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 그림

인간은 싸움을 피할 수 없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 이야기가 아니다. 친구, 연인, 부부, 부모와 자식끼리의 이야기다. 적과의 싸움은 오히려 피하거나 한번 싸우고 나서 영영 갈라설 수도 있지만, 가까운 사람과는 가깝기 때문에 피하거나 갈라서는 게 어렵다. 그런데도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가까운 사이라 할지라도 꼭 필요한 싸움은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싸움과 폭력은 늘 나쁜 것이다,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도 갖다 대야 한다, 사랑은 인내이며 사랑한다면 참아야 한다, 당하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다, 라고 배운다.

지은이의 고백을 고스란히 믿는다면 〈싸움의 기술〉(샨티, 2020)을 쓴 정은혜는 어려서부터 싸움을 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자랐다. 예술가이자 미술치료사로 씩씩하게 살고 있는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누가 큰 소리로 뭐라고 하면 눈물부터 글썽글썽 맺히고, 주먹을 꽉 쥐고 할 말을 하려 해도 눈물이 고이고, 톡 쏘는 말을 듣고 반격을 못하다가 몇 시간 뒤에나 답답한 가슴을 치는 일을 평생 겪어왔다. 이런 하수들은 벼르고 벼르다가 큰 소리를 내거나 욱해서 심한 말을 내뱉기도 하는데, 얼마 안 가 자신의 행동에 죄책감을 느끼거나 부끄러워하며 후회하기도 한다.

싸우지 않는 것이 조화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싸우지 않는 것은 관계의 회피라는 지은이의 경험은 흥미롭다. “학교에서 친구 맺기라는 중요한 인생 과제에 실패한 나는 외로웠다. 함께 손을 잡고 다닐 단짝친구나 같이 도시락을 나눠 먹을 친구 그룹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 쪽에도 속해 있지 않다 보니 반 아이들이 싸울 때 중재자가 되거나 고민 상담을 해주면서 나름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내가 그런 역할을 한다는 것이 뿌듯하기는 했지만 마음속에는 늘 허전한 감정이 있었다. 어른이 되어 돌이켜보니 그 허전한 감정이란 싸우지 않고 경쟁하지 않는 착한 아이가 된 대신 관계의 중심에는 들어가 있지 못하는 데서 오는 느낌이었다. 한마디로 나는 싸우지도 않고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 ‘깍두기’가 된 것이다.” 깍두기란 고무줄놀이나 공기놀이 같은 것을 할 때 끼워는 주지만 점수에 영향을 주지 않는 참여자를 말한다. 말하자면 있어도 없는 존재다.

지은이의 경험을 사회로 확대하면, 불편한 마찰을 피하면 피할수록 방관자가 많은 사회,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사회가 되고 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사회를 우려하면서 지은이는 이렇게 제안한다. “나는 ‘썸’과 ‘거리두기’와 ‘신경 끄기’가 삶의 기술로 각광을 받는 이 시대에, 마찰이 있고 싸울 수도 있는 관계를 기꺼이 만들어보자고 말하고 있다.” 독자들 가운데는 ‘한국 사회만큼 분쟁과 갈등이 많은 사회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테지만, 정작 강조되어야 할 것은 싸움의 횟수가 아니라 질이다.

싸움이 매번 인격모독, 야비한 언사와 조롱, 말꼬리 잡기, ‘예전에…’가 거침없이 튀어나오는 시간의 무한 소급과 ‘사돈의 팔촌’까지 등장하는 족보 캐기, 논점 이탈, 자기주장의 무한반복으로 얼룩진다면 진흙탕에 뒹구는 개가 되기로 작정한 사람만이 싸움에 나설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싸움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경기의 규칙(fair play)이 없는 사회는 나쁜 싸움만 벌이면서 싸우는 사람만 싸우게 만들고 방관자를 양산한다.

성급하게 주제를 확장해버렸지만, 〈싸움의 기술〉은 건전하고 화목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싸움의 규칙을 세우고 지키자고 쓴 책이 아니다. 지은이의 관심은 가까운 사람 가운데서도 특히 나와 친한 친구와의 싸움에 모아져 있다. 지은이는 사회학자가 아닌 화가로 문제 청소년이나 일반 성인을 대상으로 미술치료를 오랫동안 해왔고, 자신의 ‘베프(가장 친한 친구를 뜻하는 best friend의 준말)’와 오랫동안 티격태격 싸웠던 경험이 이 책을 쓰게 했기 때문이다.

‘너 전달법’ 아닌 ‘나 전달법’

오랫동안 미술치료사로 활동하면서 여러 사람을 상담하기도 했던 지은이는 우울하거나 삶의 허망함에 괴로워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심리치료사(상담가)가 아니라 치료사의 공감적 태도라고 말한다. 심리치료가 효과가 있는 이유는 치료사의 분석 능력 때문이 아니라 “따뜻한 관심을 기울여주는 사람의 존재 덕분”이라고 말하는 지은이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가닿았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꼭 치료사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나는 우울과 고립과 절망이 만연한 어두운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치료사가 아니라 친구라고 믿는다.”

문제는 돈으로 시간과 경험을 살 수 있는 치료사를 찾기보다 친구를 갖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사실이다. 친구는 정성으로 값을 치르고 마음을 열어서 기꺼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때에만 관계가 만들어지고 가까워질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사귄 친구와 싸우게 된다는 것이 문제다. 심리학 이론은 그 이유를 우리가 친구를 만드는 일반적인 습성에서 찾는다. 친구란 “아직 내가 해결하지 못한 이슈를 가지고 있는 유형의 사람들을 자꾸 알아보고 그들과 관계”를 맺은 결과다. 이럴 때 친구란 내가 이제껏 해결하지 못했던 갈등이나, 내 삶을 통틀어 애매하게 싸웠거나 피해온 모든 싸움을 대변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친구와의 싸움은 상대방의 내면을 알게 되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마지막에는 자신의 내면을 알게 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물론이고 나의 자아를 성장시킨다.

그러나 잘못 싸우면 그나마 존재하는 관계마저 무너질 뿐 아니라 자신의 자아 역시 더욱 옹졸하고 피폐해진다. 잘 싸우면서 후환이 없으려면 대화법부터 바꿔야 한다. 가까운 사람과 싸움을 할 때 “나는 ~~하게 느껴(나 전달법)”라고 말해야지,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너 전달법)” 식으로 말하면 안 된다. 이처럼 교묘하게 남의 탓을 하면서 싸우면, 말꼬리를 계속 물게 되어 끝나지 않을뿐더러 상대는 더욱 화를 내게 된다. 이것만 명심해도 싸움의 고수가 되지 않을까. 싸움은 나 아닌 상대와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내 속에 든 아이와 싸우는 것이고, 내 속의 아이를 달래는 것이라는 귀띔도 중요하다. 많은 싸움은 내가 타인에게 바라는 무엇이 있거나, 타인을 나와 같이 조종하기 위함인데, 그런 욕망은 ‘내 속의 아이’가 칭얼거리는 것이다. 지은이도 지적하고 있듯이 코로나 시대를 맞아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가 비중이 커지면서 서로가 주는 자극과 압박도 커졌다. 베케트의 어투를 빌려 〈싸움의 기술〉을 요약해본다. 싸우라, 다시 싸우라, 더 낫게 싸우라.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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