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에 산재한 40여 개 대공분실을 남영동처럼 민주화운동 역사유적으로 지정해 보존을 추진할 의향이 없습니까?” 10월13일 국회 행안위 국감에서 정의당 이은주 의원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지선 이사장에게 물었다. 배석한 남규선(58) 상임이사는 “미래세대를 위한 민주화 교육의 장으로 보존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보아 연구 조사토록 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곧장 지켜지기 어렵게 됐다. 그는 임기 만료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를 떠났다.

ⓒ시사IN 조남진

 

‘영원한 민가협 간사’로 불리는 남규선 전 이사는 1980~90년대 한국 길거리 인권운동의 산 역사다. 안기부와 보안사, 경찰청의 고문을 통한 용공 조작 사건에 온몸으로 항거하며 유가족 또는 양심수와 함께했다. 2000년 들어서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산파역을 맡았고, 이후 인권위 시민교육팀장을 지내기도 했다.

남 상임이사는 경찰청 남영동 대공분실을 ‘민주화운동기념관’으로 탈바꿈시킨 숨은 주역이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1년 조직됐는데 정관 제1조에서 정한 목적 사업인 민주화운동기념관 건립을 17년간 지지부진 끌어오고 있었다. 기념관 부지로 군사정권 시절 고문과 인권유린의 대명사였던 남영동 대공분실이 유력한 안으로 떠올랐다. 그런데 경찰청에서 먼저 선수를 치고 나왔다. 남영동을 자체 인권센터로 만들기로 한다고 발표했다. 그 뒤 이명박 정부를 거치면서 기념관 부지 선정이 지지부진하다 박원순 서울시장 시절 다시 구체적 논의가 시작됐다. 세종대로사거리 동화면세점 주변과 남산의 옛 안기부 일부 건물이 유력하게 거론됐다. 그중 안기부 건물이 고문과 간첩조작 사건의 산실이란 점에서 더 적임지로 떠올랐다. 박 전 시장은 기념사업회와 MOU까지 체결했다. 하지만 과거 군사독재 정권의 정치적 유산에서 자유롭지 못한 보수 정부에서는 국회가 예산 승인을 불허하는 방식으로 방해했다.

이런 상황에서 남규선 상임이사가 구원투수로 나섰다. 정부가 경찰청에 남영동 부지 2000평의 대토를 마련해 내보내고 그 자리에 민주화운동기념관을 짓는다는 안을 구상해 밀어붙였다. “경찰에서는 못마땅해했지만 마침 영화 〈1987〉 개봉으로 사회적 분위기도 무르익고, 수사권 조정을 염두에 둔 경찰로서도 과거 인권유린 원죄를 붙들고 버틸 수만도 없는 처지라서 여러 여건이 도와줘 ‘남영동민주화운동기념관’이라는 20년 묵은 숙제가 해결될 수 있었다.”

경찰청은 남영동 대공분실의 원래 도면을 넘겨주지 않았다. 또 남영동 박종철군 고문치사 장소인 509호 외에는 모든 고문 시설 흔적을 없애버린 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넘겼다. 결국 과거 고문 피해자가 보일러 기사로 들어와 남영동 지하 보일러실에서 귀중한 역사 사료를 찾아냈다. 경찰이 감춘 대공분실 실물 도면이었다. 지하창고에서 고문수사 당시 쓰던 도구들도 일부 발견했다. ‘현대사의 치부이자 인권유린 산실’인 남영동 대공분실은 요즘 민주화운동기념관으로의 새 단장이 한창이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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