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마리아나 엔리케스 지음, 엄지영 옮김, 현대문학 펴냄

“불길한 북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그녀는 피로 물든 손으로 귀를 꽉 막았다.”

영상 매체로 쉽게 공포물을 즐길 수 있는 시대지만 활자로 적힌 이야기를 완전히 대체하기는 어렵다. 극도의 공포는 저마다의 상상에서 나오는데, 귀신이든 괴물이든 모습이 보이는 순간 김이 빠지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출신 작가는 이 단편소설집에서 활자의 강점을 십분 살린다. 이질적인 냄새, 촉감, 형상을 상세히 묘사해 기괴한 분위기를 상상하게 만든다. 공포의 대상은 대부분 더럽고 악취 나는 빈민층이다. 사회적 약자를 천대하고 배제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을 두려워하는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에피소드마다 굵은 글씨로 적힌 클라이맥스를 읽을 때쯤에는 머리카락이 쭈뼛거린다.

 

 

 

 

 

 

 

 

이 망할 놈의 현대미술
조영남 지음, 혜화 펴냄

“거듭 강조합니다. 현대미술에는 규칙이나 틀이 없습니다.”

저자는 다른 작가가 제작한 그림에 이름만 붙였다는 ‘대작’ 논란을 겪었다. 최근 사기 혐의에 대해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그의 작품 활동에 대한 미술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100문 100답 형식으로 된 이 책에는 간략한 현대미술사와 그에 대한 조씨의 생각이 섞여 있다. 자신을 앤디 워홀과 같은 ‘팝아트의 일원’이라고 소개한 저자는, 다른 한편으로 자기 작품이 “허접”하고 “마구잡이”라 자조한다. 범람하는 ‘아재 개그’가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조씨의 인간적 항변을 날것으로 읽을 수 있는 자료다.

 

 

 

 

 

 

 

 

아프리카인, 신실한 기독교인, 채식주의자, 맨유 열혈 팬, 그리고 난민
오마타 나오히코 지음, 이수진 옮김, 원더박스 펴냄

“네 눈으로 직접 우리의 삶을 깊이 들여다봐줘. 그리고 우리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줘.”

취재를 하고도 기사에 담지 못하는 내용들이 수두룩하다. 한정된 분량에 맞춰 쓰자니 논점을 흐리는 것 같아서다.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던 한 대학원생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나 보다. ‘난민의 경제생활’이라는 주제를 들고 서아프리카 가나에 위치한 부두부람 난민 캠프에서 2008년부터 401일간 체류했다. 내전으로 인해 고향 라이베리아를 탈출한 난민 수천 명이 지내고 있는 곳이다. 집과 일자리를 잃은 난민들은 캠프에서 다시 집을 짓고, 생명을 잉태하고,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어간다. 이 책 제목처럼 누군가의 정체성이 이토록 복잡하고 다양하다. 박사 논문을 탈고한 뒤 논문에는 담을 수 없었던 후일담을 책으로 펴냈다. 누군가의 인생을 완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런 ‘군더더기’들이 필요하다.

 

 

 

 

 

 

 

 

내가 너의 첫 문장이었을 때
김민섭 외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아무것도 안 하고 정말 잠만 잤을 뿐인데.”

정지우 작가의 제안이었다. 올해 3월부터 3개월 동안 ‘작가 초대 플랫폼 북크루’에서 에세이 새벽 배송 서비스 ‘책장위고양이’를 진행했다. 김민섭·김혼비·남궁인· 문보영·오은·이은정·정지우 등 글맛 좋은 작가들의 에세이를 한꺼번에 접할 수 있는 기회였다. 메일함을 채우던 글 63편이 에세이집으로 나왔다. 하나의 주제 아래 각자 글을 썼다. 첫 번째 주제는 고양이다. 책의 큰 주제는 ‘언젠가’다. “과거의 언젠가, 미래의 언젠가를 떠올리면서 지금 여기에서 ‘언젠가’를 이야기한다.” 작가 일곱 명 모두 평범한 일상에서 결정적 순간을 포착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들의 언젠가를 들여다볼 수 있다. 각자의 색과 취향도 달라서 어떤 글은 패스해도 어떤 글은 반드시 정독하게 된다.

 

 

 

 

 

 

 

 

SF는 어떻게 여자들의 놀이터가 되었나
조애나 러스 지음, 나현영 옮김, 포도밭 펴냄

“문화의 성은 남성이다.”

‘SF의 가장 낯선 외계 생명체, 즉 여성에게 SF를 전달해준 작가.’ 2011년 조애나 러스의 부고 기사를 다룬 〈뉴욕타임스〉는 그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다. 그는 SF 작가이자 비평가다. 페미니스트이자 퀴어 활동가이기도 하다. SF와 공포소설을 읽으며 10대 시절을 보냈다. 그가 막 활동을 시작했던 1960년대, SF는 백인 이성애자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러스는 1970년대부터 페미니즘 SF 비평을 본격 시작했다. 그의 대표적인 글을 모은 SF 비평집이다. SF와 젠더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어째서 여성이 SF를 사랑하는지에 대해 명료하게 말한다. 김보영 SF 작가의 추천사처럼 SF를 통해 여자들은 ‘어느 과거에도 현재에도 없는 세상을, 모든 규칙이 달라진 세상을’ 만났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눈빛아카이브 사진, 눈빛출판사 펴냄

“전쟁 사진은 전쟁을 찍지만 역설적이게도 전쟁에 반대하는 사진이다.”

언뜻 보면 모래톱이 깔린 강줄기를 찍은 풍경사진 같다. ‘이게 왜 전쟁 사진이지?’ 유심히 들여다봐야 왼쪽 구석의 강변 풀숲 더미에 걸린 시체 한 구가 눈에 들어온다. 사진에는 다음과 같은 캡션이 달려 있다. “지옥은 바로 어제 여기였다:저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더 이상 심문할 수도 없다. 그는 단지 지옥에 취해 있을 뿐이다.” 1950년 버트 하디가 낙동강에서 촬영한 사진 한 장과 그가 적어놓은 문장 몇 줄을 통해 우리는 희미하게, 그러나 직관적으로 전쟁을 이해할 수 있다. 글씨로 가득 찬 페이지보다 사진 한 장만 실려 있는 페이지를 넘기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여유 있을 때 펼쳐 보기를 추천한다.

기자명 시사IN 편집국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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