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조남진곽창용 신라왕경사업단 단장.

한국 고고학계는 고무되어 있다. 지난 5월부터 수행한 경주 황남동 고분 조사에서 금동신발· 금동관·금귀걸이 등 6세기 전반 신라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 발견에 흥분한 것은 학계 전문가들만이 아니었다. 신라왕경사업단은 9월3일 유튜브로 온라인 현장 설명회를 열었는데, 3000여 명이 실시간으로 보고 조회수 6만 회 이상을 기록하는 등, 그간 이 분야에서 흔치 않았던 열광을 불렀다. 경주 문화재 복원과 활용 방향의 컨트롤타워인 신라왕경사업단(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 사업 추진단)을 찾았다. 곽창용 신라왕경사업단 단장과 정자영 학예연구관, 이현태 학예연구사가 이번 발굴의 가치와 온라인 설명회 뒷이야기를 들려줬다.

유튜브 온라인 생중계는 어떻게 기획하게 됐나?

사실, 현장을 공개할 방법을 두고 걱정을 많이 했다. 코로나19와 태풍 여파로 이전에 해오던 기자회견 형식의 설명회를 할 수 없었다. 언론에 보도자료만 공개하고 넘어가는 방안도 고려했는데, 여러 기관 관계자들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온라인 생중계 아이디어가 나왔다. 위에서 떨어트린 게 아니라, ‘한번 해보자’는 의견이 현장에서 먼저 모였고, 추후 문화재청장에게 보고했다. 8월26일부터 매일 준비와 리허설을 반복했다. 문화재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않은 인력이 있으면 설명회 콘셉트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현장 설명은 발굴을 전담한 신라문화유산연구원에서 맡았고, 촬영·편집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했다. 우리 조사단에서는 실시간 방송을 수행했다. 방송 당일 태풍이 오지 않았으면 영상 전체를 실시간으로 진행할 예정이었는데, 예보를 보고 현장 설명을 녹화 영상으로 대체했다.

언론 대상 설명회와 차이가 있었나?

쉽게 만드는 데 주력했다. “초등학생 아이와 함께 보고 있어요”라는 댓글이 있었는데, 실제로 학생들도 볼 수 있도록 고고학 전문 용어를 쉬운 말로 바꿨다. 준비를 많이 하긴 했지만 초반부터 호응이 좋아서 놀랐다. 방송 시작 전 이미 “너무 기대된다”라는 실시간 댓글이 많이 달렸다. “언론에서 선별된 소식이 아니라 발굴 내용 전체를 직접 보니 더 재밌다”는 반응도 눈에 띄었다. 댓글 수천 개가 달려 실시간으로 답변하기 어려웠다. “(출토된) 가슴장식이 블루베리처럼 생겼다”는 댓글에 사업단 관계자들이 다함께 박장대소했다. 그날 밤 흥분된 상태로 귀가하며 영상에 달린 ‘좋아요’와 댓글, 조회수를 계속 확인했다. 이후에도 시도해볼 만한 형식의 설명회였다.

코로나19와 태풍 와중에도 설명회를 기획할 정도로, 이번 발견이 특별히 중요한 이유는?

금동관, 금동신발, 귀걸이, 팔찌, 허리띠 등이 ‘풀세트’로 나온 게 가장 큰 요인이다. 1973년 황남대총 발굴 이후 처음이다. 피장자(묻힌 사람)의 신분이 상당히 높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규모의 발굴 기록은 일제강점기에 몇 차례 있지만, 사실상 ‘도굴’ 수준의 조사였기에 자료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특히, 피장자가 의복과 장신구를 착장한 상태로 발굴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당시의 복식뿐만 아니라 신라의 장례 풍습을 연구하기에 몹시 귀중한 발견이다.

‘피장자가 170㎝의 여성’이라는 발표에 놀랍다는 반응이 많았다. 어떻게 잰 수치인가?

이 수치는 추정이다. 착장 상태로 출토되었기에 유추해볼 수 있었다. 금동관 중간 지점부터 금동신발 뒤꿈치까지 176㎝였다. 안장 당시에 비해 많이 이동했으리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추후 뼈나 이가 잘 보존된 상태로 출토되면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유해는 보통 부패되기 때문에 장담하기 어렵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과거 백제 고분의 신발에서 발 뼛조각이 나온 적이 있다.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사업 추진단 제공경주 황남동 고분 조사에서 금동관, 금동신발, 귀걸이, 팔찌, 허리띠 등이 피장자 착장 상태로 발굴되었다.

‘금동관은 머리에 쓰지 않고 얼굴을 덮었다’는 설명은 낯설다. 새로 밝혀진 사실인가?

이 부분 역시 착장 상태를 근거로 유추한 사실인데,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금동관 착용 방법은 아직 학설이 나뉘는 문제다. 생전 실생활에서 쓰이지는 않았다는 설도 있다. 장례 이후 망자에게만 입혔다는 것이다. 근거는 ‘착용감’이다. 무게와 모양을 똑같이 재현한 금동관, 금신발을 써보면 무겁고 불편해서 이동하기가 불가능한 수준이다. 반면 귀걸이나 허리띠는 실생활에서 착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어떻게 조사하게 된 건가? 봉분의 존재는 언제 확인됐나?

해당 위치에 황남동 120호분이라는 고분이 있다는 기록은 일제강점기에 작성됐다. 그러나 2018년까지 이곳은 밭이었다. 봉분의 경계가 거의 허물어진 상태로, 낮은 언덕처럼 지형에 흔적만 남아 있었다. 1954년 항공사진을 보면 이 위치에 봉분 대신 민가 세 채가 보인다. 일제강점기 조사 이후 50년 이상 (봉분이라는) 인식이 없었다는 의미다. 경주뿐만 아니라 삼국시대 고분 가운데에는 이런 곳이 적지 않다. 봉분 잔존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2018년 5월부터 조사에 들어갔다. 표본조사와 시굴조사(조사 대상의 면적 일부만 시험적으로 파보는 것) 결과 ‘고분이 맞다’는 결론을 내렸고 본격적으로 발굴에 들어갔다.

문화재가 건설 현장이나 논밭 등지에서 ‘우연히’ 발견되는 경우가 종종 있나?

경주 지역이 유달리 그렇다. 어디를 파든 유적이 나올 정도다(웃음). 이제는 건물을 짓거나 도로를 놓기 전에 문화재가 있는지 사전 조사하는 것을 시민들도 당연시한다. 경주에 문화재가 밀집되어 있는 까닭은 900년간 수도를 옮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 공주, 부여 등에 분산되어 있는 백제와 다르다.

해외에 비해 한국에는 잔존한 유적·유물이 적다.

기본적으로 이전 왕조의 유물은 관리가 소홀하기 마련이다. 신라만 해도 경주 시가지에 봉분이 부지기수였는데, 왕조가 바뀌자 중요한 몇 기만 관리하고 나머지는 사실상 방치됐다. 건축재료의 한계도 있다. 똑같이 관리가 소홀하더라도 목조 문화권의 유적은 부패, 방화 등에 취약하다. 석조 건축이 주류인 유럽 문화재에 비해 온존하기도, 복원하기도 어렵다.

향후 발굴 계획은?

내년까지 할 일이 많다. 우선 120-2호분을 다시 수습해야 한다. 흙을 통째로 들어 올려서 복구해야 하는데, 매우 까다로운 과정이라 올해 안에 마무리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년에는 120호분도 발굴할 예정이다. 120-2호분에 비해 그 규모가 더 커서 발굴 성과가 기대된다. 월성 복원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내년 이맘때에는 월성 해자에 물이 흐르고 관람객들을 불러 모을 것이다. 또 다른 고분인 금관총도 전시 시설로 준비하고 있다. 천마총은 고분 안에 들어가서 둘러보는 방식인 반면, 금관총은 바깥에서 고분 안을 내려다보는 구조를 구상하고 있다.

기자명 경주·이상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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