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윤무영사건 당시 치안본부 총포화약계 주임이었던 심동수 박사는 “김포공항 테러에 사용된 폭발물은 감식 결과 우리 군용 크레모아였다”라고 말했다.

“김포공항 폭탄테러에 사용된 폭발물은 감식 결과 우리 군용 크레모아였다. 보안사는 ‘북괴 소행’이라는 감식 서류를 요구했다. 진실을 고수했다간 (나를) 간첩으로 조작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까 두려웠다. 그들의 요구대로 ‘북한제 화약’이라는 거짓 보고서를 써주고 수사에서 손을 뗐다.”

1986년 9월14일에 터진 ‘김포공항 폭탄테러 사건’의 초동수사 당시 현장 감식을 지휘했던 심동수 박사(68·화공학)가 〈시사IN〉을 찾아와 35년 만에 입을 열었다. 그는 5공화국 시절 치안본부(현 경찰청) 총포화약계 주임으로 당시 경찰 내 폭발물 테러 감식 분야의 최고 전문가였다. 그는 청와대 경호실로부터 전두환 당시 대통령을 상대로 한 폭탄테러에 대비하는 ‘안전검측 경호’ 특수임무도 부여받고 있었다. 이런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서울 아시안게임 개막을 일주일여 앞둔 1986년 9월14일 오후 3시12분, 김포국제공항 국제선 청사(현 국내선 청사) 1층의 5번과 6번 출입문 사이에 위치한 음료수 자동판매기 옆 쓰레기통에서 고막을 찢는 듯 ‘쾅’ 하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사건 현장 반경 30m로 잿빛 열 폭풍이 확 솟구치고 무수한 작은 쇠구슬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수류탄 7개가 동시에 터지는 위력과 맞먹는 이 폭발로 인해 공항 대형 유리창 10여 장이 산산조각 났다. 반경 30m 이내에 있던 공항 이용객들은 열 폭풍과 날아든 쇳조각, 구슬 파편을 맞고 쓰러졌다. 현장에서 5명이 사망하고 3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폭발 현장 바로 위에서 공항청사 천장 수리를 하던 국제공항관리공단 직원 유주현씨는 열 폭풍에 몸이 두 동강 난 채 날아갔다. 수습된 유씨의 시신에는 100여 개의 쇠구슬 파편(폭탄에 장착된 작은 쇠구슬)이 박혀 있었다. 다른 사망자와 부상자는 대부분 환영과 환송을 위해 공항청사에 나온 시민이었다. 김포공항에서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출국하던 어머니를 배웅하러 나온 김봉덕씨 일가족은 4명이 사망하고 9명이 중상을 입는 참변을 당했다. 또 다른 가족 단위 전송객과 이들을 태워온 택시 기사 등 20여 명은 온몸 구석구석에 쇠 파편이 박히는 중경상을 입었다.

김포국제공항을 관할하는 서울 강서경찰서는 즉시 폭파 사건을 인지하고 치안본부(현 경찰청)에 보고했다. 폭발로부터 10여 분 뒤 경찰청 대테러 전문가인 심동수 총포화약계장에게 현장감식 임무가 주어졌다. 심동수 계장이 가장 먼저 할 일은, 감식팀이 도착할 때까지 폭파 현장 증거를 보존하는 것이었다. 경찰차로는 치안본부가 있던 서울 시내에서 김포공항까지 아무리 빨리 달려도 30분은 걸린다. 그는 곧바로 현장에서 가까운 강서경찰서 상황실과 총포화약 담당 김 아무개 경장에게 무전으로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즉시 김포공항 폭파 사건 현장으로 달려가서 폭심지 반경 30m 이내에 폴리스라인을 설치하고 현장 출입을 통제하라.” 심 계장은 이와 동시에 치안본부 내 형사부, 수사부, 수사지도관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등의 직원으로 구성된 현장감식팀을 꾸렸다. 40여 분 뒤 일행과 함께 김포공항 폭파 현장에 도착한 그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누군가 폭파 사건 현장 일대를 소방호스로 쓸어내 말끔히 정돈해둔 상태였기 때문이다.

ⓒ연합뉴스1986년 9월14일 폭탄테러 직후 파편들만 남은 김포공항의 모습을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다.

사건 현장에 나타난 보안사 요원들

먼저 도착한 강서경찰서 경찰관들은 겨우 현장 폭심지 반경 2m에만 폴리스라인을 쳐놓았다. 심동수 계장은 강서경찰서 총포화약 담당 김 경사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현장 증거를 이렇게 인멸한 게 누구야?” 김 경사는 턱으로 주변을 가리키며 눈치를 주더니 이렇게 말했다. “보안사 요원 10여 명이 떼거리로 나타나서 여기는 자기네 관할 구역이니 경찰은 빠지라고 힘으로 밀어붙여서 승강이를 벌이다 겨우 폭심지만 내주지 않고 버티고 있었습니다.”

당시 김포국제공항 청사 한쪽에는 보안사 파견 요원 10여 명이 상주 중이었다. 폭발이 일어나자 이들이 경찰을 밀어내고 현장을 장악한 다음 소방호스 등으로 사건 현장 일대를 청소해버렸다는 것이다. 심 계장은 아쉬운 대로 흔적이 남은 곳을 중심으로 현장감식을 시작했다. 폴리스라인 안에 남아 있던, 폭심지 반경 2m 사방에 깔린 시커먼 매연을 채취하고, 남은 폭발 잔재물들을 수거했다. 그러던 중 자신도 모르게 내뱉고 말았다. “이거 군용 폭탄이 터졌잖아!”

경찰 감식팀 주변에 흩어져 있던 보안사 요원 가운데 두 명이 심동수 계장에게 다가오더니 위압적인 태도로 시비를 걸었다.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뭘 안다고 함부로 군용 폭약이라고 떠드는 거야?” 심 계장은 그들의 보안사 군복에 달린 계급장을 보았다. 둘 다 대령이었다. 심 계장은 짐짓 태연한 척하며 공손한 태도로 그들에게 자신의 판단을 털어놓았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대충 다음과 같다.

“민간 산업용 화약은 갱도나 터널에서 터지기 때문에 만일의 경우 작업자가 숨을 쉴 수 있도록 ‘옥시전 밸런스(산소평형)’를 플러스 상태로 맞춰둡니다. 반면 군용 폭탄은 적지에서 최대한의 인명 살상이 목적이므로 산소평형을 제조 당시부터 마이너스 상태로 맞춰둡니다. (그래서 군용 폭탄이 터질 때 발생하는 화학반응에서는) 산소부족으로 인해 CO₂나 CO₃ 결합이 아니라 CO 결합이 나타납니다. 대부분의 탄소(C) 성분이 산소(O₂)를 만나지 못해 ‘불완전 연소’되기 때문에, 이곳처럼 검은 그을음이 폭발 지점에 남는다는 의미입니다. 폭심지에 검은 그을음이 잔류한 상태를 보면 군용 폭탄이 터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바닥의 물체를 가리키며) 아울러 현장에 굴러다니는 ‘이것’은 국산 화약류(전기뇌관)의 #0번 뇌관이 폭발한 뒤의 잔류물로, 폭심 부근에 반드시 남는 게 공학적 상례입니다.”

심동수 계장의 설명을 듣던 보안사 대령들은 이내 어딘가로 급하게 가버렸다. 심 계장은 “별 싱거운 대령들도 다 있네”라고 혀를 차며 현장감식을 계속했다. 현장감식팀과 경찰 대공 합심조는 토론을 진행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콤포지션 C4 폭약과 #0번 뇌관, 공항청사 유리창이 깨진 거리(약 90m) 등을 이리역 폭발 사고의 사례(24t 화약 폭발로 8㎞ 반경 유리창이 깨짐)에 대입해 추정하면, 터진 폭탄 양이 500~700g으로 산정된다. 쇠구슬 파편까지 나온 것을 보니 군용 크레모아(대인지뢰 폭탄, 700개의 소형 쇠구슬 장착)의 폭발로 확실시된다.”

ⓒ연합뉴스폭탄테러로 주변에 있던 공항 이용객들은 열 폭풍과 날아든 쇳조각, 구슬 파편을 맞고 쓰러졌다.

심각하고 민감한 내용이었다. 당시까지 군용 크레모아는 한국군과 미군에서만 사용하는 살상무기였기 때문이다. 심 계장은 팀원들과 함께 ‘우선 상부에 사건 감식 상황을 보고한 뒤 급한 수사 방침을 하명받자’고 의견을 모은 다음 치안본부로 복귀했다.

“복귀해보니 사무실 분위기가 냉랭하고 불편했다. 전화가 걸려와 받았는데 말을 하지 않았다. ‘누구냐, 도청하는 거냐?’ 소리치고 전화를 끊자마자 치안본부장 부속실에서 연락이 왔다. 강민창 본부장이 당장 올라오라고 부른 것이었다.”

심동수 계장보다 6계급 위인 치안 총수가 그를 직접 단독으로 만나자고 호출한 것이다. 잠시 어리둥절했다. 급히 치안본부장실로 들어갔다. 강민창은 거수경례를 하는 심 계장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어댔다. “야 이 ××야, 너 때문에 더 이상 본부장도 못해먹게 생겼다. 무슨 쓸데없는 헛소리를 지껄여 개판을 치고 다니냐.”

갑작스러운 욕설과 질책에 어안이 벙벙해진 심 계장은 왜 자신이 치안본부장으로부터 그런 수모를 당해야 하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예, 저는 쓸데없는 헛소리를 하고 다닌 적이 없습니다. 무슨 일로 그러시는지 말씀 좀….”

강 본부장은 틈도 주지 않고 “야, 너 오늘 김포공항 다녀왔지?”라고 으르렁거렸다. “감식팀 이끌고 공항 폭파 현장에서 돌아와 보고를 올리려던 참에 본부장님 호출을 받았습니다(심 계장).” “왜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며 딴지를 거는 거냐?(강민창)”

순간 공항에서 만난 보안사 대령 두 명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미 상부와 보안사에서 북괴 간첩 소행으로 발표하기로 결정해놓은 사건을 경찰 폭발물 감식 전문가랍시고 들어가 눈치 없이 사실대로 감식하려 했으니 꼼짝없이 괘씸죄에 걸려들었구나’ 하는 불길함이 엄습했다. 수사팀에 계속 남아서 양심대로 감식을 고집할 경우, ‘(나도) 북괴 간첩’으로 조작되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머리를 짓눌렀다. 그는 ‘강민창 본부장이 원하는 답을 해주자’고 결심했다. 욕설을 퍼붓는 강 본부장에게 푸념하듯이 대꾸했다.

“아니 본부장님, 제가 수사팀에서 빠지면 그만인 걸 가지고 왜 개×× 소××까지 끌어들입니까. 저는 그 사건 수사에서 빠지겠다고요.”

강민창 본부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래, 심 계장. 잘 생각했다. 내가 살아야 너도 산다. 정말 잘 생각했어.”

강 본부장은 심 계장의 어깨를 다독여주며 흡족한 표정으로 나가도 좋다고 말했다. 본부장실에서 나와 총포화약계로 돌아온 심 계장 자리에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 가끔 마주치던 치안본부 담당 보안사 준위였다. 보안사 준위는 넉살스러운 태도로 “심형, 미안하지만 아주 멋지고 잘된 김포공항 폭파 현장감식 소견서를 하나 써주소”라고 채근했다.

“애당초 증거인멸에, 수사 방해에, 범인 조작으로 가는 무소불위의 보안사에 달리 대응할 도리가 없어서 체념했다. 보안사와 상부가 원하는 대로 A4 용지 한 면에 북한제 ‘콤포지션 B 폭약’이 터졌다는 거짓 감식소견서를 써주었다. 잠시 양심에 걸렸지만 내가 북괴 간첩이라는 조작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연합뉴스1986년 9월15일 김성기 법무장관(오른쪽)이 테러 사건에 대해 합동 담화문을 발표하고 있다.

누가 입을 막았을까

이때부터 심동수 계장은 대체 누가 강민창 치안본부장에게 자기 입을 막으라는 지시를 내렸는지 궁금해졌다. “처음에는 고명승 보안사령관이 직접 치안본부에 연락을 했다고 의심했다. 나중에 본부장 부속실에 근무하는 동료에게 살짝 물어보니 그날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직접 강민창 본부장에게 전화해 호통을 쳤다고 귀띔하더라." 강 치안본부장은 김포공항 폭탄테러 사건이 일어난 지 4개월 뒤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자행된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당시 치안 총수로서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라는 거짓 발표를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의 이 발언은 부도덕한 정권의 폭압과 비인간성, 반인륜성을 상징하는 구절이 됐다.

강민창 본부장은 곧이어 치안본부 출입기자단 앞에 나타났다. “김포공항 폭발 사건은 수법으로 보아 1983년 10월 미얀마 랑군(양곤) 폭발 암살 사건 및 1983년 9월 대구 미 문화원 폭발 사건과 유사하다. 이는 북괴의 소행이거나 북괴의 사주를 받은 불순분자의 소행이다. 이번 폭발 사건은 아시안게임의 성공적 수행을 방해하려는 북괴의 불순하고도 야만적인 흉계에서 저질러진 것이 분명하다. 북괴는 폭발물을 특별경비 강화로 공항 내부에 설치하지 못하고 건물 외곽 쓰레기통에 설치한 것이다.”

전두환 정권의 삼엄한 보도 통제 시절이라 모든 언론은 경찰총수의 이런 발언을 앵무새처럼 그대로 보도했다. 그 뒤 이 사건의 배후 수사는 사실상 보안사가 주도했다. 초동 사건 현장을 소방호스로 치워버린 보안사는, 범행 용의점이 있는 내·외국인을 찾아내겠다며 출국을 막고 연행 조사를 시작했다. 심동수 계장은 이 과정에서 보안사가 폭탄테러 배후로 ‘국내 민간 폭발물 전문가가 낀 북한 간첩단’을 만들어내려 한 정황을 포착했다.

“보안사는 사건 발생 직전에 입국한 일반 국민 중 40여 명을 서빙고 분실로 연행해 고문 등으로 자백을 강요했다. 보안사에 연행된 인물 중 국내 장난감 딱총 화약 제조회사 사장이 포함돼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는 경찰 총포 화약 수사에 협력하던 민간 전문가였다. 그가 보안사의 강압수사로 김포공항 폭탄테러를 자행한 북괴 간첩으로 몰리게 생겼다며 제발 테러범 누명을 벗게 도와달라고 우리 사무실로 연락을 해왔다. 내가 상부에 건의해서 그 사람은 테러범이 아니라 경찰의 대테러 협력자라고 보증해서 석방시켰다. 보안사로서는 ‘다 된 밥에 코 빠뜨린’ 내가 밉고 괘씸했을 것이다.”

결국 이 사건 배후 수사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경찰은 북괴 간첩 소행이 유력하지만 범인을 잡아내지는 못했다고 발표했다. 엄밀히 따지면 미제 사건이었지만 전두환 정권은 뚜렷한 증거도 없이 김포공항 폭탄테러를 북한 간첩 소행으로 몰아갔다. 국내 신문과 방송은 앞다퉈 전두환 정권의 나팔수를 자청하며 ‘북괴 테러’를 외쳐댔다. 이 사건은 이듬해 대통령 선거에 이르기까지 폭압적 군사독재에 저항해 민주화를 요구하는 야권과 학생운동 진영을 상대로 공안 정국을 조성해 돌파하는 수단으로 두고두고 이용됐다.

이렇게 미제 사건으로 잊혔던 김포공항 폭탄테러 사건은 발생한 지 23년 후인 2009년 초, 느닷없이 사람들의 기억을 다시 환기시키게 된다. 2009년 〈월간조선〉 3월호는 스위스에서 일하는 일본인 기자가 옛 동독 첩보기관의 비밀문서를 하나 입수했다며, 이를 근거로 김포공항 폭탄테러 사건 범인을 아랍계 테러리스트 아부 니달(본명은 사브리 알바나)로 지목했다. 아부 니달은 유럽을 무대로 활동하던 중동 출신 테러리스트로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2002년 8월16일 이라크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7년 전 죽은 아부 니달과 그보다 일찍 패망한 동독의 첩보기관 문서를 조합시킨 김포공항 폭탄테러 사건의 개요는 대충 다음과 같았다.

당시 동독은 아랍계 테러 조직들을 지원하고 있었다. 다만 자기 나라가 테러리스트의 기지로 활용되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당시 동독 측으로부터 수사받던 아부 니달이 김포공항 폭탄테러의 내막을 줄줄이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기사에 따르면 아부 니달에게 테러를 사주한 것은 역시 북한이었다. 아부 니달은 자기 조직의 두 사람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 조직원들은 영국인 신분(루마니아 첩보기관이 영국 여권을 위조)으로 폭발물을 들고 김포국제공항에 들어왔다. 폭발물을 설치한 뒤엔 홍콩으로 출국했다고 한다. 테러가 성공하자 북한 정권은 스위스에서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한 은행의 아부 니달 비밀 계좌로 500만 달러를 송금했다. 결국 김포국제공항 폭탄테러는 북한 김일성 정권과 아부 니달이 이끄는 아랍 테러 조직의 합동작전이었다는 것이 2009년 〈월간조선〉 보도의 골자였다. 하지만 워낙 등장인물들과 출처가 의심스러운 문서였다.

“외부 세력의 소행으로 보기 힘들어”

심동수 박사는 그 기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조사해보니 이라크인 아부 니달이라는 테러리스트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로서 평생 유럽만을 무대로 암약하다가 시아파와 수니파의 종파갈등에 희생된 인물이었다. 이역만리의 언어불통, 정보 부재인 한국에서 테러 사건을 일으킬 이유가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아부 니달 조직원이 테러용 폭탄을 김포공항으로 반입했다는 주장에 대해 한마디로 “물정 모르는 난센스”라고 반박했다.

“나는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앞두고 청와대 경호실과 함께 김포, 김해 등 국제공항과 주요 항만에 다중 대테러 방지 시설을 집중 설치했다. 금속 탐지기와 엑스선 탐지기, 그리고 질소 탐지기라는 3중 그물망으로 폭탄의 뇌관 형상과 화약 성분, 모양 등을 다 잡아내는 완벽한 폭발물 감지장치였다. 테러리스트가 설사 공항 검색대 직원을 매수하는 데까지 성공해도 폭탄을 들고 통과할 수는 없는 시스템이었다. 김포공항 청사 밖에서 터진 크레모아는 화약 외에도 700여 개의 쇠구슬을 앞면에 내장하고 있었다. 개인이나 범죄조직의 역량만으로는 공항의 3중 검색장치를 절대 통과할 수 없었다.”

심 박사는 초동 현장감식과 수사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통해 볼 때, 김포공항 폭탄테러를 북한 간첩이나 중동 테러리스트 등 외부 세력의 소행으로 보기는 힘들다고 확신한다. 오히려 전두환 정권이 공안정국 조성을 위해 ‘북풍 공작’을 벌였다고 보는 쪽이 훨씬 개연성 높다는 것이다. “범죄학에서는 증거인멸이나 수사 방해, 또는 범인 조작은 의심할 나위 없이 ‘진범의 본능’이라고 가르친다. 2기 진실화해위원회(진화위)가 출범하면 지금이라도 김포공항 폭탄테러를 비롯해 전두환 정권 당시 일어난 괴기한 폭탄테러 사건들에 대한 철저한 진상조사가 이뤄져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바로세우기를 간절히 바란다.”

올해 들어 그는 ‘우리나라 3대 폭발테러 사건에 대한 공학적 고찰과 진상규명 연구’라는 논문집을 발간했다. 전두환 정권 당시 북한 소행으로 규정되어버린 폭탄테러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이들 테러 사건과 관련해 1기 의문사위에서 상임위원으로 활동했던 이명춘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1기 진화위에서는 비공식적으로 전두환 정권 치하에 발생한 폭탄테러 사건들을 조사하려다 중지한 적이 있다. 의문의 출발점은 전두환 정권 당시 북한이 저질렀다는 4대 폭탄테러 사건 외에 그 이전 정권과 이후 정권에서는 북한이 폭탄을 사용한 테러를 벌인 사례가 한 건도 없었다는 점이다. 유족들이 진실규명을 신청한다면 2기 진화위에서 충분히 조사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역사적 사건들이라고 생각한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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