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이명익2013년 5월 ‘진주의료원 폐업 반대 촛불집회’가 열린 가운데 병원 안에서 농성 중인 진주의료원 직원들이 입구에서 촛불집회를 지켜보고 있다.

경상남도는 공공의료와 관련된 두 가지 상징적인 사건이 발생한 곳이다. 하나는 2013년 진주의료원 폐업. 우리나라 의료 역사상 처음으로 공공병원을 강제로 폐쇄했다. 또 하나의 사건은 최근에 발생했다. 도민 참여의 공론화 과정을 통해 서부경남 지역의 공공의료 확충 방안을 확정한 것이다. 그 방안 중 하나가 바로 ‘서부경남 공공병원’ 설립이다. 시민사회가 공론화 과정을 통해 전반적인 공공의료 정책을 결정한 최초 사례다. 그 결과는 지난 7월21일 정책권고안의 형태로 김경수 도지사에게 전달되었다. 그야말로 7년 전에 사라진 진주의료원이 서부경남 공공병원의 이름으로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우리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비교할 만한 국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공공의료가 취약한 나라다. 전체 의료기관 중 공공병원은 6%에 채 미치지 못하고 공공병상의 비중도 10%를 조금 웃돌 뿐이다. 자유방임적 보건의료체계를 가진 미국과 일본도 공공병상의 비중이 20%를 웃돈다. 한국은 의료서비스 공급에서 공공부문의 비중이 기형적으로 취약한 나라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단행된 2013년 진주의료원 폐업은 단숨에 공공의료를 전국적 이슈로 부각시켰다. 당시 보궐선거로 당선된 홍준표 지사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취임한 바로 다음 날이자 본인이 도지사로 취임한 지 정확히 68일째 되던 2013년 2월26일 ‘진주의료원 폐업 방침’을 기습 발표했다. 당시 진주의료원은 534억원을 투입해 신축 이전한 지 5년밖에 안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파장은 더욱 컸다. 보건의료노조를 비롯한 시민·노동단체, 진주의료원 폐업을 반대하는 전문가와 지식인·정치인들이 강력한 폐업 반대 투쟁을 벌였다. 급기야 국회 차원에서도 2013년 6월12일부터 7월13일까지 ‘공공의료 정상화를 위한 국정조사’를 실시했다. 같은 해 9월30일에는 국회 본회의에서 국정조사 결과보고서가 채택되었다. 이 보고서는 경상남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조치를 주문했다. “진주의료원 폐업 이후 경남 서부지역의 공공의료 시행대책을 보완·강화하여 보고하고, 1개월 이내에 진주의료원의 조속한 재개원 방안을 마련하여 보고할 것.”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진주의료원은 끝내 103년 역사를 마감하고 말았다. 이후 진주의료원 직원과 환자 및 가족들은 홍준표 전 지사를 상대로 ‘진주의료원 폐업 무효 확인소송’을 냈다. 대법원은 진주의료원 폐업 결정이 ‘권한 없는 자’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위법하다고 봤다. 그러나 진주의료원을 폐업 전의 원상태로 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원고 각하 판결(2016년)을 내려버렸다.

당시 경상남도의 진주의료원 폐업은 공공병원 강제 폐업에 따른 공공보건의료체계의 위축이라는 결과 외에도 다양한 문제를 발생시켰다. 폐업 방침 발표 이후 당시 입원환자 203명이 강제로 퇴원당했다. 환자 중 일부는 퇴원한 지 불과 3일이나 9일 만에 사망하기도 했다. 당시 국가인권위원회는 현장조사를 바탕으로 “불안한 상황에 놓인 환자와 가족에게 퇴원을 종용한 것은 법으로 정한 환자와 가족의 권리를 침해한 심각한 인권침해”라고 결론지었다. 이런 맥락에서 진주의료원 폐업은 환자의 인권과 지역 주민의 건강권을 지방정부 스스로 파괴한 나쁜 선례로 기록되고 있다.

ⓒ경남도청 제공2013년 4월 진주의료원 폐업을 놓고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사태 해결을 위해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오른쪽)이 홍준표 경남도지사(왼쪽)를 만났다.

진주의료원 폐업에 맞서면서 얻은 성과

그뿐만 아니라 ‘지방의료원의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도 나와 있듯이, 지방의료원은 지역 주민의 건강 증진을 위해서 설립·운영되는, 시민들의 혈세로 지어진 병원이다. 경상남도 도민들이 지방의료원의 실질적 주인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진주의료원 폐업 과정에서 경상남도는 단 한 차례도 경남도민의 의견을 듣지 않았다. 토론회나 공청회 한 번도 없이 폐업 방침을 기습적으로 발표한 뒤 거세게 밀어붙였다. 당시 경남도의회 다수를 차지했던 새누리당(현 미래통합당) 소속 의원들은 소수의 야당 도의원들을 물리력으로 제압하고 ‘진주의료원 해산 조례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대로 국회에서 압도적 찬성(여야 막론하고 91.3%)으로 채택된 ‘공공의료 정상화를 위한 국정조사 결과보고서’도 이행하지 않았다. 이처럼 진주의료원 폐업은 비민주적 방식으로 환자들의 인권과 지역 주민들의 건강권을 파괴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진주의료원 폐업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의 중요한 성과를 이끌어낸다.

첫째, 법률 개정을 통해 관련 제도를 바꿨다. 지방자치단체가 일방적으로 지방의료원 폐쇄를 결정할 수 없도록 했다. 개정법에 따르면, 지자체가 지방 의료원을 해산하려면 그 전에 미리 보건복지부 장관과 협의해야 한다. 또한 지방 의료원이 공공병원의 의무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낸 경영상 손실을 ‘평가’에 반영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항도 포함되었다.

둘째, 공공의료를 중요한 정치적 의제로 부각시켰다. 학계, 시민사회, 정치권 등에서는 ‘공공의료 강화’를 중요한 보건정책으로 논의해왔다. 그러나 핵심적 사회 이슈로 부각하지는 못했다. 진주의료원 폐업은 시민사회와 노동운동 진영의 강력한 반대 투쟁을 촉발했을 뿐만 아니라 국회 차원의 국정조사까지 이끌어냈다. 공공의료가 중요한 정치 쟁점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을 명백히 각인시킨 것이다. 이런 성과가 경상남도 도민들에게 큰 파장을 일으켰기 때문에 ‘서부경남 공공병원 설립 도민운동본부’가 조직될 수 있었다.

‘서부경남 공공병원 설립 도민운동본부(이하 도민운동본부)’는 진주의료원 폐업 반대 투쟁에 참여했던 지역의 노동단체와 시민사회단체들이 2016년 3월에 결성한 조직이다. 도민운동본부는 의료 취약도가 높은 서부경남 지역에 공공병원 설립을 포함한 공공의료 확충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펼쳐왔다. 공공의료를 지역의 정치·사회적 의제로 띄우기 위한 노력이었다. 특히 선거가 있는 해에는 지역의 후보자들이 ‘서부경남 공공병원 설립’을 공약으로 채택할 수 있도록 대대적인 활동을 펼쳤다.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 시절 ‘서부경남 공공보건의료체계(혁신형 공공병원 포함) 구축’을 공약으로 내기도 했다.

2018년 6·13 지방선거는 서부경남 공공병원 설립 운동에서 큰 전환기였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김경수 경남도지사 후보는 전국보건의료산업노조, 서부경남 공공병원 설립 도민운동본부와 함께 ‘경남지역 공공의료 강화를 위한 정책 협약식’을 열었다. 이 협약식에서 ‘서부경남에 주민 의견과 요구가 반영된 혁신형 공공병원 설립’이 결의되었다. 이 결의는 김경수 당시 후보의 공약에 반영되었다. 김경수 도지사의 취임 이후에는 임기 내 완수해야 할 정책과제를 집대성한 ‘도정 4개년 계획’에서 ‘6대 중점과제’ 중 하나로 채택되었다. 경상남도가 추진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정책과제라는 의미다.

다만 세부 정책 방안과 추진계획에서는 두 가지로 나뉘었다. 첫 번째는, 공공병원이 김경수 지사의 공약으로 도정 핵심과제에 포함돼 있는 만큼 경상남도 당국이 중심이 되어 신속히 추진하자는 내용이었다. 두 번째는, 도민 참여에 근거한 공론화 과정을 통해 세부 내용을 마련하자는 방안이었다. 공론화 주창자들은 진주의료원 폐업 과정에서 드러난 지역 내 갈등이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니라고 봤다. 만약 공론화 과정 없이 공공병원의 입지가 정해지면, 서부경남 내의 여러 지역 사이에서 새로운 갈등이 불거질 수 있을 터였다. 그들은 또한 진주의료원 폐업 과정이 비민주적 방식을 통한 환자 인권 및 도민 건강권 파괴의 과정이었다면, 서부경남 공공의료체계 확충 과정은 도민들이 직접 참여하여 그들의 건강권을 스스로 확립해나가는 민주주의의 심화 과정이어야 한다고 봤다.

두 가지 방안 중 한 가지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갈등이 있었지만 결국 2019년 7월16일, 경상남도와 보건의료노조, 서부경남 공공병원 설립 도민운동본부는 사회적 합의를 통한 공론화 과정을 통하여 공공병원 설립을 포함한 서부경남 공공의료 확충 과제를 결정하기로 합의했다.

6개월여 뒤인 2020년 1월7일, ‘서부경남 공공의료 확충 공론화 준비위원회(이하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의제와 참여 도민 선정 방법을 결정하는 등 공론화 과정을 설계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준비위원회는 2020년 3월27일까지 운영되면서 본격적인 공론화와 관련된 주요 내용들을 마련했다. 이에 근거해서 2020년 5월7일 ‘서부경남 공공의료 확충 공론화협의회(이하 공론화협의회)’가 구성되었다. 공론화협의회는 운영위원회·자문단·검증단·의원단·도민참여단·사무국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중에서도 도민 100명으로 구성된 도민참여단이 의사결정의 주체로 부상했다.

ⓒ연합뉴스전국보건의료산업 노조원들이 7월29일 공공의료 강화 등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공공병원은 통제받아야 할 공적 자원

도민참여단은 2020년 6월13일부터 7월4일까지 매주 토요일 4회의 토론을 거쳐 3가지 주요 의제를 토론하고 정책을 결정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서부경남 공공의료 확충을 위한 주요 정책과제 결정. 둘째, 공공병원 설립의 필요성과 위치 결정을 위한 고려 사항 논의. 셋째, 공공병원 설립 지역 이외의 의료 취약 지역을 위한 대책 및 의료기관 간 협력 방안.

두 번째가 공공병원 관련 의제였다. 의사결정에 참여한 도민들의 95.6%가 공공병원 설립을 지지했다. ‘압도적’인 지지라 할 만하다. 진주의료원 폐업 당시 경남도민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 여론조사에서는 진주의료원 폐업이 ‘잘못한 일’이라고 응답한 비율이 전체 응답자의 54.5%에 그쳤다(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의뢰 유앤미리서치 조사, 2013년 5월 31일부터 2일간 경상남도 거주 만 19세 이상의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무작위 전화 조사,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 응답률:5.93%).

하지만 진주의료원 폐업이 단행된 지 7년 만에 압도적인 주민의 지지로 새로운 공공병원이 서부경남 지역에 설립되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공공의료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태도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인데 그 중심엔 메르스, 코로나19 같은 신종 감염병 위기에 대한 경험과 성찰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경남도의 시민사회는 스스로 민주주의에 기반한 숙의와 학습, 토론을 진행하는 과정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터득할 수 있었다. ‘민간의료 부문과 시장만으로는 서부경남 지역의 의료 취약성을 극복하기 힘들다. 이 문제는 공공의료 강화를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

ⓒ경남도청 제공7월21일 김경수 경남도지사(가운데)가 ‘서부경남 공공의료 확충 공론화협의회 제7차 운영회 및 제2차 연석회의’에 참석했다.

공공의료는 보건의료체계의 공공성을 강화하기 위한 전략이자 정책 수단이다. 공공성은 민주주의와도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일본의 정치학자인 사이토 준이치는 공공성이란 용어를 세 가지 측면에서 분석했다. 첫째, ‘국가와 관계된 공적인(official)’ 것. 둘째, ‘특정한 누군가가 아니라 모든 사람과 관계된 공통적인(common)’ 것. 셋째,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open)’ 것.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개념은, 어떤 의사결정으로 영향을 받는 사람이라면 그 의사의 형성 과정에서도 배제되어선 안 된다는 의미다. ‘민주적 정통성’을 뜻하기도 한다.

서부경남 공공의료 확충의 공론화 과정은 민주적 정통성을 확립해나가는 과정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도민참여단은 ‘새롭게 신설되는 병원의 이상적인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세부 주제 토론에서, ‘우수한 의료진과 24시간 응급진료 서비스를 제공할 뿐 아니라 시민들이 그 운영에 직접 참여하는 투명성 높은 병원이어야 한다’고 합의했다. 지역 주민들이 공공병원의 서비스를 일방적으로 제공받는 대상이 아니라 공공병원 운영의 주요한 주체라는 점을 스스로 인식한 결과다. 적어도 도민참여단으로서 의사결정에 참여한 사람들은 스스로가 삶과 건강의 주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그들은 공공병원을 시민사회의 민주적 통제를 받아야 하는 중요한 공적 자원으로 받아들였다.

경상남도는 향후 공론화 결과에 따른 정책 추진 과정을 민관 협의체를 통해서 하겠다고 밝혔다. 민주적 통제라는 개념이, 정부 활동이 공공적인 의사결정에 따르고 있는지 시민사회가 감시하는 활동을 의미한다고 할 때 민주적 통제의 강도와 범위는 더욱 넓어질 것으로 판단된다.

다시 사이토 준이치로 돌아오면, 그는 민주적 정통성과 민주적 통제가 모두 민주적 공공성과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공공의료 확충은 민주적 공공성의 강화와 함께 나아가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만 한국 보건의료체계의 공공성을 굳건하게 만들고 시민사회와 정부 간 협력을 강화하며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을, 경상남도의 사례가 증명할 수 있기 바란다.

기자명 정백근 (경상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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