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원 그림

결혼식장에 가면 축가로 자주 나오는 노래 중에 ‘지금 이 순간’이란 곡이 있다.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넘버 중 하나로 인기 배우들이 종종 부르곤 해서 더욱 화제가 된 곡이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곡을 축가로 들을 때마다 나는 흠칫 놀라곤 하는데, 실은 이 노래가 극 중에서 연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 아닌, 지킬이 약을 마시고 하이드로 변신하기 직전에 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 간절히 바라고 원하던 이 순간”이란 유명한 가사는, 말하자면 ‘약 빨기 직전’의 흥분에 대한 생생한 묘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결혼이란 인륜지대사이니만큼 ‘맨정신’으로는 쉽사리 감행하기 어려운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라면 일견 적절한 곡 선택일지도 모르겠지만.

실제 뮤지컬도 그렇지만 원작 소설인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워낙 유명한 까닭에 직접 읽어본 이들이 오히려 드문 작품 중 하나다. 물론 소설 역시 큰 틀에서는 흔히들 아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저명한 의학박사인 지킬이 사적으로 제조한 약물을 흡입했다가 하이드라는 새로운 인격으로 변신하는 부작용을 겪고, 그런 하이드의 몸으로 온갖 악행을 저지르다가 발각될 위기에 처하자 죽음을 맞는 이야기. 하지만 소설과 세간에서 통용되는 줄거리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는데, 결정적으로 지킬이 약을 마시게 되는 ‘동기’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대개는 지킬이 어디까지나 학자로서의 도전정신에 의거하여 그와 같은 과감한 실험을 강행한 것이라 알고 있을 테다. 그러나 실제 소설 속에서는 조금 다르다.

소설 속 지킬은 평소 사회적 명망이 높으며 이에 상응하는 엄격한 기준을 지닌 도덕적 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이런 지킬에게 남모를 비밀이 있었으니, 바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스스로가 세워둔 규칙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은밀한 욕망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 지킬은 이렇게 말한다. “나의 가장 큰 단점은 쾌락을 탐하는 성향이었다. 쾌락은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만, 고고한 자긍심으로 대중들 앞에서 철저하게 근엄한 모습을 보이고 싶다는 오만한 욕망을 가진 내게 쾌락은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고로 지킬은 이처럼 모순된 욕망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그 과정에서 하이드가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사회적 법규를 완전히 벗어난 하이드의 몸에서 일종의 해방감을 맛본 지킬은 하이드의 거친 인격에 역겨움을 느끼는 것에 더해 사람들에게 발각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종종 하이드로 변신을 꾀하게 된다. 결국 흔히들 아는 것과 달리, 지킬은 실험의 부작용으로 어쩔 수 없이 하이드로 변신했던 것이 아니라, 매번 어떤 해방감을 위하여 스스로의 의지로 약을 마시고 하이드로 변신하기를 선택한 쪽이었다. 내면에 존재하는 하이드로서의 자신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그러한 인격을 분리해내고자 자진해서 약을 마셨던 것이다. 물론 그렇게 반복되는 변신 과정에서 하이드는 점차 강력한 힘을 갖게 되고, 그러면서 지킬 본연의 인격은 거의 남지 않게 되었다.

진짜 자신은 훼손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

본래 대중을 위한 호러 소설로 출발했던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이 작품은 훗날 인간 내면의 이중성을 상징하는 걸작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나는 이 소설이 현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유효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특히 SNS 및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 등이 큰 힘을 발휘하는 오늘날에는 더욱더.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모니터 앞에 앉아서 댓글을 다는 어떤 사람들을 떠올렸다. 특히 하이드가 길을 걷던 노인이나 어린이에게 마구잡이로 폭행을 가하는 장면에서는 인터넷 포털의 뉴스 창이나 각종 사이트에 익명으로 온갖 욕설이나 인신공격형 댓글을 다는 사람들, 하지만 모르는 이들에게는 대부분 매우 모범적인 시민으로 보일 만한 그들의 모습이 겹쳐지곤 했다. 실제로 악성댓글 문제를 법적으로 처리해본 사람들은 경찰서를 방문한 가해자들을 만나보고 깜짝 놀라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대다수가 전혀 ‘그럴 만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고.

그들 역시 최초로 악플을 달게 된 계기는 매우 단순한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그저 조금 짜증이 나서 그 화를 풀기 위해,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그냥 재미로, 마음속 어떤 욕구를 풀기 위해 별 생각 없이. 물론 조금의 죄책감은 느꼈을 수도 있지만 대개 그렇게 다는 댓글은 ‘진짜’ 자신이 아닌 인터넷 속에 존재하는 가상의 캐릭터가 다는 거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고선 점차 그런 종류의 댓글이나 언행에 익숙해졌을 테고, 강도는 조금씩 세졌을 것이다. 마치 지킬이 하이드가 저지르는 악행을 본인과 분리해서 생각했던 것처럼, ‘진짜’ 자신은 훼손되지 않고 순수하게 남아 있다고 끝끝내 믿었던 것처럼, 그러다가 마침내는 하이드에게 저항할 수 없게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지인 한 명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는 SNS가 재미있는 이유 중 하나로 새로운 인격을 만들어낼 수 있어서라는 점을 꼽았다. SNS의 세계는 마치 RPG 게임과도 비슷하다고, SNS에 존재하는 자신은 현실 세계의 자아와는 별도의 존재라고, 그런고로 SNS상에서 이루어지는 조리돌림이나, SNS에 적는 과격한 포스팅·댓글을 꼭 현실 세계의 기준으로만 판단할 순 없다고. 하지만 사람의 인격은 결코 여러 가지로 분리될 수 없다. 분리될 수 있어 보이는 건 착각일 뿐, 종내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가상의 내가 분리될 수 있다고 여길 때, 내 안의 나쁜 지점을 가상의 인격을 통해 분리하려는 시도를 할 때 가장 경계해야 한다. 지킬의 사례가 잘 보여주듯이, 그럴 때일수록 실제의 자신은 점점 더 망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기자명 한승혜 (작가·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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