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채용성차별 철폐 공동행동 회원들이 2018년 4월 KEB하나은행과 KB국민은행의 채용 과정에서 성차별 점수 조작이 벌어졌다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2017년 주요 은행 공채에서 성차별, 출신학교 차별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아예 남녀의 합격선 커트라인을 다르게 해놓기도 했고, 특정 학교 출신을 노골적으로 탈락시킨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차별행위는 고스란히 증거로 남아 있었고 채용 점수 조작 혐의로만 수백 건이 기소되었다. 올해 교육부의 종합감사에서는 한국을 대표하는 사립대학들이 출신 대학별로 점수를 차등 부여해 직원을 선발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학원가에서 떠돌아다니는 ‘수능 배치표’가 활용되었다고 하니 어안이 벙벙하다. 대학원 입시에서는 출신 대학 등급제를, 대학 입시에서는 고교 등급제를 적용했다는 의혹도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다. 2016년에는 한 로스쿨 입시에서 출신 대학별, 연령별로 점수를 차등 부여했다는 사실이 보도되기도 했으니 막연한 의혹만은 아닐 수도 있다.

차별금지 원칙은 사기업과 사립학교에도 당연히 적용된다. 차별금지법이 없는 현재에도 마찬가지다. 상대적으로 공공성이 크고 강한 사회적 책무가 요구되는 은행과 대학에서 이러한 노골적인 차별이 있었다는 것은 더욱 충격적이다. 일괄적으로 점수를 조작한 흔적을 남겨놓는 대범함(?)까지 보여줬다. 우리 사회가 차별이라는 문제를 얼마나 우습게 여기는지 여실히 드러내는 장면이다.

사실 한국 정도의 국가라면 이런 노골적인 차별 관행은 진작에 근절되었어야 마땅하다. 차별은 어느 나라에서나 여전한 문제이지만, 이른바 ‘선진국’에서는 명백한 직접차별보다는 간접차별, 복합차별, 괴롭힘 등 입증하기 쉽지 않은 고도의 차별행위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가 쟁점이 되고 있다. 최근에는 악의성은 없지만 은연중에 특정한 집단에 대한 편견을 가중시키는 ‘미세차별(microaggression)’ 문제가 새로운 골칫거리다.

매킨지 보고서의 조언

세계 각국의 주요 기업과 대학에서 차별금지 정책에 힘을 쏟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차별은 그 자체로 나쁘기 때문이다. 업무 역량이나 학문적 역량과 무관한 이유로 차별하는 것은 당연히 옳지 않다. 차별금지는 인류의 중요한 이상이자 헌법적 가치이며, 기업과 대학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차별을 금지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조직의 이익’이다. 한마디로 차별을 금지해야 기업의 생산성이 높아지고 대학의 위상이 올라간다. 차별을 방치하는 기업은 평판이 떨어지고, 소비자와 이해관계자가 외면하기 마련이다. 평판이 나쁜 기업에는 인재가 몰리지 않는다. 우수한 인재들은 입사를 꺼리고 기업에서도 그 재능을 발휘하기 어렵다. 다양성은 혁신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유럽에서 실시된 한 연구(2016 DCG Survey)에서는 기업 구성원의 성별, 국적, 나이, 교육, 경력, 산업군이 다양할수록 혁신성이 더 높다는 결과가 나왔다. 올해 매킨지 보고서는, 젠더 다양성과 인종·문화적 다양성이 높은 상위 25% 기업이 다양성이 낮은 하위 25% 기업보다 수익률이 각각 25%, 36% 높다는 근거를 제시하며, 기업이 젠더와 인종뿐만 아니라 성소수자, 연령·세대 등 다양한 차원에서 다양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실제로 세계의 유수 기업들은 차별금지 원칙을 천명하고, 사내에 차별 사건을 처리하는 고충처리기구나 담당부서를 설치하는 것이 일반화되고 있다. 요즘은 차별금지보다는 다양성(diversity), 포용(inclusion), 소속감(belonging) 등을 내세우는 경우가 더 많은데, 이것은 앞서 언급한 차별 문제의 ‘고도화’와 관련되어 있다. 명백한 증거를 남기지 않은 은밀하고 미세한 차별행위에 대해 구체적인 사건 하나하나를 신고받아 처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예 다양성과 포용을 이념적 목표로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다. 다양성이 충족되었다는 것은 차별이 사라지고 있다는 증거다. 다양성을 목표로 둔다면 차별이 자연스럽게 근절되는 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기업에서는 차별을 금지하는 정책과 함께 사내 구성원 중 여성, 소수인종, 장애인, 성소수자 등의 비율을 일정 수준 이상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만약 일정한 구성 비율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어떤 식으로든 차별과 편견이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개선책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

ⓒ오비맥주 제공10월12일 오비맥주가 ‘다양성·포용성위원회’를 발족했다.

다양성을 증진하려면 현재 상황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보고에 관한 국제기준에는 차별금지·평등·포용에 관한 항목이 높은 비중으로 배치되어 있다. 인권·노동·환경·반부패에 관한 유엔글로벌콤팩트(UNGC)의 10대 원칙 중 여섯 번째 원칙이 ‘차별금지’이고, 국제지속가능경영표준(GRI)에서는 차별 사건 및 이에 대한 조치, 그리고 취약 집단인 여성, 청년, 노인, 장애인, 난민, 선주민, HIV 감염인 가족, 인종적 소수자 등 구성 비율을 전체 임직원과 이사회로 나눠서 보고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사회적 책임 보고서나 지속가능경영 보고서에 이 내용을 담거나 아예 다양성과 포용에 관한 보고서를 따로 내는 기업도 있다. 다양성최고책임자(CDO)를 임명하고 다양성 담당 부서를 두어 기업들이 서로를 견제하고 감시하기도 한다. 특히 공급망의 정점에 있는 큰 기업들의 책임이 중요하다. 그래서 하청을 주는 등 다른 기업들과 관계를 맺을 때 다양성 충족 여부를 조건으로 내세우는 기업이 늘고 있다. 기업 밖에서는 기업들의 다양성·포용 순위를 감시한다. 세계 최대의 데이터 공급업체인 레피니티브는 ‘다양성과 포용 지수(Refinitiv D&I index)’를 발표해 기업들의 순위를 매기고 있고, 성평등 분야나 성소수자 분야에 특화된 지수를 개발해 평가에 활용하도록 하는 곳도 있다.

대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하버드, 코넬, 스탠퍼드, 옥스퍼드 등 세계의 주요 대학들은 다양성과 포용 담당 부서를 두어 다양성 정책을 수립하고 다양성 보고서를 낸다. 이른바 명문대일수록 다양성 증진에 많은 힘을 쏟는다. 〈US뉴스 앤드 월드리포트〉는 대학의 인종 다양성 지수를 매겨 순위를 발표하고, 한 단체에서는 ‘캠퍼스 프라이드 지수’를 이용해 성소수자 친화 우수 대학을 선정하기도 한다.

이에 비하면 한국 기업과 대학이 다양성에 대해 보이는 관심은 실망스러운 수준이다. 사회적 책임 보고서나 지속가능경영 보고서를 내는 기업들이 늘어났지만, 다양성에 관한 항목은 아예 없거나 후순위로 밀려 있다. 다양성과 포용에 관한 조직을 설치하고 담당자를 두거나 관련 정보를 공개하고 보고서를 내는 경우도 찾아보기 어렵다. 인권센터를 설치하는 대학이 늘긴 했지만 대학 차원의 차별금지 정책이나 다양성 증진 정책을 수립하고 대학의 사명으로 삼는 것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다양성 증진을 통해 더 우수한 학생과 교직원을 영입하고 학문적 성과를 높여 궁극적으로 대학 발전에도 도움이 된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서일 테다.

그래도 곳곳에 변화의 씨앗이 뿌려져 있다. 삼성, LG, 현대자동차, SK 같은 대기업의 지속가능경영 보고서에는 차별금지 또는 다양성과 포용이 조직의 중요한 사명임이 확인되어 있다. 모든 협력기업에 차별금지 원칙의 준수 여부를 요구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것도 인상적이다. 하지만 차별금지 정책을 얼마나 진지하게 대하는지는 의문이다. 국제기준에 맞춰 보고서를 작성하다 보니 형식적으로 언급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일례로 국제지속가능경영표준에는 사내에서 발생한 차별 사건과 그 조치 사항을 보고하는 항목이 있어, 한국의 대기업들도 보고를 하는데, 2019년 기준으로 삼성전자는 17건, SK는 1건, 현대자동차와 LG전자는 0건이라고 당당히 기록되어 있다. 이 정도면 차별이 없는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 기업에 정말로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연합뉴스9월28일 국회 앞에서 열린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

현대차와 LG전자, 차별 보고 ‘0건’

2016년 서울대를 필두로 고려대와 카이스트에도 다양성·포용성위원회가 설치되어 다양성 보고서를 내고 있다. 다양성과 포용이 대학의 사명이자 세계적인 대학으로 가기 위한 기본 요건임을 깨닫는 대학이 조금씩 늘어나는 것이다. 상당수의 대학에 인권센터가 설립되어 차별금지와 다양성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최소한의 여건을 갖추기 시작했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토대가 하나하나 마련되고 있다.  

이쯤에서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어야 하는 이유를 다시 한번 강조할 필요가 있다. 차별금지법은 차별행위에 대해 사후적인 구제 조치를 취하는 법이기도 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기능은 기업·대학 등 각 개별 조직에 차별금지와 다양성 문제의 중요성을 환기시키고, 각 조직들이 스스로 정책을 수립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예시 법안을 내면서 법명을 ‘차별금지법’ 대신 ‘평등법’이라고 한 것은 차별금지라는 소극적인 목표를 넘어 ‘평등을 증진’한다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목표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차별금지법은 이렇게 한국 기업과 대학의 차별금지·다양성 증진 정책을 촉진함으로써 지속 가능한 발전에 기여하리라고 기대된다.

세계적인 경영컨설팅 회사 매킨지가 2020년 기업 다양성에 관한 세 번째 보고서를 내면서 붙인 제목은 ‘다양성이 승리한다’였다. 세계 최고의 대학이라 불리는 하버드 대학은 다양성 보고서에서 ‘다양성과 소속감의 문화를 확립해야 대학의 가능성이 극대화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차별금지와 다양성 증진은 윤리적 책무를 넘어 조직의 생존이 달린 문제다. 세계 초일류를 꿈꾼다면 차별을 금지하고 다양성을 증진해야 한다. 공자님 말씀처럼 여겨지던 얘기가 이제는 현실이 되었다.

기자명 홍성수 (숙명여자대학교 법학부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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