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아출판사 제공수나라를 세우고 번영시킨 수문제(왼쪽)와 무능과 실정으로 나라를 망친 2대 황제 수양제(가운데), 수양제의 허영을 보여주는 대용주(오른쪽).

역사상 명군으로 이름 높은 당태종이 신하들에게 “창업(나라를 세우는 일)이 어려운가? 수성(지키고 유지해나가는 일)이 어려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을 때 역시 명신(名臣)으로 유명한 위징은 모범답안이라 할 대답을 내놓지. “예로부터 왕의 자리는 간난(艱難) 속에서 어렵게 얻어, 안일(安逸) 속에서 쉽게 잃는 법인지라 수성이 더 어렵습니다.” 그의 말처럼 제아무리 힘들게 세운 제국의 공든 탑도 짚 무더기처럼 스러지는 경우가 역사에는 적지 않았다.

매우 성급하고 거친 이야기임을 전제로, 아빠는 요즘 미국이라는 나라가 트럼프라는 기이한 대통령으로 인해 매우 빠르게 허약해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 초강대국 미국의 힘을 무시하는 게 아니야. 비록 모순이 그득할지언정 미국인들이 이뤄왔던 역사와 미국이 지향한다고 자부해왔던 가치들이 무너진다는 생각이 들어서야. 그러다 보니 네게 ‘제국을 망친 사람들’이랄지, ‘수성에 실패한 사람들’이랄지, 힘겨웠던 창업을 스스로 무너뜨린 이들의 비극에 대해 들려주고 싶어졌어.

중국 역사에서 황제를 칭한 사람은 수백 명이지만 명군으로 칭송받는 황제는 드물지. 그 가운데 수나라 황제였던 문제(文帝)를 빼놓을 수는 없다. 수문제는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마이클 하트는 〈랭킹100: 세계사를 바꾼 사람들〉에서 수문제를 82위에 랭크시켰어. 하트의 말을 들어볼까? “(수문제는) 수백 년간 심각한 분열 상태에 빠져 있던 중국의 재통일을 이루었다.” 수문제를 로마제국 멸망 이후 분열됐던 서유럽을 하나로 묶었던 샤를마뉴 대제에 빗대기도 했어.

중국은 5호16국 시대를 거쳐 남북조 시대를 맞으며 수백 년간 분열해 있었다. 이름을 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잡다한 왕조들이 명멸했고 전쟁과 폭정이 빈번했던 혼돈기였어. 수나라 문제 양견(楊堅)은 남북조 시대 북쪽 왕조인 북주(北周)의 중신이었다가 북주의 제위를 찬탈해 수나라를 세운 후 양자강 남쪽의 진(陳)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을 통일하는 데 성공한다. 수 문제는 수백 년간의 혼란을 수습해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어.

수문제가 처음 도입한 관리 선발 시험제도인 선거제는 후일 과거제도로 자리 잡아 중국 역사의 등뼈가 됐고, 자영농 육성에 역점을 둔 경제정책 역시 그 이후 통치자들의 전범이 됐다. 남과 북의 중국을 통일시킨 황제로서 남북 간의 경제 교류를 활성화하고자 대운하 건설에 나섰지만 백성들의 부담이 크다는 의견에 중단하기도 했지. 그의 치세에 통일 수나라는 그야말로 번영했다. 7세기 초, 수나라 인구는 4600만명에 달했는데 황제 자신이 근검절약하고 탐관오리들을 엄히 처벌해서 세금을 제대로 걷지 않고도 국고가 넘쳐났다고 해. 동북아시아에서 오랜만에 등장한 절대 강자였다고나 할까.

기량이 충분치 않았던 2대 황제

이 대창업(大倉業)을 물려받은 것이 우리 역사에서도 유명한 수양제(煬帝) 양광(楊廣)이야. 그는 남북조의 혼란이 언제였냐는 듯 부강하고 풍요로운 국가를 물려받았다. 마치 갑자기 아버지가 죽은 뒤 대기업을 물려받은 한국 재벌 2세처럼.

아버지가 일궈놓은 풍족한 물산은 수양제에게 허영의 독기를 불어넣게 된다. 우선 그는 아버지의 숙원사업이긴 했으나 백성의 부담을 우려해 중단했던 운하 공사를 재개했어. 사실 운하 건설 그 자체는 의미가 있는 사업이었지. 오랫동안 단절돼 있던 남부와 북부의 경제 교류를 위해 국가적으로 필요한 과제였으니까. 연인원 1억명이 넘는 노동력을 동원해 운하를 판 것까지는 그렇다고 칠 수 있어. 그런데 백성들의 혀를 빼물게 했던 것은 다음 같은 행동이었다. “대운하 구간에만 40여 개의 행궁을 지었고 운하 옆에는 대로를 건설해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를 심었다. (···) 중국 전역에서 유명한 악단, 광대 등을 모두 모아 3만명 규모의 행사단을 꾸린 후에 대규모 공연을 거행했다. (···) 본격적인 개통식은 대용주(大龍舟)라 불리는 궁궐만 한 배를 만들어 낙양에서 강남으로 순행을 떠난 이후부터 시작됐다. 이 용주란 배는 상하 4층, 높이가 45척, 너비 50척, 길이 200척의 초호화 요트로 배 안에 전각을 꾸몄으며, (···) 용주는 사람들이 강 양편에서 끌어 움직여야 했는데 이를 위해 운하 전 구간에 8만명의 장정을 세워두고 배를 끌게 했다(2017년 7월21일 〈아시아경제〉 ‘금요일에 보는 경제사’).” 운하 건설 자체보다 운하 개통을 기념(?)하는 양제의 허영이 수나라 재정을 말아먹고 수나라 백성들의 등골을 휘게 했던 거야.

아버지 문제가 일궈놓은 강성함 앞에 북쪽의 돌궐이 굴복하고 서쪽의 토욕혼이 무너졌다. 남은 건 동쪽의 고구려였어. 고구려를 치겠다고 양제가 행한 행동은 유명하지. 중국의 공식 사서인 〈수서(隋書)〉에 기록된바, “(병사는) 113만3800명인데 200만명이라 하였으며, 군량을 수송하는 자는 그 배”라는 유사 이래 최대 수준의 군대를 움직인 것이다. 당시 고구려 인구는 기껏해야 350만~400만명이었지. 대관절 왜 이런 황망한 전쟁을 감행했을까. 고구려사 전문가인 임기환 서울교대 교수의 해석이다. “양제의 목표는 정벌 그 자체가 아니었다. 거대한 군사력 앞에 고구려 영양왕은 감히 항거하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죄를 빌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조백관과 주변 제국의 국왕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고구려 왕이 항복하는 장면, 그리고 평양성에서 어느 황제도 이루지 못한 천하를 통일한 파티를 여는 장면, 바로 그것이 양제가 바라던 것이었다.”

즉 113만3800명을 몰고 가면 기가 질려서라도 두 손을 들 것이라는 계산이었고, 그런 규모의 군대는 나만이 동원할 수 있으며, 이런 웅대한 승리는 나만이 이룰 수 있으리라는 꿈을 꾸었다는 얘기야. 실제로 양제는 ‘폼 나는’ 모습 연출을 위해 애쓴다. 요동성 공략전에서 수나라 군대는 요동성 사람들이 항복을 청하자 공격을 멈춘다. 양제가 “고구려가 만약 항복하면 즉시 마땅히 어루만져 받아들여라. 절대 군사를 풀지 말라”고 명령했고, “진격하고 정지함을 모두 반드시 아뢰어 회답을 기다릴 것이며 제멋대로 하지 말라”고 못 박았기 때문이야. 이 지시에 따라 수나라 군은 양제에게 사람을 보내 “요동성이 항복한답니다. 어떻게 할까요?” 보고를 했어. 그런데 양제의 자비로운(?) 답을 받아오는 동안 기운을 차린 요동성은 세 번이나 항복을 취소하며 수나라 군의 뒤통수를 친단다. 고구려와 전쟁에서 수나라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는 이 요동성 전투와 그 유명한 살수대첩이 잘 보여주고 있지.

힘을 가지고 부를 소유한 이들일수록 그 힘과 부의 무서움을 알아야 해. 하지만 나라든 사람이든 부를 한껏 과시하는 것이 자신의 능력과 위엄을 드높이는 것이라는 착각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게 많지. 수양제는 그 대표적인 사람이었어. 일본의 역사소설가 진순신은 이렇게 평가한다. “수양제가 사치스러웠다 하지만 황제는 모두 사치스럽다. 사람을 많이 죽였다 하지만 황제는 대개 사람을 많이 죽인다. 양제는 보통 정도다. 단 2대 황제라는 어려운 위치에 있었고 기량이 충분하지 않았다.” ‘기량이 충분하지 않은’ 사람이 ‘어려운 위치’에 갔을 때 일어나는 재앙, 나아가 자신이 가진 위력을 많은 이들의 평안보다 자신의 만족을 위해 쓰는 데 익숙했던 이가 대업(大業, 아이러니하게도 수양제의 연호다)을 어떤 식으로 말아먹는지에 대해서 수양제는 처절하게 가르쳐주었다. 그의 아버지가 각고의 노력으로 일군 제국과 함께 말이야.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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