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근 제공〈찬물 속의 한줄기 햇빛〉프랑수아즈 사강, 삼중당, 1976년 초판

출판사에서 일할 때 프랑수아즈 사강의 책 번역서를 만든 적이 있다. 그때 사진으로 사강의 모습을 처음 봤다. 사진 속 사강은 작가가 막 데뷔하여 큰 인기를 끌고 있던 시절에 촬영한 것 같았다.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는 사강은 젊고 발랄해 보였다. 그러나 전체적인 표정을 보면 어딘가 모르게 어두운 느낌이었다. 내 기억에 사강과 그의 작품 속 인물은 언제나 사진에서 본 인물처럼 쓸쓸한 가을을 닮아 젊고 우울했다.

그로부터 시간이 한참 지난 다음, 사강이 쓴 책을 찾아달라며 우리 가게를 방문한 손님의 표정은 그와 반대였다. 말을 하면서 거의 웃지 않았는데 전체적인 표정에서는 편안한 즐거움이 전해졌다. 하지만 학창시절에는 가출 경험이 있을 정도로 주변에서 문제아로 불렸다고 한다.

“저는 단지 구속받는 게 싫었을 뿐이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전혜린이라는 작가가 쓴 책을 보고 마음에 큰 힘이 됐어요. 저도 전혜린처럼 자유롭고 당당한 여성이 되고 싶어요.”

그리고 책 읽기는 자연스럽게 전혜린에서 프랑수아즈 사강으로 이어졌다. 전혜린이 번역한 사강의 소설을 몇 번이나 다시 읽을 정도로 손님은 고등학생이었던 당시 이 프랑스 작가에게 빠져 있었다. 얘기만 들어보면 책을 좋아하는 조용한 여고생이 떠오르는데, 실제로는 학교는 물론 집에서도 내놓은 자식 취급을 받을 정도로 돌출행동을 많이 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무작정 가출했어요. 바깥 생활 한 달을 채 넘기지 못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지만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답니다. 떠돌아다니다가 한 헌책방에서 사강이 쓴 책 〈찬물 속의 한줄기 햇빛〉을 우연히 발견했거든요.”

그 책은 여느 사강의 소설에서처럼 방황하는 젊은이들이 진정한 삶의 이유와 사랑을 찾는 내용이다. 책을 집어 들어 앞부분 몇 장을 넘겼을 때 운명처럼 한 문장을 만났다. 삶에 지친 주인공 때문에 연인이 눈물을 흘리자 “울지 말아요, 모든 게 잘될 거예요” 하며 위로해주는 장면이 마치 자기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사강의 소설은 삼중당에서 펴낸 문고본으로 1976년 초판이고 헌책방이라 가격도 500원밖에 하지 않았지만 가진 돈이 별로 없어서 한참을 망설였다. 마침내 학생은 라면 하나 먹은 셈 치자는 생각으로 그 책을 사 들고 나와 거리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읽고 또 읽었다.

웃지 않는데도 환한 얼굴

책을 읽으면서 사강과 그 책 속의 주인공들에게 많은 위로를 받았다. 가출 생활을 청산하고 집으로 돌아온 것도 바로 그런 따뜻한 위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 손님은 대학입시 공부에 집중했고 사회에 나와서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며 지금까지 큰 시련 없이 지내왔다는 이야기다.

“그야말로 작은 책 한 권이 삶을 평탄하게 이끌어준 부적과 같은 일을 한 거네요?” 이야기를 듣고 난 다음 나는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손님은 지나온 삶이 결코 평탄했던 것만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별별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살았지요. 하지만 저는 그게 시련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사강의 책 속에 있는 젊은이들도 고통스럽게 살았지만 결국 자기 스스로 삶을 개척하려고 노력했으니까요. 그런 노력이 있었다면 아름다운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손님의 표정을 다시 보니 왜 잘 웃지 않는데도 아름다운 느낌을 받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 얼굴은 청명한 가을 날씨를 닮아 환하고 풍성하게 빛나고 있었다.

기자명 윤성근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대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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