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켈 그림

10대 후반부터 ‘알바’를 시작해 노동하게 된 지 14년째다. 일하는 게 좋아서 한 적은 없다. 쉬는 날이면 집에 누워만 있었다. 이제는 돈 받지 않아도 하는 일, 재밌는 일, 의미 있는 일이 우리를 살린다고 생각한다. 그런 걸 원활히 하며 살기 위한 방편으로서 기본소득을 원한다.

페미니스트 경제지리학자 캐서린 깁슨은 2017년 한국에서 열린 한 포럼에서 ‘지불노동(돈 받는 노동)’을 하지 않고 장애연금을 받아 생활하며 마을에서 기꺼이 학생 돌봄, 학교 시설관리, 정신장애인의 자조 네트워크 운영 등을 담당하는 사람의 사례를 공유했다. 그는 기본소득의 의의를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시민의 경제적 기여에 대한 인정으로 설명했다.

물론 기본소득이 완전한 답은 아닐 것이다. 최저임금 아르바이트부터 주 40시간짜리 4대 보험을 적용받는 노동에 이르기까지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최소한의 기본소득으로 문화적 인프라와 사회안전망을 대체하고 어떻게든 살아보라고 하는 게 답은 아니라는 것을. 톨게이트 노동자의 노동이 단순히 작은 공간 안에서 표와 돈을 바꿔주는 그 자체가 아니듯 말이다.

그 노동자들에게는 ‘도로공사에서 일한다’는 자부심이 소중하다. 카드사에서 신용카드를 만들고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수 있는, 즉 ‘근로소득’을 가졌으며 서류로 증명이 가능한 사람으로 ‘취급’되고 싶어 한다. 노동은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사회적 가치에 대한 인정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회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곳이다. 평일 해가 떠 있는 시간 내내 얼굴을 마주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내가 고르지 않았다. 회사는 어떻게든 인간을 과업 달성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이용당할 수밖에 없는 속성이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회사에서 은퇴한 노년 남성들이 갑자기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쉽게 방황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 그런 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일상의 대부분이고, 회사 일이 인생의 중요도를 선점하는 삶을 사회 전체가 이렇게 당연시하다니. 어떻게 보면 참 기괴한 일이다. 그런 곳에 평일 9시간 이상 매여 있어야만 사회적 인간, 시민으로서 자격이 주어지는 사회는 지속 가능할까?

성장과 생산력에 대한 기대가 없는 병자·장애인·노인, 더 나아가 동물에 이르기까지, 장시간 지불노동의 장 밖에 있는 존재들에 대한 이 사회의 대접을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다. 내가 그런 존재로 여겨질 때 어떤 대접을 받게 될지도 말이다.

주 4일제, 주 30시간 이하 지불노동의 기본화

모두가 모두를 돌보는 사회의 기본, 최소한의 전제조건은 뭘까. 우선은 모두가 지불노동을 지금보다 덜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정신없이 일하다가 출산하게 되면 아이 기르는 동안 잠깐 휴가를 주겠다거나 근무시간을 줄여주겠다고 한다. 이런 방안은 사실 미봉책에 불과하다. 주변인에 대한 돌봄, 가사, 생활체육, 개개인의 자아 정체성을 구성하는 취향 계발, 자아 탐구의 시간 등을 일상적으로 할당받으며 과로사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삶을, 제도는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주 4일제, 주 30시간 이하 지불노동의 기본화가 미래다. 꿈이 있다면, 이런 조건이 당연시되는 사회를 만들고 후속 세대에 ‘적폐’로 비판받는 것이다. “할머니, 무슨 소리예요? 인간이 왜 그렇게 돈 버는 데 시간을 많이 쓰고 살아야 해요?” 이런 볼멘소리를 죽기 전에 꼭 듣고 싶다.

기자명 홍혜은 (저술가·기획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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