2019년 15건 있었다. 수사를 통해 혐오범죄 여부가 밝혀진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한계가 분명했지만, 최소한 ‘한국에도 드러나지 않았을 뿐 혐오범죄는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들이다.

혐오범죄의 본질을 무엇이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핵심은 편견, 혐오, 혐오 표현, 차별행위, 혐오범죄를 ‘혐오차별’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보고 문제를 분석하고 대응방법을 마련해야 한다는 점이다.

혐오범죄는 진공 상태에서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집단을 혐오하는 특정 집단이 조직적으로 범죄를 저지르거나, 개인이 결단해서 감행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건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가 범죄의 배경에 깔려 있다. 바로 이 점에서 혐오, 혐오 표현, 차별, 혐오범죄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다. 특정 집단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말이나 글로 표현하면 ‘혐오 표현(hate speech)’이 되는 것이고, 편견과 혐오를 바탕으로 어떤 개인이나 집단에 불이익을 주면 ‘차별행위’다. 그리고 편견과 혐오에 기반해 범죄를 저지른다면 바로 ‘혐오범죄’다. 이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혐오 표현과 차별을 막아야 하는 이유 중 하나가 혐오범죄로 나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혐오범죄가 그 사회의 편견과 혐오를 부추기기도 하고, 편견과 혐오가 확산되면 혐오 표현과 차별도 당연히 늘어난다. 코로나19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 중국인·아시아인에 대한 편견과 혐오가 확산되며 혐오 표현, 차별, 혐오범죄가 동시에 증가한 것은 충분히 예견 가능한 일이었던 셈이다.

ⓒ트위터 갈무리코로나19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 중국인·아시아인에 대한 편견과 혐오가 확산되자 SNS에서 ‘나는 바이러스가 아닙니다’ 캠페인이 펼쳐졌다.

차별금지법은 혐오차별 대응 정책의 물꼬

혐오 표현, 차별, 혐오범죄가 사회에 미치는 부정적 효과도 동일하다. 혐오 표현과 차별을 금지해야 하는 이유는 그 해악이 사회 전반에 영향을 주고 확산되기 때문이다.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들이 발화되면 그 자체로 이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정상적인 사회적 삶을 영위하기 어렵게 만들거나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강화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회사에서 이주자를 차별하면 그 자체로 이주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 이주자를 차별해도 된다는 사회적 인식을 강화해 차별적인 환경을 조성한다. 차별의 구체적 피해가 발생하지 않아도 차별을 암시하거나 표시하는 것만으로 차별이 성립한다고 해석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 암시·표시의 사회적 효과 때문이다.

혐오범죄의 해악도 마찬가지다. 혐오범죄를 다른 범죄와 구분하여 다뤄야 하는 이유는 그 해악이 피해자뿐 아니라 전체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특정 집단에 속하는 정체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범죄 피해를 당했을 때 더 많은 정신적 외상을 입게 된다는 점에서 혐오범죄는 피해자에게 큰 고통을 준다. 혐오범죄의 피해는 피해자 개인에게만 향하는 것이 아니다. 혐오범죄자들은 범행을 전후하여 자신의 범행 의도를 일부러 공표하곤 한다. 그들에게 피해 대상은 자신의 혐오 사상을 알리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편견과 혐오를 과시하고 그것을 확산시키려는 것이 혐오범죄의 주된 목적이다. 거꾸로 혐오범죄 대응은 그들의 그러한 불순한 의도를 무력화하고 피해자를 보호하는 데 있다. 혐오범죄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법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혐오범죄법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지금 당장 한국 사회에서 필요한 건 무엇일까? 혐오차별에 대한 중장기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10년, 20년 뒤를 내다보고 지금부터 가용한 자원을 쏟아부어야 한다. 혐오 표현 규제는 까다로운 문제다. 규제 범위를 정하기도 어렵고 규제에 따른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어떤 식으로든 규제는 필요하지만 그 범위와 방법에 대해서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직장, 학교, 방송, 주요 포털 등 공공성이 강한 영역부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혐오범죄를 가시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혐오범죄통계법을 제정하여 혐오범죄를 가시화하고 대책을 수립하는 것이 최우선으로 검토되어야 하며, 혐오범죄법을 제정하여 혐오범죄를 가중처벌하는 근거를 마련하는 방안도 모색해봐야 한다. 양형에서 혐오범죄 여부를 가려 적극적으로 고려하는 방법도 있다. 이미 대법원 양형기준에는 명예훼손죄와 모욕죄의 양형 가중요소 중 ‘비난할 만한 범행동기’에 “피해자에 대한 보복·원한이나 혐오 또는 증오감에서 범행을 저지른 경우”가 포함되었다. 명예훼손과 모욕뿐 아니라 살인·폭행방화 등 다른 범죄의 양형기준에서도 혐오·증오를 가중 요소로 포함하는 것도 추진되어야 한다.

하지만 혐오차별 문제에서 가장 기본은 ‘차별행위’를 금지하는 것이다. 혐오 표현이나 혐오범죄에 비하면 차별금지법은 논란의 여지가 거의 없는 법이다. 이미 인권과 민주주의를 이념으로 삼는 주요 국가들에서는 차별금지법이 기본 법제로 자리 잡았다. 차별금지법이 금지하는 ‘차별행위’는 범위·판단 기준·구제 방법 등이 상당히 구체화되었고 국내외 사례들이 풍부하게 축적되어 있다. 혐오와 차별에 관한 대응이 전반적으로 부실한 상황에서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그 자체로도 중요하지만, 혐오차별 대응 정책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차별을 막는 데 실패한다는 것은 혐오범죄로 나아가는 길을 터주는 것과 다름없다. 더 큰 폭력을 막기 위해서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

기자명 홍성수 (숙명여자대학교 법학부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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