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nhua5월18일 스위스 제네바 WHO 세계보건총회에서 테워드로스 거브러여수스 사무총장이 연설하고 있다.

‘마스크 전쟁’이 가고 ‘백신 전쟁’이 온다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끝낼 유일한 수단으로 꼽히는 백신을 확보하려는 경쟁은 마스크에 비할 수 없이 치열할 것이다. 미국·유럽은 자본력을 동원해 백신을 먼저 손에 넣기 위한 작업이 한창이다. 그런데 우리의 고민이 단지 ‘어떻게, 많이 백신을 구할까’에 그쳐도 되는 것일까. 김선 시민건강연구소 건강정책연구센터장이 코로나19 백신의 배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국제적인 논의를 점검하며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해보았다.

■ 미국이 주도한 ‘백신 전쟁’의 서막

지난 3월2일, 미국 백악관은 ‘코로나19 대책위원회’ 회의에 코로나19 백신을 개발 중인 제약회사 대표 10명을 초청했다. 이후 이 자리에 초청됐던 독일 바이오기업 큐어백을 미국 정부가 인수하려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독일 정부는 공적자금을 들여 큐어백 주식을 사수했다. 5월13일에는 프랑스 제약기업 사노피의 폴 허드슨 CEO가 자사의 코로나19 백신 개발에 미국이 가장 먼저 투자했으므로 백신이 완성되면 역시 미국에 제일 먼저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큰 논란이 일자 허드슨은 해당 발언을 철회했다.

일찍부터 미국은 코로나19에 대응하는 보건 기술과 관련해 독자적으로 움직여왔다.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미국 정부가 연구개발에 투자했으니 그 대가로 우선 공급을 요구하는 식이다. 세계보건기구(WHO)에 ‘중국 편향적’이라며 목소리를 높이더니 4월15일에는 예산 지원 중단을 선언했다. 전 세계적 협력과 정보 공유가 필수적인 팬데믹 와중에 국제 보건 당국에 대한 예산 지원 중단이라니! 5월29일에는 결국 WHO 탈퇴를 통보했다.

미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다. 국제연합(유엔) 기구에 대한 재정 기여 의무도 당연히 가장 크다. 그런데 WHO 같은 유엔 산하기구는 재정 기여 크기와 무관하게 1국 1표 권한을 부여한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WHO를 중심으로 하는 국제 보건 거버넌스가 민주적이라고 보는 이유다. WHO의 최고 의사결정기구는 회원국으로 구성된 세계보건총회다. 세계보건총회는 매년 5월 열리는데, 이 자리에서는 중국도 미국도 194개 회원국 중 하나일 뿐이다. WHO 사무국은 총회의 요청에 따라 집행 역할을 맡는다. 테워드로스 거브러여수스 사무총장은 이 사무국의 수장이다. 그러나 미국의 자국 중심주의와 독자 행보, 중국과의 갈등 속에서 WHO를 중심으로 하는 국제 보건 거버넌스는 지속적으로 도전받고 있다.

ⓒAFP PHOTO7월21일 백악관에서 열린 코로나19 태스크포스 언론 브리핑에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발언하고 있다.

■ 유럽연합 주도의 ‘글로벌 공공재’ 선언

미국이 사라진 자리에서 프랑스와 독일을 비롯한 유럽연합(EU)이, ‘코로나19 대응 기술과 의약품은 글로벌 공공재가 돼야 한다’는 담론을 이끄는 듯 보였다. 유럽연합은 세계보건총회를 앞두고 4월15일 ‘코로나19 대응’ 결의안 초안을 제출했다. 이어 4월24일에는 WHO, 게이츠 재단과 공동주관으로 코로나19 대응을 위한 글로벌 협력체 ‘ACT-A(Access to COVID-19 Tools Accelerator)’를 출범시켰다. ACT-A는 코로나19를 막는 보건 기술(진단기기, 치료제, 백신) 개발과 생산, 그리고 이에 대한 공평한 접근을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ACT-A를 위한 기금의 초기 목표 금액은 75억 유로(약 10조2700억원)인데, 유럽연합은 이 중 14억 유로(약 1조9000억원)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유럽연합은 “만일 우리가 전 세계를 위한 백신을 개발해 국제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면 이는 21세기의 유일무이한 글로벌 공공재가 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한국 정부도 이러한 유럽연합 주도 이니셔티브에 지지와 참여 의사를 밝혀왔다. 5월4일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ACT-A에 600억원 출연을 공약했다. 5월18일 세계보건총회에서 아시아 대표로 기조연설을 한 문재인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코로나19 백신과 치료제 개발을 위해 국경을 넘어 협력해야 한다. 개발된 백신과 치료제는 인류를 위한 공공재로서 전 세계에 공평하게 보급되어야 한다.” “한국은 백신과 치료제 개발을 위한 WHO의 노력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세계백신면역연합(GAVI), 에이즈·결핵·말라리아 퇴치 세계기금(GFATM), 국제의약품구매기구(UNITAID), 국제백신연구소(IVI)에 공여국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올해부터 감염병예방혁신연합(CEPI)에도 기여할 예정이다.”

세계보건총회는 ‘코로나19 대응’ 결의안을 최종 통과시켰다. “코로나19에 대한 광범위한 예방접종의 역할이 건강을 위한 글로벌 공공재라고 인정”하면서, “코로나19 대응을 위한 (…) 진단기기, 치료제, 의약품과 백신의 개발, 시험, 생산 확대를 위해 (…) 적시의, 공평하고, 지불 가능한 수준의 접근을 촉진하기 위한 자발적 공유와 특허의 공적인 허가를 위한 기존의 절차를 포함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열흘 뒤인 5월29일, WHO는 코로나19 대응을 위한 지식과 지적재산, 데이터를 공유하기 위한 자발적인 정보공개 플랫폼 ‘C-TAP(COVID-19 Technology Access Pool)’을 출범했다. 연대와 협력을 바탕으로 보건 기술의 개발을 촉진하고 필수 의약품의 생산을 확대함으로써 공평한 접근을 보장하는, 말 그대로 글로벌 공공재를 구현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시사IN 이명익3월11일 공적 마스크를 구매하기 위해 서울의 한 약국 앞에 길게 줄이 늘어섰다.

■ ‘글로벌 공공재’ 하자더니, 백신 사전구매 경쟁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게 이런 걸까. 미국을 비판하며 ‘글로벌 공공재’를 주장했던 바로 그 유럽연합 국가들이, 백신 사전구매 계약에 나서고 있다. 6월3일 프랑스·독일·이탈리아·네덜란드는 유럽연합 국가들의 백신 공동구매를 위한 ‘포괄적 백신동맹(IVA)’을 결성했다. 6월13일에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과 제약업체 아스트라제네카가 개발 중인 코로나19 백신에 대한 사전구매 계약을 완료했다. 유럽 인구 절반 이상이 한 번씩 접종할 수 있는 규모다. 아스트라제네카는 이미 5월7일 영국 정부와, 5월21일에는 미국 정부와 사전구매 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 각각 영국 국민과 미국 국민 전원이 한 번씩 접종할 수 있는 규모였다.

WHO C-TAP 풀을 통한 코로나19 대응을 위한 보건 기술과 데이터 공유 역시 매우 저조하다. 7월23일 기준, 참여를 선언한 국가는 40개국이다. 이 중 고소득 국가는 벨기에·룩셈부르크·노르웨이·포르투갈·네덜란드 정도로 대부분 제약 역량이 미미한 나라다. 주요 제약기업이 위치한 프랑스·독일 등 유럽연합 국가는 물론이고 영국·미국·중국과 한국 정부도 참여하지 않고 있다. 그간의 온갖 선언이 무색하다. ‘누구도 소외되지 않게(유엔 지속가능 개발 목표의 슬로건)’가 아니라 미국의 독주 가운데 ‘유럽 국가들이 소외되지 않게’가 진의였나 의심스러울 뿐이다.

ACT-A에서 백신의 ‘글로벌 배분 틀’ 구상을 맡은 WHO는 7월2일 구상 중인 내용을 회원국에 브리핑했다. “공중보건을 보호하고,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을 감소시킴으로써 사회경제적 영향을 최소화한다”라는 목표가 세워졌다. 전 세계인의 건강 상태에 미치는 영향을 최대화하기 위해선 “부족한 물량을 전략적으로 배분하는”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먼저 모든 국가에서 인구 3%가 접종할 수 있는 물량을 받아 보건의료 및 사회서비스 노동자들에게 접종한다. 이후 공급량이 증가하면 모든 나라에서 인구 20%가 접종할 수 있는 물량을 추가로 받아 65세 이상 노인과 기저질환자 등 고위험군을 접종한다. 그 뒤에는 국가별로 특수한 필요성, 취약성과 코로나19 위협에 따라 인구 20%보다 많은 사람을 접종하기 위해 추가 물량 배분을 고려할 수 있다고 열어두었다.

앞서 6월11일, ACT-A에서 백신의 구매·공급 파트를 맡은 세계백신면역연합(GAVI)은 ‘코로나19 백신 글로벌 접근 구상(COVAX)’ 초안을 발표했다. 시민사회는 비판적인 입장을 밝혔는데 이 구상이 저소득 국가의 백신 접근성을 공평하게 보장한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구상은 고소득 국가와 중상위소득 국가를 하나의 그룹으로, 중하위소득 국가와 저소득 국가를 다른 한 그룹으로 묶어 설계되었다. 고소득·중상위소득 국가는 코로나19 백신 구입 비용을 자부담하는 대신 인구의 20% 물량을 받고, 중하위소득·저소득 국가는 비용을 원조받는 대신 WHO의 배분 틀에 따른 ‘최우선 인구’ 접종 물량만 받게 되어 있다. 2021년 말까지 20억 도스(투여량)를 공급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이는 자부담 국가와 수혜 국가에 각각 10억 도스씩 할당된다. 중하위소득·저소득 국가인 수혜 국가들의 인구수가 자부담 국가의 인구수보다 훨씬 많으므로 자부담 국가는 수혜 국가보다 높은 접근성을 갖게 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개별 국가가 독자적으로 백신을 사전구매 계약한 분량은 ACT-A의 배분 계산에서 고려되지 않은 상태로, 이 물량까지 포함한다면 백신 분배의 형평성은 더욱 크게 기울어진다.

■ 반면교사, 마스크와 진단키트

이러한 상황은 사실 ‘마스크 전쟁’에서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지난 4월2일과 3일,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국방물자생산법을 발동해 미국의 마스크 제조기업 3M에 N95 마스크 생산을 확대하고 캐나다와 중남미로 수출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간호사 수천 명이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일하기 위해 매일 (캐나다-미국) 국경을 넘는다”라며 트럼프 대통령의 조치를 비난했다. 마이클 로먼 3M CEO는 “미국이 수출을 중단하면 다른 나라들도 똑같이 보복 조치를 취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실제로 미국이 사용할 수 있는 마스크 수는 줄어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독일 베를린 주정부, 프랑스 일드프랑스 주정부는 중국에 주문한 마스크를 미국에 가로채기당하기도 했다. 일드프랑스 주정부의 주문은 3배 가격을 선지불한 ‘미국 구매자들’에게 넘어갔는데, 민간 구매업자가 주정부나 연방정부를 대리했을 가능성이 의심됐다. 일드프랑스 주지사는 “우리는 납세자들의 돈을 쓰고, 품질을 확인해야만 비용을 지불할 수 있다. 결국 그들이 이겼다”라고 말했다. 미국에 가로채기를 당했다는 프랑스 정부 역시 이탈리아와 스페인이 스웨덴 제조업체에 주문한 것보다 더 높은 금액을 제시해 중간에 가로채기를 한 전적이 있다. 판매자들은 최고 가격을 제시하는 쪽에 납품했다. 글로벌 네트워크나 개인적 인맥도 영향을 미쳤다.

한국은 진단키트를 빠르게 개발해 수출 여력을 갖췄고 국내 마스크 수급도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국제적인 차원에서 최선의 분배가 이루어졌는지는 따져볼 일이다. 안정적 국내 생산량을 바탕으로 마스크와 진단키트의 해외 지원을 추진하면서 미국, 일본 등 우방 혹은 이웃 국가와 에티오피아 등 한국전쟁 참전 국가를 우선순위에 두었다. 거브러여수스 사무총장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지원에도 관심을 기울여달라”고 따로 요청했을 정도다.

ⓒEPA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한 남성이 코로나19 진단을 위해 체온을 측정하고 있다. 글로벌 공공재인 백신은 필요에 따라 공 평하게 공급되어야 한다.

■ 국경을 넘는 공공 연대에 거는 기대

코로나19 유행 상황에서 미국의 독주를 비판하는 시민사회의 선두에는 국제지식생태계(KEI), 퍼블릭시티즌(Public Citizen) 같은 미국 시민사회단체들이 있었다. 유럽연합 국가들이 백신 사전구매 계약에 나서자, ‘글로벌 수준에서 충분한 생산과 공정한 배분을 보장하라’는 국제 공동성명을 주도한 쪽은 유럽 시민사회 네트워크였다. 이들의 공통적인 주장은 ‘공적 재원조달의 결과물은 공적으로 활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의 ‘공공’은 미국이 투자했으니 미국 먼저, 유럽이 투자했으니 유럽 먼저 같은 자국 우선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지식재산권(특허권 등)을 통한 독점이 아닌, 기술과 지식의 공유를 통해 생산을 확대하고 가격을 낮추는, 국경을 넘는 공공 연대에 대한 요청이다. 곧 국내와 국제를 막론하고 능력에 따라 부담하고 필요에 따라 보편적으로 공평하게 접근하는 글로벌 공공재의 이상을 구현할 방안이다.

마스크와 진단키트는 한국에 기술도, 생산 역량도 있었다. 하지만 치료제와 백신은 다른 나라에서 먼저 개발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을 제외한 전 세계의 투자·개발·생산 역량은 한국의 그것과 비교할 바가 못 된다. 다양한 효과와 부작용, 가능한 생산 공급량, 가격 등을 고려하면 어느 한 치료제, 하나의 백신에 의존하기보다는 여러 가지 옵션을 가져야 할 필요성도 있다. ‘글로벌 공공재’ 주장이 힘을 얻고 있는 또 하나의 이유다.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이 안전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우리에게 준 교훈에서 백신도 예외가 아니다.

기자명 김선 (보건경제학 박사·시민건강연구소 건강정책연구센터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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