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 Photo2010년 4월15일 스위스 로잔 본사에서 네슬레가 총회를 여는 동안 오랑우탄으로 분장한 그린피스 회원들이 식품에 쓰인 팜유 생산으로 열대우림이 파괴되었다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스위스 인터넷 맘카페에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주제가 있다. 스위스에 본사를 둔 다국적 식품 기업 네슬레다. 좋은 내용은 거의 없고 대개 네슬레의 악행을 고발하는 내용이다. 네슬레가 아프리카에 공짜 분유 샘플을 나눠줘 엄마들이 젖을 먹이지 않고 분유에 의존하게 됐다거나, 네슬레가 생산하는 초콜릿이 코트디부아르에 있는 카카오 농장의 아동노동으로 만들어졌다는 등이다. 국제앰네스티나 유니세프에서 나온 보고서가 공유되고 ‘네슬레 초콜릿은 사지 않겠다’는 댓글이 줄을 잇는다.

아이 키우는 부모라면 아이를 이용해 수익 올리는 기업을 좋게 볼 수 없다. 이미 1970년대부터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이나 ‘기업윤리(business ethics)’ 같은 개념이 등장했고 그 선두주자가 ‘네슬레 불매운동’이었다. 기업은 이에 대응해 ‘사회적 책임 부서’ 같은 것을 신설해 이미지 개선에 힘썼다. 하지만 소비자 운동이나 기업의 자발적 사회공헌활동에는 한계가 있다. 전 세계 주요 다국적기업이 모여 있는 스위스에선 최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아예 법으로 못 박으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11월29일 국민투표에 부쳐지는 ‘기업책임 국민제안(Konzern-Verantwortungs-Initiative)’이 그것이다.

스위스의 ‘국민제안’이란 국민 스스로 헌법 개정안을 발의하는 제도다. 18개월 안에 10만명 이상의 동의 서명을 받아 제출하면 발의안이 국민투표에 부쳐지게 된다. ‘기업책임 국민제안’의 정식 명칭은 ‘책임지는 기업-인간과 환경보호를 위해’이다. 이를 발의한 건 130개 이상의 NGO 등으로 구성된 ‘기업 정의를 위한 스위스 연합’으로, 2016년 12만명 이상의 서명을 얻어 투표 요건을 충족시켰다. 이 안건이 국민투표에서 통과될 경우 스위스 기업들은 인권 보장과 환경보호를 위한 실사 의무(mandatory due diligence)를 지게 되고 이를 어기면 손해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

이 발의안의 핵심은 스위스 밖에 있는 자회사나 협력사 그리고 공급망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실사 의무에 포함된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스위스에 있는 네슬레가 코트디부아르의 카카오 농장에서 일어나는 아동노동에 대해 ‘몰랐던 일’이라며 빠져나갈 수 없고, 사전에 이를 막으려는 조치를 했다는 걸 증명하지 못하면 네슬레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발의안을 지지하는 쪽은 새 법안이 스위스를 세계적 변화의 선두에 서게 할 것이라고, 스위스의 국가 이미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대하는 측은 기업이 멀리 떨어진 공급망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모두 책임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정치세력이나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이 법을 빌미로 스위스의 다국적기업들을 ‘협박’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법안이 통과되면 어느 기업이 가장 큰 영향을 받을까. 네슬레가 아니다. 스위스에 위치한 기업 순위를 보면 매출액 상위 5곳(비톨, 글렌코어, 트라피구라, 머큐리아 에너지, 카길)이 모두 에너지·원자재 기업이다(컨설팅 업체 비스노드, 2020년 자료). 다국적 원자재 기업들이 변변한 자원 하나 없는 스위스에 자리 잡은 이유는 분명하다. 세금 혜택 때문이다. 스위스는 각 칸톤(주)마다 세율이 다른데, 특히 제네바는 매출의 80% 이상을 해외에서 내는 기업에 부과하는 법인세가 약 11%에 불과하다. 매출 대부분이 스위스 밖에서 나오는 원자재 기업에 매력적인 조건이다. 그런데 원자재가 생산되는 곳은 대개 아프리카 등 제3세계이고, 법안이 통과되면 이 거대 에너지 기업들은 생산국의 인권과 환경을 보호할 책임이 생긴다. 광물이나 석유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인권과 환경이 침해될 가능성은 카카오 생산 과정보다 높다.

ⓒWorld Vision Canada2011년 8월24일 아프리카 콩고의 코발트 광산에서 광석 채취 노동을 하고 있는 어린이들.

원료만 사용해도 현장 개선해야 한다

글렌코어는 스위스의 ‘아픈 손가락’이다. 연매출 2000억 달러가 넘는 세계 1위 코발트 생산 기업이지만 이런저런 뒷소문이 무성해 나라 명성에 먹칠을 하고 있다. 우선 코발트라는 광물의 특수성을 알 필요가 있다. 화합물이 맑은 가을 하늘 같은 파란색을 띠는 코발트의 별명은 ‘청색의 금’이다. 도자기나 유리의 착색 용도로 쓰이다가 최근 몸값이 급등했다. 휴대전화나 전기차에 쓰이는 리튬이온배터리의 필수 원료다. 전기차 배터리 하나에 코발트 8㎏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구상에서 이 광물이 있는 곳이 극히 한정적이다. 전 세계 생산량의 3분의 2가 콩고민주공화국(이하 콩고)에서 나온다. 러시아나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생산되지만 콩고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전기차 산업이 지금 같은 기세로 성장하면 콩고 의존도는 더 커진다. 테슬라 등 일부 기업은 배터리 원료로 코발트의 대체물을 찾고 있지만 신기술이 나오려면 십수 년이 걸린다고 한다.

콩고에서는 현재 200만명 이상이 코발트 채굴에 종사한다. 그중 25만명 정도는 기계 장비 없이 맨손이나 기본적인 도구만으로 작업하는데 사고가 종종 일어난다. 지난해 6월에도 글렌코어가 감독하는 채굴 현장에서 갱도 두 곳이 무너져 36명이 사망했다. 질병도 흔해서 노동자 상당수는 폐질환과 피부질환을 달고 산다. 수작업 채굴자 25만명 중에는 미성년 아동도 수천 명 포함돼 있다. 이 아이들은 일당으로 1~2달러를 받고 주로 잔해 운반, 코발트 분류 및 세척 작업 등을 한다. 사고나 질병을 운 좋게 피한다 해도 이 어린 코발트 채굴자들은 일하느라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다. 물론 글렌코어나 다른 원자재 기업이 콩고에서 아동노동을 부추긴 것도, 학교에 못 가게 막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기업 수익의 원천이 되는 지역에서 생기는 인권 문제를 나 몰라라 해도 되는 걸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느 정도 합의가 된 것 같다. 국제앰네스티가 2017년 내놓은 보고서 〈재충전할 시간〉은 기업들이 코발트 공급망에서 일어나는 인권침해를 막는 조치를 하고 있는지 분석했다. 배터리를 이용하는 IT 기업들이 2016년 1월 이후 코발트 수급 과정을 얼마나 개선했는지 평가했다. 1등급(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함)부터 5등급(조치를 취하지 않았음)까지 순위를 매겼는데, 1등급 기업은 없었다. 2등급에 애플과 삼성SDI가, 3등급에는 델·테슬라·LG화학 등이 포함됐다. 마이크로소프트·화웨이 등은 5등급을 받았다. 글렌코어처럼 직접 현장에서 기업활동을 하는 게 아니라도 그곳에서 나오는 원료로 된 배터리를 쓴다면 현장을 개선할 의무가 있다는 얘기다. 당시 시마 조시 국제앰네스티 기업인권과장은 “세계적 기업들이 여전히 자사의 공급망을 조사하지 않고 핑계 대기에 급급하다. 충전 배터리 시장은 나날이 성장하는데 콩고 노동자들은 끔찍한 환경에서 고통받고 있다. 미래 에너지 솔루션이 인권침해를 바탕으로 나와선 안 된다”라고 말했다.

글렌코어는 환경오염 논란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2018년 9월 중앙아프리카 차드공화국에 있는 글렌코어 석유 생산시설의 수조가 무너지면서 화학 폐수가 강으로 흘러 나갔다. 목욕물이자 축산 용수로 쓰이던 강물이 오염된 직후 주민 50명 이상이 몸에 화상을 입었다. 피부에 물집이 생기고 시력에도 문제가 생겼다. 염소·소·돼지 등 가축도 줄줄이 죽었다. 이 사건은 영국 조사기관 덕분에 알려졌다. 스위스에선 자국 기업이 일으킨 환경재앙인데도 당시 한 일요신문만 보도했다.

ⓒYouTube 갈무리발터 산체스 국제통합제조산별노련 사무총장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법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소비자가 사회적 책임 묻는 것은 시대 흐름

세계화는 상품의 공급에서 판매까지 촘촘한 사슬로 연결했지만 그 사슬에 다 같은 기준이 적용되는 건 아니다. 독일 자동차 기업 폭스바겐의 경우를 보자. 폭스바겐은 독일 내에서는 노동자 보호 수준이 높은 편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초기 독일이 전국에 봉쇄 조치를 내렸을 때 폭스바겐 공장도 한동안 문을 닫았고 다시 열 때는 철저한 위생 규정을 마련했다. 하지만 독일 바깥에선 달랐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유텐헤이그에 있는 폭스바겐 생산 공장에서는 위생 규정을 제대로 마련하지 않아 직원 120명이 집단으로 코로나19에 감염됐다. 직원들이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면 일을 하지 않겠다”라고 하자 폭스바겐은 노조 간부들의 직무를 정지시켰다. 발터 산체스 국제통합제조산별노련 사무총장은 스위스 현지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폭스바겐을 예로 들었다. “세계화로 이어진 시스템에 갈라진 부분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법적 개입이 필요하다. 스위스의 ‘기업책임 국민제안’이 통과되면 역할을 할 것이다.”

한국도 물론 세계화 사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리튬이온배터리 원료 수급은 한국 산업에도 중요한 문제다. 올해 2월 삼성SDI가 글렌코어와 5년간 최대 2만1000t 규모의 코발트 공급계약을 맺은 것이 알려졌다. 지난해 12월에는 SK이노베이션이 글렌코어와 코발트 장기 구매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2020년부터 2025년까지 6년 동안 코발트 3만t을 구매하는 계약이다. SK이노베이션은 논란을 의식했는지 코발트 구매 과정에서의 윤리적 책임도 강화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기업의 책임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소비자가 원하는 건 무엇인지에 대해 치열한 논의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스위스의 기업책임 국민제안은 현재 통과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지난 5월 실시된 국민 설문조사에서 78%가 발의안에 찬성할 것이라고 응답했다. 사실 공급망 전체에서 실사 의무를 다했음을 스스로 증명하고 배상의 책임까지 진다는 건 아주 높은 수준의 규제다. 기업계에서 이 발의안을 우려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소비자가 제품을 구입할 때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했는지 고려하는 건 이제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이다. 한때는 초콜릿 기업들이 아프리카 카카오 농장에 아동노동이 없다고 완강히 부인하기도 했다. 이제 네슬레는 코트디부아르의 아동노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자체 계획을 세우고 정기적으로 보고서를 낸다. 그래도 소비자들은 여전히 네슬레 불매운동을 벌인다. 이 흐름에 대비하지 않는 기업이 잃는 건 사회적 평판만이 아닐 것이다.

기자명 취리히·김진경 (자유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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